15화
“허허! 이쪽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차에서 내린 구호국은 자신이 이 한옥 건물의 주인인 양, 앞장서며 안내했다.
유진은 그런 성호 그룹 회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중심 건물과 따로 떨어진 별채에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마 이쪽 전부를 빌려 둔 모양이었다.
“혹시 식사는 하고 오신 겁니까?”
“아니.”
“쯧쯧! 현성 그룹도 한물갔군요. 비즈니스를 하면서 식사 접대도 안 하다니요. 혹시 술은 좀 하십니까? 제가 꽤 좋은 와인을 가지고 와서 말이죠.”
“술이라…….”
1천 년 전 유럽 전역을 떠돌던 블라드 유진은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맛보곤 했다.
뱀파이어는 혈액 외의 액체도 마실 수 있었는데, 대부분은 주로 술이나 차 등을 취미로 즐겼다.
그 삭막한 중세 암흑기에 유희 거리가 무에 다양했겠는가.
하지만 그의 입맛에는 보르도 와인도 별로여서, 당시 유진은 술 대신 차를 훨씬 많이 마셨다.
그래도 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좀 하지.”
“오호! 다행입니다. 오늘은 샤또 페트뤼스 2010 빈티지를 맛볼 수 있겠군요.”
미궁 사태 전에는 대략 800만원 선이었던 이 와인은 이제 수억 원을 가뿐히 호가하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프랑스 남서부 지방이 절반 이상 오염 지대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양조장이 문을 닫았으니, 이미 생산된 와인의 몸값이 치솟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자자, 식사는 일단 한잔하고 시작하시지요.”
투두둑! 끼긱! 끼긱!
구호국은 와인에 별로 조예가 없는 모양인지, 꽤 오랫동안 낑낑대다가 간신히 코르크 마개를 제거했다.
그러고는 와인 잔에 술을 절반 이상 콸콸 따랐다.
교양이라고는 일절 없는 모습이었으나, 블라드 유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세에는 오크를 뜯어 만든 큰 사발이나 길쭉한 병에 와인을 담아서 대충 맛보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물론 극소수의 상류층을 제외한 대중적인 경우에 말이다.
“건배하시죠.”
쨍!
구호국은 탁자를 거의 넘어오다시피 해서 잔을 부딪치더니, 레드 와인의 반 정도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손을 펼쳐서 쭉 마시라며 권했다.
상당히 성미가 급한 사람임이 방금의 행동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아! 이러면 영 술맛이 나지 않겠군요. 제가 깜빡했습니다.”
짝짝!
그가 잔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붉은 술을 바라보고만 있으니, 구호국은 손뼉을 짧게 두 번 쳤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긴 입단속이 철저한 곳이라서요. 괜히 비밀 요정(料亭)이라 불리겠습니까?”
이곳은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이 암암리에 회동할 때 이용하는 요정이었다.
90년대 말에 이르러 이러한 요정들은 대부분 전통 음식점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하지만 요정 중에는 마치 기생처럼 한복을 입고 주흥을 돋우는 형태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곳처럼 음식점과 함께 별채를 따로 운영하여 매출을 유지하는 가게가 종종 존재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공급이 그에 따라올 수밖에.
“흠…….”
블라드 유진은 자신의 양옆에 앉아 앞접시에 음식을 덜어 주는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꽤 예쁘장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의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다이애나 로즈나 루시아, 전시영 같은 세계 정상급의 미모를 너무도 자주 접한 탓이었다.
당장 거울만 들여다봐도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미인계를 쓴다 한들 눈에 들어올 리가 있나.
아니, 애초에 유진은 이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의 환심을 사겠다고 발악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듣는 귀는 적은 게 좋지.”
블라드 유진이 슬쩍 손을 흔들자, 구호국은 잽싸게 여인들을 향해서 고갯짓했다.
얼른 자리를 비우라는 의미였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쫓기게 되었지만, 그들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 없이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갔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닫히는 찰나의 순간에 바깥의 부하들과 시선을 맞춘 구호국은 짧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별채 주변에 있던 기척이 이전과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멀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원하시는 대로 주위를 싹 물렸습니다.”
“눈치는 빨라서 좋군.”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걸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좋지.”
눈치 빠른 구호국은 그가 원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채고,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이 순간만큼은 양아치 같은 느낌의 성호 그룹 회장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저희는 현성건설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10……. 아니, 12% 면적의 토지를 뚝 떼어 드리죠. 개발권을 매각하거나 직접 사용하기 좋게, 한 덩어리를 통째로 드리겠습니다.”
구호국은 10%를 부르려다가 유진의 기색을 슬쩍 살피고는 얼른 2라는 숫자를 붙였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 나온 조건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놈은 현성건설보다 더한 놈이로군. 어찌어찌 사세는 키웠지만, 아직도 양아치 본성은 못 버렸구나.’
그 말인즉, 외곽의 쭉정이 땅만 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현성건설의 신헌영이 신사적인 척하며 실리를 챙기려는 사람이라면, 구호국은 대놓고 사기만 치려 하는 쓰레기였다.
이 녀석은 하수인으로 부릴 만한 가치도 없었다.
“쯧!”
순간적으로 살의가 치밀어 올랐지만, 유진은 짧게 혀를 차며 들끓던 피의 권능을 가라앉혔다.
이런 하찮은 놈의 피를 소수혈인에 묻히는 것 자체가 격 떨어지는 일이었다.
스윽! 척!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구호국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조건이로군. 별로 재미없네.”
“하하! 계약 조건이라면, 충분히 조정할 수 있습니다. 보상을 얼마나 원하십니까?”
“중심가와 외곽지를 정확히 절반씩 나누면 좋겠는데.”
“예?”
“이 정도면 상당히 관대한 제안 아닌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주는데 말이야.”
“그…….”
구호국은 말을 하다 말고 겸연쩍은 얼굴로 볼을 벅벅 긁었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하는 행동인데, 그런 버릇이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것이다.
그만큼 이자가 그의 요구에 당황했다는 증거였다.
어색하게 볼을 씰룩거리던 구호국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블라드 유진은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조건 제시가 없었으니, 결렬된 거로 간주하고 자리를 파하려는 것이다.
역시나 성호 그룹 회장은 떠나는 그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이 다 되었겠지.’
벌써 유진은 구호국의 심리를 대번에 파악하고 있었다.
서로의 조건을 비교해 보고 절충안을 가늠해 보니,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거기까지 계산이 순식간에 끝났기에, 그와의 절충점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못 했던 것이었다.
뭘 제시해 봐야 블라드 유진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뻔하니까.
꿀꺽! 꿀꺽!
별채에 혼자 남은 구호국은 샤또 페트뤼스를 병째 들이켜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소문보다 훨씬 더 오만하군. 두고 보자. 같잖은 명성을 좀 얻었다고 올라간 콧대, 내가 박살을 내 주마.”
쨍그랑! 콰앙!
구호국은 악력만으로 와인 병을 와장창 깨트리더니, 그대로 메주먹을 후려갈겨 식탁마저 반으로 쪼개 버렸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 * *
현성건설 부사장과 성호 그룹 회장이 악감정을 갖든 말든, 유진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그딴 인간 놈들이 악의를 품어 봤자, 그에게 조금도 해악을 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정웅철과 함께 오지 않아, 녹턴을 타고 빠르게 귀가했다.
“날 이용해 먹으려는 놈들을 지켜보는 게 참 재밌었는데, 저만큼 미친놈들은 처음이로구나.”
이제껏 블라드 유진을 찾아온 자들은 하나같이 뭔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신헌영과 구호국처럼 크게 한탕을 해 먹으려는 놈들은 드물었다.
대부분이 인터뷰 또는 화보나 광고 촬영 등지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었으니까.
별로 건진 건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신선한 만남이었다.
“오셨습니까? 대부님.”
“아, 그래.”
현관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정웅철이 잽싸게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구호국이라는 건달 자식을 만나고 왔더니, 진 연합체의 비인가 헌터인 이 녀석이 신사로 보일 지경이었다.
물론 사실상 별반 다를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 미궁 개발 지원안을 놓치기는 싫은데.’
장진석 대통령이 발표할 예정인 미궁 개발 지원안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내용이었다.
참여 자격이 2년 이상 활동 중인 기업체고, 서울 이북의 땅에 한정되어 있지만.
솔직히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기회였다.
쪼르륵!
커피를 내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그는 현관 앞의 소파에 앉아 있는 정웅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예, 대부님.”
“미궁 개발 지원에 참여하려는 기업 리스트를 좀 뽑아 와. 내가 역으로 경매를 걸어야겠다.”
“어……. 무슨 말씀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합체에 문의해서 곧장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그러는 게 좋겠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휴대 전화를 붙잡은 정웅철은 한참 동안 테라스 앞을 초조하게 거닐었다.
진 연합체의 정보망을 이용해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려는 모양이었는데,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 듯했다.
유진은 방금 내린 커피를 느긋하게 들이켜며 그런 정웅철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좀 더 똘똘한 녀석이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DK가 그립군.’
머리를 써야 하거나 비밀스러운 내부 정보가 필요할 때는 DK만 한 인재가 없었다.
정웅철은 충성심이 높지만, 업무 능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흑룡에게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아 해 줄 유능한 녀석을 구해 오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기를 붙잡고 애쓰는 정웅철에게서 눈길을 거둔 그는 소파에 앉아 TV를 켜 보았다.
삑! 띠디딕!
“슬슬 때가 되었나.”
지금쯤이면 미궁 개발 지원안이 언론에 뿌려졌을 것이다.
장진석 대통령이 워낙 전격적으로 내놓은 지원안이었기에, 대기업에서도 정보를 그리 빠르게 얻을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뉴스 보도보다 한나절 정도 일찍 알았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그토록 서둘러서 블라드 유진을 만나려 했던 모양이었다.
리모컨을 붙잡은 그는 위아래로 버튼을 조작하며 뉴스 채널을 찾았다.
은색 삼각형 로고가 보이자, 그제야 손을 놓고 소파에 더욱 깊게 몸을 파묻었다.
그런데 이윽고 유진은 소파 앞으로 당겨 앉아야만 했다.
뉴스 채널에서는 미궁 개발 지원안 대신 긴급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시끄럽게도 하는군. 저 녀석을 괜히 붙여 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