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의장의 말에 비석들은 한동안 침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걸 황색 비석이 제대로 짚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250년 단위니 이제 슬슬 할 때로군요. 절묘하지는 않아도 썩 나쁘지 않은 타이밍입니다.”
“그렇소이다. 인재가 없으면, 서열 결정전에서 뽑으면 되지요. 허허!”
마계 서열 결정전은 마족들의 순위를 새로 매기는 아주 중차대한 행사였다.
이때 마족은 누구에게든 도전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자신보다 10위 정도 높은 자를 노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영웅은 나타나기 마련.
마계 원로회의 일원들은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인재가 두각을 나타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난번에는 최약체로 평가받던 사르판조차도 이기지 못하는 놈들뿐이었으니까.
250년이면 강자존 사상에 찌든 마계에서 새로운 인재가 탄생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럼 서열 결정전까지 기다리는 거로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뵙겠군요.”
회의 결과가 나오자, 원로들은 간단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며 통신을 종료하려 했다.
그런데 동쪽에 서 있던 푸른 비석이 문득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게 아닌가.
“그나저나 키에리 폐하께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입니까?”
되돌아가려던 원로들은 움직임을 멈춘 채, 각자 생각에 잠겼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공작만 달랑 두고, 어디서 무얼 하시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긴 우리가 마왕 폐하께서 뭘 하시는지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원로들은 1천 년간 공작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존재였다.
바꿔 말하면 네 번의 서열 결정전을 겪는 동안, 마왕 자리에 한 번도 도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했다.
얌전히 공작 작위만 지키다가 원로가 된 이들이니, 마왕을 추적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원로 자리까지 날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름의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그나저나 그자는 어떡할 거랍니까?”
“그자라면……. 지구의 그 괴상한 헌터 블라드 유진 말이로군요.”
“아직 위에서 아무런 안건도 내려오지 않은 상태 아닙니까?”
마계 원로회는 세 마왕이 내려보낸 안건에 관해서만 심의하게 되어 있었다.
유진은 벌써 두 번이나 지구 점령 계획을 무산시킨 존재였다.
물론 안테리오르 타워 때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최상위 헌터들의 수효를 300명이나 줄였으니까.
하지만 천공의 성은 별다른 성과도 없이 되레 마계 귀족들만 전사하고 말았다.
“일단은 불가침을 먼저 깬 건 우리 측이니, 두고 보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런 종잇장 같은 계약이 아직 유효하다니, 신기할 따름이군요.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딱히 별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뭔가 꾸미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요.”
“그따위 헌터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 조심하는 건지 알 수 없군요. 사르판 같이 하자 있는 놈 말고, 제대로 된 공작만 보내도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명령이 내려와야 말이죠.”
“흠!”
이번 안건과 관련 없는 이야기가 이어지자, 의장이 중간에 끼어들어 원로들을 중재했다.
“자자, 잡설이 너무 길었습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시지요.”
“그럽시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빛무리를 뿜어 대던 비석들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다들 조만간 따로 봅시다. 아마 서열 결정전 이후가 되겠구려.”
“그러시지요.”
츠츠츠츠츠!
이윽고 비석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하나둘씩 꺼지더니, 완전한 암흑에 잠기고 말았다.
* * *
안드레아가 왔다 간 이후, 블라드 유진의 집 위치가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원래는 헌터 협회에서 기밀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교황이 방문함으로써 시선이 확 쏠려 버렸다.
청담동의 큼직한 공원이 사유지로 변하고, 저택이 생겼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순식간에 거물로 성장한 만큼, 그를 찾는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있었다.
후원을 원하는 시민 단체부터 시작해서 기업, 길드, 각국 정부 등에서 수도 없이 접촉을 시도했다.
덕분에 정웅철은 연신 손님맞이를 하고, 방문자 순서를 관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은 정웅철에 의하여 입구에서 걸러지는 중이었다.
모두 만나기에는 너무 많은 이들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대부님, 현성건설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건설사까지 찾아오는군.”
여러 곳에서 찾아와 각종 제안을 늘어놓는데, 그런 인간 군상들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이익을 위해 입에 발린 소리를 해 대는 꼴이라니.
유진이 손을 까딱거리자, 정웅철은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현관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이윽고 녀석은 정장을 입은 세 명의 남자와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유진 님. 현성건설 전무 이사 이재철이라고 합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년 남자가 공손히 명함을 건네는 모습은 왠지 느낌이 묘한 장면이었다.
보통은 저 나이에 그만한 직급을 갖추고 있으면, 사람이 좀 뻣뻣해지기 마련이었다.
대기업 전무라면 사실상 어딜 가나 꿀릴 게 없는 위치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의 앞에 선 이재철 전무는 수십 년 전의 유능한 영업 사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만큼 내게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이겠지.’
블라드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가 순식간에 없애며 세 중년 남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머지 둘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야 그는 새하얀 손을 뻗어 검지와 중지로 명함을 살짝 뽑아 들었다.
유진이 명함을 받자, 현성건설의 임원들은 접었던 허리를 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음성이 거실에 울려 퍼졌다.
삭막하고 건조한 목소리에 현성건설 임원들은 순간적으로 영혼이 옥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그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재철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압박에 굴하지 않고, 웃는 낯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저희 현성건설은 헌터계 최강의 자리에 오르신 유진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호오?”
의외로 상당한 전무의 기백에 블라드 유진은 눈에 이채를 띠며 턱을 슬쩍 들었다.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의미였다.
“이 장소는 저희의 비전을 보여 드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업이란 서로가 알아가야 하는 일이니만큼, 준비된 곳으로 이동하시지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이놈들이 대체 뭘 보여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재철 전무는 전권을 가진 자가 아니로구나. 이놈의 주인이 날 부르는 것인가.’
어디론가로 이동해야 한다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이재철이 보인 기백은 마음에 들었다.
일반인이 유진의 살기를 버텨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정웅철을 불렀다.
“차 대기 시켜. 이놈들을 따라간다.”
“예!”
척! 척!
블라드 유진은 이재철 전무에게 대충 출발하자는 손짓을 보내곤 차고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제야 장내 사람들의 숨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허억! 헉! 다들 숨 쉬어집니까?”
눈앞에서 대놓고 이놈 저놈 했지만, 현성건설 임원들은 뭐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금 잠깐 대면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굳이 그 엄청난 살기에 직면하지 않더라도 유진의 강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미 그가 걸어온 길이 무력을 증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블라드 유진을 만난 임원들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렸다.
“가, 가시죠. 이러다 우리가 더 늦게 나가겠습니다.”
“예…….”
* * *
이재철의 차량을 따라가 도착한 곳은 종로구 안국동의 현성건설 사옥.
유진은 진 연합체에서 마련해 준 검은색 세단을 타고 건물 앞에 내렸다.
그러자 현성건설 임원들이 다가와 그를 안내했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10층의 부사장실이었다.
“사장이 아니라 부사장인가.”
“아, 예. 저희 대표 이사님이 젊으신 편이라, 직함만 부사장을 달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이 회사의 수장이다. 이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철컥!
이재철이 문을 열어 주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앞에 비서실이 따로 있었지만, 블라드 유진의 행보를 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이패스로 곧장 부사장실에 입성한 그는 창문 너머에 보이는 경관을 쭉 둘러보았다.
경찰서와 박물관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건물의 입지 조건은 좋아 보였다.
유진은 비서가 갖다 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소파의 상석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캡슐은 오랜만이로군.”
간만의 캡슐 커피에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머그잔을 흔들었다.
손목 움직임에 따라 잔에 담긴 커피가 찰랑이며 춤을 췄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부사장실로 황급히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현성건설 대표 이사 부사장 신헌영입니다. 반갑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사과부터 한 젊은 남자는 듬직한 덩치와 굵직한 얼굴선이 인상적이었다.
얼핏 보면 그룹 오너 일가의 일원이 아니라, 경호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신헌영이 두툼한 손을 내밀자, 블라드 유진은 눈에 이채를 띠며 곧장 마주 잡아 주었다.
‘알아서 얻어걸려 주는구나.’
츠츠츠!
손끝이 투명하게 변하는 순간, 부사장의 혈액 일부가 아무도 모르게 그의 체내로 흡수되었다.
순간적으로 신헌영의 기억을 훑은 유진은 현성건설이 어째서 접촉해 왔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상대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당히 과묵하신 분이로군요.”
“본론부터.”
“아, 예. 원하신다면 바로 핵심을 꺼내 놓겠습니다. 저희는 블라드 유진 님과의 계약을 원합니다.”
“용병 헌터인가.”
“오! 이미 아시는군요. 고용 헌터 또는 기업 소속 헌터라고도 불리지요.”
“이 업계에 몸담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사실 그는 그런 게 있다는 것 자체를 전혀 몰랐다.
기업 소속 헌터는 비인가 헌터와 비슷하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들은 오로지 기업의 자산 보호와 오너 일가의 경호에만 힘을 쓰는 PVP 특화 헌터였다.
비인가 헌터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합법적인 조직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유진에게는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는 자리였다.
“내가 무슨 답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겠군.”
“물론입니다. 유진 님이 고작 용병 헌터나 하실 분은 아니지요. 하하!”
“내 마음에 들 만한 제안이 있나?”
“당연하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희가 개발하려는 곳의 땅을 드리겠습니다.”
신헌영의 말을 들은 그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상대가 제안한 것이 생각보다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런 제안을 할 줄은 몰랐는데. 기억을 좀 더 읽어 볼 걸 그랬나.’
블라드 유진은 입맛을 다시며 부사장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듬직한 덩치의 신헌영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일반인 주제에 이재철처럼 그의 살기에 저항하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따라 마음에 드는 놈들이 많군.’
살기를 거둔 유진은 머그잔을 들며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로 눈길을 옮겨갔다.
“어딜 개발할 작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