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36화 (137/226)

11화

―웬 놈이……. 음?

이제껏 가해졌던 인간들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에 엔세데스는 고개를 홱 돌렸다.

스산한 눈빛으로 허공을 훑는데 상당히 익숙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녹턴의 등에 탄 블라드 유진이었다.

유령 군마가 지나온 공간에는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 타오르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돈을 벌러 왔지. 자고로 인간들의 왕국을 털어먹는 것만큼 쏠쏠한 게 없단 말씀이야.

그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지자, 화룡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질책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돈 내가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제발 입 좀 다물어라."

―네가 준다고? 오! 그럼 돈을 두 배로 벌 수 있는 건가.

"닥치고 현신이나 풀어."

―뭐, 그러지.

이를 악문 블라드 유진의 말에 엔세데스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윽고 번쩍이는 빛에 휩싸였다.

"붉은 용이……. 사라졌다."

"휴! 드디어 끝난 건가."

화룡왕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자, 이곳저곳에서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불멸의 존재가 주는 압박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아무리 화력을 투사해도 쓰러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레드 드래곤과 맞서 싸우던 A급 헌터들의 얼굴 또한 새파랗게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엔세데스의 청와대 난동은 일단락되었다.

* * *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화룡왕이 청와대 건물을 박살 내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명 피해 또한 없었다.

청와대 본관으로 이동한 블라드 유진과 엔세데스는 대통령을 비롯한 헌터계 중진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분은 유진 님의 지인이로군요. 천공의 성에서 만난 이계의 존재시고요."

"그래."

"……자세한 설명과 중재에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설명이라는 말이 앞에 붙었지만, 사실 그가 말한 건 저 두 마디가 다였다.

장진석 대통령이 고마움을 표하자, 유진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는 이제 보상안 논의로 흘러갔다.

한국은 그와 화룡왕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나, 아무런 답례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실제로 이들은 블라드 유진에게 줄 보상안을 논의하던 중이었으니, 이야기는 술술 풀려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종류의 보상을 원하시는지요. 돈이야 얼마든지 얻으실 수 있을 테니, 좀처럼 볼 수 없는 아이템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로군."

"그럼 근시일 내로 저희가 리스트를 뽑아 드리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걸 고르시지요."

"좋다. 그렇게 하지."

그는 한국 정부로부터 뭔가를 더 받아 낼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다.

자신에게 딸려 온 레드 드래곤이 눈 뜨고는 못 볼 민망한 패악질을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그냥 주는 대로 대충 아무거나 받고 이 일을 마무리 지었으면 했다.

하지만 엔세데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엔세데스 님은 어느 정도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난 무조건 돈이다."

"국가 재정의 절반을 달라거나 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는 들어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럼 25% 줘."

자꾸만 국가 재정을 들먹이는 화룡왕의 대답에 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재물을 향한 드래곤의 욕심은 엘칸 차원에서 정평이 난 상태였다.

그런 자세한 상황까지는 알 수 없었던 유진은 손을 들어 잠시 대화를 끊었다.

"공략대원 보상안의 두 배쯤만 해. 이 녀석이 한 거라고는 추락하는 천공의 성을 쳐 낸 것뿐이니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 정도만 해도 이놈이 원하는 건 웬만큼 다 살 수 있을 거다."

"아, 알겠습니다."

엄청나게 완화된 조건에 장진석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엔세데스의 눈치를 보았다.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녀석은 살짝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던 화룡왕은 흔쾌히 보상안에 동의했다.

"이런 헛짓거리 말고, 합법적으로 돈 버는 방법을 알려 주지. 드래곤의 위엄을 생각하면 그게 낫지 않겠나?"

"오호? 원래 드래곤의 위엄이란 여기저기 좀 때려 부수면서 다니면 생기는……."

"돈 버는 방법 필요 없나 봐?"

"아니, 필요해. 대충 좀 전에 그 보상안으로 줘."

장진석과 이상식, 조지훈은 거의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세 사람은 실질적으로 엔세데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해주었다.

"한국에 주민 등록이 되어 있지 않으신 분이니, 유진 님의 경우와 비슷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순서대로 처리하면 되겠군요."

마침내 그와 화룡왕은 원만하게 보상안을 받아들고 청와대를 나설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난 뒤의 청와대 본관은 녹초가 된 대통령과 헌터 협회 중진들만이 남았다.

"휴!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블라드 유진 이후로 주시해야 할 대상이 늘었군요."

"그래도 이제 적은 아니니 다행입니다."

부스럭!

장진석과 이상식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서 조지훈이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이상식 협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문득 질문을 던졌다.

"자네 지금 뭐 하나?"

"얼른 가서 일 처리를 좀 하려 합니다."

"이 건은 이제 그리 급한 것도 아닌데, 왜 서두르는 거지?"

"엔세데스 님에게 돈 버는 방법을 알려 드려야지요."

"그건 이미 유진 님이 하기로 한 거 아닌가?"

"그만한 무력을 지닌 분에게 어떤 일이 가장 어울리겠습니까? 당연히 미궁 토벌이겠지요."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의 말에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렇다면……."

"세계 곳곳에 널린 게 미궁입니다. 웬만하면 우리나라에 있는 걸 공략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겠지요. 제가 협의를 잘 이끌어 보겠습니다."

"오!"

장진석 대통령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팍팍 밀어줄 테니, 한 번 추진해 보게."

"예, 알겠습니다!"

* * *

청담동 저택으로 돌아온 블라드 유진은 엔세데스를 그냥 방치해 버렸다.

화룡왕이 기대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이것저것 취미 생활을 즐길 뿐이었다.

"이봐."

"왜?"

"분명 돈 버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좀 기다려 봐. 아직 보상안도 나오지 않았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내가 너무 성급했나?"

"그래."

"아니, 원래 레드 드래곤은 성질이 급해. 당장 내놔. 돈 버는 방법."

엔세데스가 막무가내로 나오자,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 더러운 성질머리의 레드 드래곤을 잠재우려면, 원하는 걸 던져 줘야 할 것 같았다.

'진 연합체에 맡기기에는 좀 그렇고. 결국에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나?'

DK가 없는 지금 흑룡이 잘 이끌고 있다지만, 진 연합체에 화룡왕을 맡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녀석들은 너무 불법적인 일만 하기에, 자칫 잘못하면 암흑가의 괴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잠깐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문득 진 연합체의 깍두기가 그의 앞에 다가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대부님, 정웅철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손님이 왔는데, 헌터 협회 사람이랍니다."

"갑자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엔세데스를 청와대에서 데리고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벌써 사람이 찾아왔다니, 헌터 협회의 빠른 일 처리는 언제나 블라드 유진을 만족하게 했다.

물론 이번에는 예상치 못할 정도로 빨라서 살짝 놀랐지만.

"내 입맛에 딱 맞는군. 바로바로 보상안이 왔잖아. 점점 지구의 인간들이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데?"

성질 급한 레드 드래곤과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찰떡궁합이었다.

엔세데스는 만족한 표정으로 그를 대신하여 정웅철에게 명령을 내렸다.

"뭐 하고 있어? 얼른 데려와."

"……."

하지만 정웅철은 화룡왕의 말을 깡그리 무시한 채, 유진의 분부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이 집 사람들은 어떻게 죄다 이 모양이지? 내 실체를 알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다니, 이해할 수가 없군."

"그야 여기는 내 권역이니까."

이 저택에 사는 사람들이 드래곤 피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그의 파급력 덕분이었다.

무려 1,996레벨에 도달한 블라드 유진의 권능은 거의 엔세데스와 맞먹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그의 권역 내에서는 드래곤 피어도 일정 수준 이하로 상쇄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녀석이 작정하고 펼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데려와."

"예, 대부님."

블라드 유진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웅철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개방 버튼을 눌렀다.

덜컹! 위이잉!

멀리서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저택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 외로 금방 뵙게 되는군요."

협회 직원 몇을 데리고 온 사람은 미궁 전략부장이었다.

조지훈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엔세데스의 앞에 몇 종류의 서류를 공손히 내려놓았다.

"임시 신분증과 보상 증서입니다. 나중에 계좌 개설하신 뒤 이걸 은행에 가져가면, 곧바로 입금될 겁니다."

"그래서 얼마지?"

"천공의 성 공략대원 보상의 세 배. 30억 원입니다."

"호오?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있나?"

"아무래도 두 배는 너무 적은 것 같아, 내부 회의를 거쳐 증액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초에 유진이 말했던 보상은 A급 공략대원의 두 배였다.

하지만 조지훈이 가져온 보상안은 세 배로, 이전보다 10억 정도 많아졌다.

그러자 화룡왕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조건도 없이 이전보다 많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엔세데스가 보상 증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묻자, 조지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건 저와 협회 직원들이 차근차근 알려 드릴 예정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아무 상관 없긴 한데."

화룡왕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미궁 전략부장은 슬그머니 블라드 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그가 데려온 존재니만큼, 따로 동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 처리 속도와 작금의 행태를 보아하니, 어떤 의도를 갖고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됐어. 그건 알아서 하지."

"아……. 그래도 전문가 집단의 자문이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여기도 그런 인재는 충분해서 말이야."

뚝! 뚝!

볼을 타고 떨어지는 식은땀을 느낀 조지훈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파고들었다가는 블라드 유진의 진노만 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궁 전략부장과 헌터 협회 직원들은 보상안만 전달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자 엔세데스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긴 한데 말이야. 설마 내가 저런 놈들에게 휘둘리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는 거지? 그 반대다."

"어? 그런 거였나?"

"똑 부러지게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군. 네가 이상한 짓을 못 하게 말이야."

"크흠! 엘칸에서는 그게 드래곤의 전통이었다고."

"다른 차원까지 와서 전통을 찾는 건 이상하지 않나?"

"쩝."

그의 일침에 화룡왕은 입맛을 다시며 보상 증서를 집어 들었다.

30억이라는 게 얼마나 큰 금액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지구에 와서 벌어들인 첫 수익이었다.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엔세데스는 보상 증서를 품속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 유진은 화룡왕을 맡길 만한 자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마침 그는 2층에서 내려와 테라스 쪽으로 이동하던 한 사람을 불러세웠다.

"잠깐 좀 와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