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35화 (136/226)

10화

청와대에 모습을 드러낸 건 거대한 덩치의 레드 드래곤이었다.

몸길이만 200m는 가뿐히 넘을 듯한 거체에 촘촘하게 두른 붉은 비늘.

쭉 찢어진 동공만 해도 웬만한 사람 서넛 정도는 들어갈 만큼 컸다.

"청와대에 적 출현! 지원 바란다. 지원!"

"일단 물러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경호원들이 무전을 보내는 동안, 경호처장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통령에게 물었다.

하지만 장진석은 잔뜩 굳은 채로 눈앞의 괴물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대통령이 몬스터와 같은 괴이한 존재와 마주칠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몬스터를 보고 이렇게 얼어붙는 건 일반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호처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쓰든 대통령과 함께 이 상황을 타개해야만 했다.

"가시……."

장진석을 일깨우기 위해서 소리를 치려던 경호처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마치 공기가 무거워진 듯한 느낌과 함께 묵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울렸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가공할 존재감이라,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네놈이 이 나라의 왕, 대통령인가.

대체 어디서 들리는 음성인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눈앞의 거대한 붉은 용과 이 목소리가 무관하지 않다는 거였다.

―대답하라.

쿵!

레드 드래곤이 앞발을 가볍게 구름과 동시에 뇌리를 울리는 음성이 반복되었다.

그러자 대통령과 헌터 협회장, 미궁 전략부장은 눈앞의 괴물이 말을 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장진석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왕은 아니지만, 대통령이긴 하오."

―호오? 너절한 인간 치고는 강단이 있는 놈이로구나. 그러니 일국을 이끌 만하지.

"당신은……. 천공의 성을 날려 버렸던 붉은 용이로군."

―잘 아는구나.

"도움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소. 한데,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오? 마치 협박을 하는 것 같소만."

―비슷하다. 돈이라는 게 필요해졌는데, 그걸 좀 내놓아야겠다.

"……."

레드 드래곤과 대화하던 장진석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영토가 커지면서 나름 좋아졌다고는 하나,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국은 달랑 서울만 멀쩡한 상태였다.

돈 나갈 곳은 많은데 벌어들이는 건 한정적이니, 재정이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장 천공의 성 공략대에 줄 보상금도 상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난데없이 튀어나온 돈 얘기에 대통령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썩어 문드러지는 장진석의 속과는 별개로 레드 드래곤이 원한다면, 충분한 보상을 하긴 해야 했다.

저 존재 덕분에 서울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았으니까.

물론 장진석을 비롯한 헌터 협회 관계자들에게 붉은 용은 몬스터와 다름없었다.

보상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그냥 토벌해 버려도 아무런 뒷말이 나오지 않을 터였다.

문제는 현 상황에서 저런 괴물을 처리할 수 있느냐였다.

대통령은 경호처장에게 슬쩍 눈짓하며 레드 드래곤과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얼마나 원하시오."

―한 해 예산의 절반 정도면 되겠군.

"지, 지금 대체 뭐라고…….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나?"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장진석은 순간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상대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뭐가 문제냐는 듯이 사념을 보냈다.

―항상 그 정도만 요구해 왔는데? 난 그래도 상당히 양심적인 드래곤이라고. 절반만 가져가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국가의 재정이란 다 용처가 정해져 있기 마련이고, 추가 경정 예산을 편성하려면 국회 동의가 필요하오."

―흠! 상당히 복잡한 절차로군. 웬만하면 알아서 다 해 주던데. 여긴 왕궁 비고 같은 것도 없나? 거기서 대충 반쯤 가져가면 되겠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쯤 하시오. 보상은 예산의 한도 내에서 해 줄 테니, 좀 기다려 보시구려. 어디로 보내 주면 되겠소?"

―대충 저 강 건너 숲속에 있는 집이더군.

"그렇게 말하면 알 수가 없소이다. 주소를 알려 주셔야지요."

―그딴 걸 어떻게 알아? 말을 빙빙 돌리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군. 그냥 당장 창고를 열어서 재물을…….

슈화아아악! 콰아아앙!

마치 시간을 끄는 듯한 대통령의 말에 붉은 용은 약간 부아가 치미는지 으르렁거렸다.

그런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길쭉한 물체가 날아오더니, 그 레드 드래곤의 머리를 가격하곤 폭발하는 게 아닌가.

서쪽에서 발사된 함대지 탄도 미사일이 용의 머리에 정확히 쑤셔 박힌 것이다.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지만, 놀랍게도 레드 드래곤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탄두 중량 1톤짜리 현무 4―2에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아무런 피해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지?

붉은 용이 살기를 발하며 중얼거리는 바로 그 순간, 경호처장이 앞으로 나서면서 크게 소리쳤다.

"지원이 도착했습니다. 얼른 물러나시죠. 대통령님."

"으음! 뒷일을 부탁함세."

처장과 장진석이 뒤로 빠지자, 경호원들은 각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의 화력 투사가 시작되었다.

쉬이이익! 콰아아앙!

VIP가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인지, 날아드는 포탄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뿐이랴, K2로 무장한 101경비단의 경찰들이 자리를 잡고 K100 탄을 마구 갈겼다.

투타타타타!

황동 도금된 납탄이 무수히 날아왔으나, 그럼에도 레드 드래곤은 깡그리 무시하고 그저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나?

티디디디딩! 콰아앙!

기백 명이 소총 사격을 해 대고 수 킬로미터 밖에서 미사일이 날아들었으나, 붉은 용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저 도망치는 저 대통령이라는 작자를 붙잡아서 확실하게 뜯어낼 생각밖에는 없었다.

―비켜! 돈 내놔!

* * *

한편, 블라드 유진은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항상 시끄럽게 해대던 전시영과 엔세데스가 보이지 않으니, 저택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부루마불을 하는 레니와 루시아, 다이애나가 이따금 환호성을 지르긴 했지만.

구우우우웅!

"음?"

그런데 문득 꽤 강렬하게 퍼져 나온 음파가 저택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발원지에서는 굉음이 터졌으리라.

책에 집중하던 유진은 무심코 시선을 북쪽으로 돌렸다.

그곳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뭐지?'

천공의 성도 해결되었고, 페드로를 제외한 사르판 공작 휘하의 마족들은 궤멸당한 상태였다.

서울에 무슨 일이 생길 만한 건수 자체가 없음은 진 연합체를 통해서 매일 보고받는 중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현관 쪽에서 불쑥 나타난 누군가가 90도로 상체를 푹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대부님."

"아니."

"죄송합니다. 큰 소리가 나기에 나와 봤습니다."

"저것 좀 틀어 봐. 뉴스로."

"예!"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덩치의 사내는 곧장 리모컨으로 달려가 버튼을 눌렀다.

띡!

TV가 켜지자, 깍두기는 뉴스 채널을 찾았다.

[……긴급 속보입니다. 현재 청와대 인근에서 붉은 용이 재차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천공의 성으로부터 서울을 구했던 용이 어째서인지 청와대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현재 101경비단을 비롯한 대통령 경호처 지원부대가 화력 투사를 감행하는 중입니다. 제보에 따르면, 서해에서 현무 4―2 탄도 미사일이 발사되기도 했습니다. 현장에는 변형신 기자가 나가 있습니다.]

이윽고 헬리콥터에서 찍은 듯한 자료 화면이 나왔다.

무수히 많은 현대 무기에 피격당하는 레드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거대한 붉은 용은 수만 년을 살아온 괴물 중의 괴물.

저따위 화약 무기로는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괜히 세계적인 추세가 화약 무기에서 헌터 전력 증진 쪽으로 기울고 있겠는가.

오염 지대에는 화약 무기가 거의 통하지 않는 저런 괴물들이 즐비하기에 헌터계가 득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탄도 미사일 정도라면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라도 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고대룡의 단단한 몸뚱이는 무려 1톤 중량의 벙커 버스터조차도 가볍게 무력화해 버렸다.

이윽고 화력 투사는 점점 뜸해지더니, 화면은 이내 무기를 뽑아 든 헌터들을 비추고 있었다.

"대통령 경호처?"

방금 블라드 유진이 읽은 것처럼 대통령 경호처의 A급 헌터들이 레드 드래곤에 대항한다는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협회가 헌터들을 소집하고 있다는 변형신 기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저 이계의 고대룡 녀석이 제대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더 사건이 커지기 전에 저 머저리 같은 레드 드래곤의 기행을 멈춰야만 할 것 같았다.

"어? 저게 무슨 일이야?"

그런데 문득 커다란 수건을 머리에 둘둘 만 전시영이 거실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개인 훈련을 마친 뒤, 간단하게 샤워하고 내려온 참이었다.

뭐라도 좀 챙겨 먹으려고 주방에 내려온 건데, 괴상한 뉴스를 접하게 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또라이 파충류가 왜 저기 있어?"

"모르지."

"아니, 청와대는 뭐하러 쳐들어간 거……. 어어? 이거 설마?"

전시영의 놀란 듯한 반응에 블라드 유진은 TV에서 시선을 뗐다.

그녀는 머리에서 수건이 흘러내리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었다.

"뭐 아는 거라도 좀 있나?"

"아까 저놈이 왕이 누구냐 묻더라고."

"왕?"

"이 나라를 이끄는 게 누구냐길래. 대통령이라고 알려 줬지. 그래서 저기에 간 모양이야."

"이유는?"

"그게……. 돈을 벌려면 왕을 만나야 한다던데?"

전시영의 말을 듣자, 유진은 엔세데스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저 미친 드래곤은 일국의 왕을 만나 금은보화를 뜯어내려 한 것이다.

엘칸 차원에서 평소 하던 대로.

"미치겠군."

그는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며 숲속을 거닐고 있던 녹턴을 호출했다.

* * *

투타타타타타!

―호오? 저렇게 무거운 쇳덩이가 날아다닌다고?

한편, 화룡왕은 자신의 주변을 비행하는 AH―64E 가디언 아파치 헬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M230 체인건이 연신 불을 뿜고, 16발의 AGM―114 헬파이어 대전차 미사일도 날아들었다.

쿠콰콰콰콰쾅!

하지만 고폭탄과 대전차 미사일이 적중했음에도 엔세데스는 조금의 피해조차 없는 듯했다.

하긴 마그마에 파묻혀서 잠을 청할 정도로 내열성이 뛰어난 존재인데, 화약 무기가 통할 리 있겠는가.

게다가 무지막지하게 단단한 드래곤 스케일은 물리력마저도 완벽하게 상쇄해 버렸다.

아파치 헬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룡왕은 귀찮다는 듯이 날개를 크게 한 번 휘저었다.

파아아아앙!

그러자 강력한 풍압이 발생하여 헬기가 저 멀리 튕겨 나가는 게 아닌가.

중심을 잃은 헬리콥터는 비틀비틀 날아가더니, 북악산 기슭에 그대로 처박혀 버렸다.

콰아아아앙!

그저 바람을 일으키는 것만으로 헬기를 무력화한 엔세데스는 느긋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화룡왕은 대통령의 위치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아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추적 마법을 걸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쿠콰콰콰!

엔세데스는 소총을 쏴 대던 대통령 경호처 파견 부대의 엄폐물을 깡그리 날려 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을 향해서 온갖 스킬을 날려 대는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찌릿!

"크윽!"

"흐윽!"

단순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힘을 잃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작 A급 헌터들의 수준으로는 화룡왕이 발하는 드래곤 피어에 대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귀찮구나.

피어 한 방에 나가떨어질 놈들이 분수도 모르고 덤비는 게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엔세데스는 A급 헌터들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장진석이 숨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통령은 건물 뒤편에 마련된 방탄차를 타고, 청와대를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래곤의 앞에서는 뛰어 봐야 벼룩이었다.

―이것들이 아직 내 위엄을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로군. 그럼 제대로 각인시켜 줘야지.

후우웅! 콰아앙!

몸을 띄운 화룡왕은 청와대를 가볍게 뛰어넘더니, 장진석이 탄 차의 정면을 가로막았다.

굉음과 함께 지면이 불쑥 튀어 오르자, 방탄차는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이윽고 그곳에서는 대통령과 경호처장이 비칠비칠 기어 나왔다.

―날 먼저 건드린 건 네놈들이다. 그 대가를 치르는 건……. 쿠엑!

쿠화아아앙!

장진석을 향해서 호통을 치던 엔세데스는 돌연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뭔가 무지막지한 힘이 화룡왕의 등판을 후려갈겼기 때문이었다.

"가지가지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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