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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37화 (138/226)

12화

블라드 유진과 엔세데스의 앞을 지나가던 사람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고 있는 전시영이었다.

"나 왜? 뭐?"

그녀는 우물거려 입 안에 든 걸 꿀떡 삼키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해 줘야 할 일이 있는데."

"오! 뭐야? 중요한 건가?"

"나름? 어떤 놈이 이상한 짓을 못 하도록 감시하는 일이야. 필요한 것도 알려 주고."

"후자는 별로 관심 없지만, 전자는 꽤 재밌겠네. 그래서 그게 뭐야?"

"이놈 좀 맡아 줘."

그가 화룡왕을 가리키며 말하자, 전시영은 마치 커다란 벌레를 본 것처럼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기 싫은 티가 팍팍 났지만, 유진의 부탁이라 일단 한 번쯤 고민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나한테 일을 맡기려면 단가가 약간 센데, 그래도 괜찮겠어?"

"그거야 이 녀석하고 상의할 일이지."

그는 엔세데스에게 결정권을 넘겨 버렸다.

수익금의 분배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그러자 화룡왕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문비로 수익금의 10% 어떤가?"

"애걔! 고작 그거만 받고 움직이는 랭커가 어디 있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손도 까딱 안 하는데, 그 정도면 굉장히 좋은 조건이지 않나?"

"그거 하는 동안에 직접 뛰면 훨씬 많이 벌잖아. 내 시간을 끌어다 쓸 때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호오? 일리 있는 말이로군. 그렇다면 20%. 콜?"

"음……. 나쁘지 않네. 딜."

전시영은 잠깐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엔세데스와 주먹을 마주쳤다.

이자가 돈을 벌려고 한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실상 2할의 자문비는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화룡왕은 천공의 성 같은 거대한 낙하물을 일격에 날려 버릴 만큼 괴력을 지닌 존재니까.

이 붉은 용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거기까지 수지타산이 다 되었기에,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좋아. 출발해 보자고."

전시영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자기만 따라오라는 듯이 엄지를 흔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저택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오……. 고요해."

블라드 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엔세데스의 자문으로 전시영을 지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소란 피우기 장인 둘을 내보내고 난 그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렸다.

푸어오버 방식으로 내린 커피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은 것과 다른 풍미를 제공했다.

'요즘에는 핸드 드립이 더 좋군.'

커피 향을 음미하던 유진은 문득 뭔가 생각이 난 듯, 홀로그램을 펼쳐 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1,996

등급 : EX(Lv. 1,501~3,0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종합 스킬 정보>

‣ EX급

흡혈, 혈성쇄혼술, 암흑화, 소수혈인, 천계도살검, 마신강림, 시공투절

‣ SS급

권능 폭발, 대군주의 역병

‣ S급

천군압쇄, 초열지옥 역풍

‣ A급

폭사, 레이스 트래킹

<스킬 정보>

명칭 : 천군압쇄(千軍壓碎)

등급 : S        위력 : S+

지속 시간 : 9분

재사용 대기 시간 : 10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분신 생성(30%)

최대 생성량 : 0/100

<스킬 정보>

명칭 : 초열지옥(焦熱地獄) 역풍(逆風)

등급 : S        위력 : S+

범위 : 직경 60m

사거리 : 시야 범위

재사용 대기 시간 : 4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변경)

효과 : 해당 좌표에 대폭발

천공의 성을 거치면서 그는 최전성기의 자신을 뛰어넘고야 말았다.

레벨은 물론이고 스킬까지 1천 년 전보다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안타깝게도 권능 폭발과 대군주의 역병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SS급에 머물렀다.

하지만 DK에게서 흡수한 천군압쇄가 S급으로 성장했다.

30%의 능력치를 지닌 분신을 무려 1백 명이나 생성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스킬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DK의 것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는데."

권능 폭발로 천군압쇄가 SS급으로 시전된다면, DK와 마찬가지로 수백의 분신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그의 레벨이 훨씬 더 높으니, 어쩌면 스킬의 원조보다 강력한 효과가 나올지도 몰랐다.

'이건 상당히 늦었군.'

천군압쇄와 더불어 초열지옥 역풍 또한 S급에 올랐다.

드라코 도무스 공략 직후 제주도에서 전시영의 스킬을 흡수한 거였지만, 이제야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뒤늦게 얻은 천군압쇄보다 사용 빈도가 한참 낮아서 조금 뒤처졌던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굉음과 함께 폭발이 발생하는 스킬이다 보니, 사용하기가 영 꺼려졌다.

블라드 유진의 전투 스타일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스킬이 많으면 좋은 일이지. 변수 창출에도 도움이 되고."

천공의 성을 겪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뱀파이어 로드가 되고 난 뒤부터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강자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멸사공 사르판의 경우 간신히 이기긴 했으나, 공격력 면에서는 유진의 열세였다.

폭발적으로 휘둘러 오는 멸진부의 향연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옥 같은 경험이었다.

더불어 화룡왕 엔세데스는 어떠했나.

한 단계 진일보한 현 상황이라면, 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녀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마 양패구상이나 무승부로 그치겠지. 물론 장기전으로 간다면 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토록 강했던 사르판은 공작 중에서 최약체에 불과했고, 엔세데스조차도 최강의 드래곤이 아니었다.

엘칸 차원과 마계에는 블라드 유진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했다.

원하는 바를 관철하고 외부의 개입을 막으려면,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이템과 스킬이겠군."

이제껏 그는 굳이 아이템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악염도나 카이넬의 신안 등의 좋은 아이템을 얻긴 했지만, 이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었다.

유진은 스스로 갖춘 힘으로만 싸우는 걸 즐겼다.

1천 년 전에는 아이템이 거의 존재치 않아서, 어떤 물건의 도움을 받는 게 영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궁과 헌터, 아이템이 넘쳐흐르는 세상.

카이넬의 신안처럼 타인이 임의로 피탈할 수 없는 옵션도 존재했으니, 아이템을 굳이 멀리할 필요는 없었다.

적재적소에 아이템을 잘 사용하는 것 또한 능력일 테니까.

'스킬은 미궁을 좀 뒤져 봐야겠군.'

그는 사르판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취약점을 발견했다.

멸사공은 전투 중반 이후, 완급을 조절하는 묘수를 냈다.

마신강림을 비롯한 궁극 스킬의 지속 시간이 지나면, 블라드 유진이 급격하게 약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한창 싸우는 중인 상대도 눈치챌 정도라면, 그를 유심히 지켜봐 온 자들 또한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전투 지속력을 키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뱀파이어 로드 전용 스킬은 한 방 싸움에 너무 치중되어 있어.'

헌터들에게 새로운 스킬을 얻는 길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스킬 해방석은 무지막지하게 비싸고, 오염 지대에서는 거의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반면에 유진은 성체 미궁을 혼자서 정화할 수 있는 존재.

쓸 만한 스킬을 얻을 수 있는 곳만 골라서 쏙쏙 클리어하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시기에 그런 작업을 해 두면, 분명 위기 때 빛을 발할 수 있을 터였다.

"슬슬 다시 움직일 때인가. 그나저나 왜 내 보상은 없고, 화룡왕 것만 있는 거지?"

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택을 떠난 조지훈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도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사소한 착오가 생겼으리라.

이내 블라드 유진은 조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 *

쉬이이익! 쿠구구궁! 쿠웅!

진득한 마기가 흐르는 어두컴컴한 공간.

기묘한 빛을 발하는 비석 다섯 개가 중앙과 사방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비이이잉! 치지직!

이윽고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가득 들어차 있던 비석에서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잡음이 한차례 지나가고 누군가의 웅혼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자리에 계십니까?"

"흠. 기척을 보아하니, 전부 온 모양이로군. 아니 그렇소이까?"

"옳소. 모두 오랜만이구려."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비석들은 안부를 묻는 등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꽤 시간이 흘러 할 말이 떨어지자, 중앙의 황색 비석이 꿈틀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슬슬 시작하시지요. 마계 원로회 197822번째 회의를 시작하겠소이다."

쿵! 쿵!

황색 비석이 쿵쿵거리며 이목을 끌자, 사담은 금방 사그라졌다.

마계 원로회는 사안을 특정하여 논의하고, 결과를 마왕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1천 년간 공작 작위를 지킨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자리가 바로 원로.

이들은 적체된 마계 수뇌부의 직책 순환을 위해서 의회로 들어온 존재들이었다.

마계에는 세 마왕과 세 공작 외에도 원로라는 초강자들이 또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강력한 자들이니, 멸사공 사르판을 놓고 공작치고는 약하다느니 하는 평가를 할 수 있었다.

"이번 안건은 멸사공 사르판의 전사와 사후 처리에 관한 내용이외다."

원로회는 블라드 유진이 발견한 175456번째 회의록처럼 전사한 귀족의 작위 계승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결정이 곧장 작위 계승과 결부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의회는 마계의 절대자인 마왕에게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할 뿐.

결정은 마왕이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조사와 회의를 통해 합치를 이룬 마계 원로회의 의견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역시나 좀 약하다 했더니, 금방 죽어 버리는구먼. 작전 중 전사라고 했소?"

"지구 공략을 시도하다가 그자에게 죽임을 당했지요. 어쩐지 작전을 성급하게 진행하더라니……. 쯧쯧!"

의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적색과 흑색의 비석에서 빛과 함께 규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르판이 작전 수행을 지나치게 서둘렀다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서쪽에 세워진 백색 비석이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미 전사한 자의 잘잘못을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얼른 프라레스 님을 보좌할 공작을 뽑는 게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럴 만한 재목이 없습니다. 초설공의 후임도 찾기가 힘들지 않았소이까? 그래서 부족한 멸사공을 앉힌 거였고요."

"흐음……."

비석들은 서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사실상 이들은 무려 오랫동안 공작 작위를 지켰던 강자.

당장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도 제 역할을 해낼 터였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멸사공의 공작 작위를 차지하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수만 년간 이어져 온 전통을 깨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 그런 기미를 보였다간 원로 사이에 쟁탈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회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자, 중앙의 황색 비석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논의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갑자기 왜요?"

"그야 조만간 서열 결정전이 열리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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