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잔뜩 올라 있던 긴장감이 탁 풀어졌다.
신헌영 부사장은 살짝 밝아진 표정으로 사업 계획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쪽 업계에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정부에서 곧 미궁 개발 지원안을 발표할 겁니다.”
“그게 뭐지?”
“국가에서 주도하던 오염 지대 개발을 민간으로 돌리는 사업입니다. 기업 소속 헌터들의 무력 투사를 끌어들이려는 계획이지요.”
사실상 기업 소속 헌터들은 이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과거, 오염 지대가 서울권 내로 들어오지 않도록 막을 때는 그래도 꽤 유용한 구석이 있었다.
기업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따금 용병 헌터들이 활동을 개시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영토를 마구 넓혀 나가는 현 상황에서 그들은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전선이 확장되면서 전투 인력은 갈수록 부족해지는데, 용병 헌터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진석 대통령은 이번에 미궁 개발 지원안을 들고나왔다.
“지원안의 골자는 미궁을 정화하고 확보한 영토에 개발 우선권을 주는 것입니다.”
“호오? 상당히 솔깃했겠군.”
“그렇습니다. 건설 업계에서는 아주 뜨거운 사안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알짜배기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걸려 있으니까요.”
미궁 개발 지원안은 건설 업계뿐만 아니라, 온갖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했다.
그런 상황에서 발 벗고 나서지 않을 기업은 없을 터였다.
건설업을 하지 않는 그룹에서도 눈독을 들일 정도였으니까.
벌써 대기업끼리는 물밑으로 협상안이 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원안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대상 지역이 있겠군.”
“그렇습니다. 서울 북쪽의 토지에만 한정하여 지원안이 적용될 겁니다.”
장진석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칼을 빼 들었다.
이제 거의 사병화 되어 국가 권력까지 위협하고 있는 기업 소속 헌터를 전장으로 끌어낼 초석.
그것이 바로 이번에 발표할 미궁 개발 지원안이었다.
상황을 모두 이해한 유진은 느릿하게 주억거리며 신헌영을 직시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현성건설 부사장은 그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확보한 토지 5%를 드리겠습니다.”
새로이 확보한 땅에서 시작될 대규모 사업은 거대한 파이로 발돋움할 터였다.
특히나 영토가 좁고 산지가 많은 대한민국에서 개척지는 큰 기회로 다가올 것이다.
지금도 각종 기업과 사람들이 좁아터진 수도권에서 벗어나 지방으로 이동하고 있지 않나.
확장의 경제 효과와 달콤한 과실을 맛본 자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개인에게 5% 크기의 토지를 준다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곳에 올라갈 건물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현성건설의 입장에서 말이지.’
신헌영은 차기 현성 그룹의 회장으로 가장 유력한 데다가, 건설과 헌터 업계 쪽에서 입지가 굳은 인물이었다.
아무래도 딴말이 나오지 않으려면, 유진과의 계약에서 우위를 점해야만 했다.
세계 최강 헌터를 구워삶아서 능력을 보이는 등의 소소한 것조차도 그룹 내부의 평판이 될 것이다.
흡혈을 통해 지급할 수 있는 최대치를 얼추 알고 있었던 그는 부사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미동도 없는 피부와 눈꺼풀, 정확하게 고정된 시선은 블라드 유진을 마치 밀랍 인형처럼 보이게 했다.
생기라곤 조금도 없는 삭막한 등신대(等身大) 인형 말이다.
신헌영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한참을 기다리자,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최대 조건은 아니겠지.”
“무, 물론입니다.”
별로 관심 없는 듯한 눈빛과 태도에 대표 이사 부사장은 말까지 더듬으며 대답했다.
머릿속으론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을 되뇌면서 말이다.
“7% 아니, 8%까지 올려 드리죠. 이게 저희가 제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입니다.”
“흠…….”
탁!
머그잔을 내려놓은 유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발걸음을 돌리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생각 좀 해 보지.”
“그, 그렇다면 연락은 이쪽으로 주십시오.”
신헌영은 잽싸게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와 명함 한 장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그는 이재철을 비롯한 임원들의 명함을 꺼내 보더니, 부사장의 것과 가볍게 합쳐 버렸다.
그 장면을 본 신헌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돌변했다.
면전에서 자신과 임원들의 명함을 겹쳐서 정리하는 모습에 상당한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치 모두를 싸잡아 취급하는 듯한 태도.
실제로 유진은 인간들을 그저 맛없는 식품 정도로 보고 있었기에, 그런 인상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그룹 오너가(家)의 일원이 어디서 이런 취급을 받아 보았겠는가.
대표 이사 부사장의 미간에는 어느새 두 줄기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살펴 가십시오.”
미묘한 감정의 울림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신헌영은 꾹 눌러 참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발걸음을 돌려서 부사장실을 그대로 나가 버렸다.
“부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인사하는 자세로 굳어 있던 신헌영은 이재철 전무 이사가 말을 걸자, 그제야 머리를 들었다.
“하, 하하.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다 있는 거지요.”
그자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임원들을 돌아보았다.
물론 부사장의 눈빛은 살짝 불편하게 흔들렸다.
현성건설 임원들 또한 신헌영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말로는 괜찮다고 해도 사람 마음이 항상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기색을 눈치챈 모양인지, 부사장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임원들을 안심시켰다.
“계약이 완료될 때까지는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세요. 우린 깔끔하게 취할 것만 취합시다.”
“예.”
* * *
“일단은 보류인가.”
정웅철이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상석에 앉은 블라드 유진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토지 8%를 준다고 했지만, 그게 개척 사업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알짜배기 땅이 아니라, 외곽의 땅을 주더라도 계약을 어긴 건 아니니까.
만약 그가 이의를 제기하면, 적당히 쭉정이를 섞어서 줄 작정일 터였다.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유진이 받을 땅은 수십만 평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성체 미궁을 얼마나 정화하느냐에 따라서 받는 보상이 달라질 테니까.
하지만 그는 현성건설이 얻게 된 이득을 순순히 다 넘겨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나는 개인이고 자신들은 집단이라 이건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놀랍게도 저 오만한 기업가 녀석은 자신이 계약상의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강력한 헌터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거대한 기업 집단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헌터의 경우일 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혼자서 한 국가를 통째로 증발시켜 버릴 수도 있는 존재에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잔재주였다.
‘아직 헛짓거리까지는 안 했으니, 보류.’
부우웅!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차량은 청담동 저택의 정문에 도착했다.
손님들은 우측의 주차장을 사용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전용 차고에 바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지이이잉! 철컹!
서행하던 정웅철은 셔터가 완전히 올라가자, 차고 안으로 차를 집어넣으려 했다.
끼익!
그런데 문득 검은 정장을 입은 누군가가 세단의 앞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은 정웅철은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급정거하자마자 그의 안위부터 묻는 충성심 어린 행동이었다.
“대부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차를 멈추게 되어 죄송합니다.”
“됐다. 난 여기서 내리지.”
“예.”
덜컥! 텅!
차에서 내린 유진이 정문 쪽으로 걸어가려 하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와 고개를 모로 꺾었다.
“아이고! 교황청이 배출한 최고의 헌터, 블라드 유진 님이 아니십니까? 여기서 다 뵙네요? 우연도 이런 우연이! 허허허!”
건들건들한 걸음걸이와 과장된 몸짓, 익살스러운 말투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흐르는 남자.
‘비인가 헌터들과 비슷한 느낌이로군.’
흑룡을 비롯한 진 연합체 조직원들을 자주 봐 왔던 그는 상대의 정체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진 연합체야 상당히 신사적이고 체계적으로 바뀌었다지만, 근본이 비인가 헌터임은 어쩔 수 없었다.
밝은 세상의 이면에서 선량한 시민들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조직 폭력배.
상대에게서는 그런 자들의 냄새가 짙게 풍겨 오는 중이었다.
척! 척! 척!
불현듯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일단의 무리가 저택 정문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만남을 바라는 인물들로 정문 근처가 북적북적해야 할진대,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자들이 블라드 유진을 만나러 온 사람들을 모조리 쫓아냈으리라.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를 막아섰던 인물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누군지 안다면, 비인가 헌터 놈 주제에 이따위 간 큰 행동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아, 진 연합체의 수장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구나.’
조직의 핵심 인물들을 하수인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진 연합체 내부 정보가 새어 나가는 일은 결단코 없었다.
그러니 저들은 유진을 그저 교황청의 잘나가는 헌터 정도로 생각할 수밖에.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향해서 질문을 던졌다.
“뭐지?”
“하도 만나기가 어려운 분이라 말이죠. 이런 이벤트를 좀 만들어 보았습니다. 듣자 하니……. 현성건설과 접촉하셨다고요?”
“소문이 빠르군.”
“크흐흐! 건설 수주 따는 바닥이 워낙 좁지 않습니까?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스윽!
날카롭게 생긴 호리호리한 남자는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오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따라 참 이 쓸모없는 종잇조각을 여러 번 받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호 그룹, 성호종합건설 대표 이사 회장 구호국.’
구호국의 나이는 신헌영과 비슷해 보였다.
일부러 직함을 낮춘 현성건설 부사장과는 달리, 이자는 명함에 당당하게 회장이라는 두 글자를 박아 넣었다.
아마도 자신의 자리를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이런 명함을 만든 모양이었다.
뭐 조직마다 지배 구조와 직함이 다 다른 법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현성 그룹보다 체급이 한참 작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이 건달 같은 젊은 녀석이 좋은 자리는 다 해 먹는 것만 봐도 뻔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물건을 어디 한군데만 가서 보고 살 수는 없잖습니까? 저희의 이야기도 좀 들어 보고 선택하시지요.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구호국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인사하자, 그는 픽 헛웃음을 흘렸다.
놈의 행동에서 진 연합체의 조직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차를 대고 나온 정웅철이 멀찍이 서서 유진에게 묵례해 보였다.
“좀 다녀오지.”
“예.”
사람들 앞이라는 걸 인식한 모양인지, 정웅철은 대부님이라는 칭호를 생략하고 깔끔하게 대답만 했다.
부우웅!
그러는 사이, 성호 그룹에서 가져온 검은 세단이 그의 앞에 도착했다.
덜컥!
구호국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인 뒤, 당연하다는 듯이 차에 올라탔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볼까?’
어차피 뱀파이어인 블라드 유진에게 인간들이 정한 선악의 기준은 통용되지 않았다.
상대가 저열한 짓도 서슴지 않는 비인가 헌터라고 해도 얼마든지 성체 미궁을 밀어줄 용의가 있었다.
높아진 그의 몸값만큼 가격을 잘 쳐준다면 말이다.
부우우웅!
청담동 저택을 줄지어 떠난 검은색 세단의 행렬은 이윽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한옥 앞에 멈춰 섰다.
‘여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