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34화 (135/226)

9화

"흠. 원하는 걸 사려면 돈이란 게 있어야 한다는 거지? 금화나 보석 같은 게 아니라, 여기서 통용되는 종잇조각 화폐."

엔세데스는 시원한 숲속의 평상에 누워 새파란 10만 원권 지폐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인 건 자기앞수표가 아니라, 폭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장난감 돈이었다.

화룡왕은 레니가 갖고 놀던 씨앗 은행 장난감 돈을 가지고 와서 살펴보는 중이었다.

물론 녀석도 이런 조잡한 종잇조각과 진짜 돈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은 예시가 필요할 뿐이었다.

딱!

그러다 불현듯 엔세데스는 손가락을 튕기며 마나의 파장을 뿜어냈다.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역시 안 되는군. 아예 차원이 달라서 그런 건가?"

원래라면 마나를 배열함과 동시에 의지를 발하면, 자신의 거대한 아공간이 나타나야 정상이었다.

딱! 딱!

몇 번이고 반복해 보았으나, 의미 없는 손가락 튕기는 소리만이 허공에 맴돌 뿐이었다.

"하! 이런다고 내가 돈을 못 벌 줄 알아? 재물을 얻는 거야 드래곤에게 아주 쉬운 일이지. 어디 보자…….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려나?"

화룡왕은 벌떡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고서 턱을 만지작거렸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무궁무진했다.

드래곤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단은 레어 주변의 종족들을 협박하여 공물을 받는 거였다.

진정한 장인이 만든 고급품이야 드워프 마을에 있지만, 금은보화는 인간 왕국을 털어먹을 때 제일 풍족하게 나왔다.

아무래도 사람은 매우 흔한 데다 오크와는 달리, 대규모 문명을 발달시키고 살기 때문이었다.

"역시 하던 대로 하는 게 최고지. 그럼 시작해 볼까?"

후웅! 척!

엔세데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띄우더니, 옆으로 스르릉 이동하여 지면에 안착했다.

평상은 바람에 날아든 나뭇잎과 모래로 더러웠지만, 화룡왕의 옷에는 조금도 묻지 않았다.

발을 디딘 지면에도 흙이 저절로 밀려나 도망치는 듯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거대한 힘이 물질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타다다닷! 타다다닷!

한데, 그런 엔세데스의 앞으로 누군가가 달려가는 게 아닌가.

문득 시선을 돌려 보니, 검은 후드티를 입은 전시영이 쉴 새 없이 스프린트를 하고 있었다.

"호오? 마침 물어볼 녀석이 생겼군."

그녀는 1만 8천 평이나 되는 면적의 공원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주파하는 중이었다.

헌터계가 아무리 레벨이 깡패라지만, 개인적인 기량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신체 능력의 증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레벨이 오르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엔세데스는 한창 준비 운동을 하는 중인 전시영의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스팟!

분명 저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건만,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번쩍이며 나타났다.

그러자 그녀는 방향을 바꾸며 황급히 속도를 늦췄다.

지면을 강하게 찍어 차며 급제동을 시도한 것이다.

콱! 촤하아아악!

워낙 빠른 속도였기 때문에, 바닥이 깊게 파이며 흙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와! 이게 진짜 돌았나. 너 그렇게 무단 횡단하다가 골로 간다?"

"무단 횡단은 찻길에서 하는 거 아닌가? 여긴 그냥 산책로인데."

"오오? 뭐야,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TV에 나오더군. '몇대몇'에서 봤지."

"희한한 쪽으로는 습득이 빠른 편이네. 근데 왜 갑자기 튀어나와서 사람 놀라게 해?"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질문 같은 거야 운동 다 끝나고 조용히 와서 해도 되잖아?"

전시영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쏘아붙였지만, 엔세데스는 되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답했다.

"위대한 고대룡인 이 몸께서 대체 왜 기다려야 하지?"

그러자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 괴상한 작자와 부딪칠 때마다 지독한 두통이 생기는 것만 같았다.

"헐……. 그래. 나르시시즘에 빠진 괴이한 파충류 씨, 물어볼 거나 빨리 물어봐. 너랑 계속 말을 섞다간 내 정신 건강에 해롭겠어."

"여기 왕이 누구냐?"

"대한민국에 왕이 어디 있어?"

"여긴 그런 것도 없나? 인간들의 나라를 이끄는 자 말이야."

"대통령이지 바보야. 없어진 지 백 년도 넘었는데, 갑자기 왕을 왜 찾아?"

"백 년이라……. 고작 그거밖에 안 됐으면, 찾을 만도 하지."

"어휴! 말을 말자."

화룡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수만 년을 살아온 고대 드래곤에게 백 년의 세월이야, 인간으로 치면 몇 주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상식은 엘칸 차원에서나 통용되는 거였다.

전시영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엔세데스의 곁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문득 화룡왕이 왼팔을 펼치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척!

"왜? 뭐?"

"대통령이라는 것만 알려 주면 어떡해? 그자가 어디 있는지도 말해 줘야지. 왕궁이 어디냐?"

"왕궁이 아니라, 청와대다. 모르면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 보든지."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대통령을 만나는 게 우선이야."

"갑자기 대통령을 뭐하러 만나?"

전시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엔세데스를 바라보았다.

이계에서 넘어온 정신 나간 용이 대통령을 만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차원의 균형 수호를 위해서 조용히 있겠다더니, 아무래도 이 녀석의 기준은 사람들의 생각과 영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의 질문에 화룡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돈을 벌려면 왕을 만나야 하거든. 그럼 수고."

스팟!

엔세데스는 전시영을 혼자 남겨 두고 산책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야말로 미약하게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난데없이 튀어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처럼 말이다.

"돈을 버는데 대통령을 왜 만나? 설마 이 자식 이거 큰 사고 치는 건 아니겠지?"

유진에게 듣기로, 화룡왕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넘어온 게 아니었다.

그저 지구의 문명을 구경함으로써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들었으나, 전시영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에이. 몰라."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 개인 훈련을 이어갔다.

* * *

"파견 힐러 인원을 줄이겠다니, 이거 상당히 골치 아프게 되었구려."

장진석 대통령은 헌터 협회의 중진들과 함께 긴급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난데없이 교황청으로부터 힐러 지원을 줄이겠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공의 성에 의한 피해를 복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힐러가 적으면 그만큼 성체 미궁 공략을 시도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상위급 헌터 자원을 경계 지역에서처럼 마구잡이로 소모했다간 나라가 폭삭 망할 테니 말이다.

"한국의 영토 회복 비율이 벌써 65%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조처를 한 거 같습니다. 파견 성기사대의 피해도 있었고요."

"이번에 전격적으로 방한한 건, 힐러 감축 결정을 위로하기 위한 목적도 포함되어 있는 듯합니다."

대통령의 침통한 한 마디에 헌터 협회장 이상식과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이 의견을 덧붙였다.

국토의 절반 이상을 회복하긴 했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만약 이 상태로 전선이 고착화하고 성체 미궁을 정화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재앙을 불러올 수 있었다.

스페인의 미궁 군체나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이주 현상처럼 이상한 일이 일어나, 점점 오염 지대를 넓혀 갈 것이다.

"승기를 잡았을 때 쫙 밀어 버리고 북진을 개시해야 하는데요."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겁니다."

연이은 이상식과 조지훈의 말에 장진석 대통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에 완벽히 잠식된 북한은 그야말로 주인 없는 땅이었다.

오염 지대를 밀어내고 깃발을 꽂는 순간, 거기는 해당 국가의 영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중국 북동부와 러시아 남동부의 캄차카반도까지 죄다 마기로 뒤덮여 있는 상황에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물론 욕은 좀 먹겠지만, 그렇다고 유형력은 행사하지 못할 터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장진석은 청담동 저택에서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거 방문해서 읍소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어디를 말씀……. 아, 거기 말씀이시군요."

장진석 대통령의 말에 의문을 표하던 이상식 협회장은 이내 크게 주억거렸다.

성체 미궁을 혼자서 박살 낼 수 있는 세계 최강 헌터가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주변에는 S급 헌터가 무려 세 명이나 달라붙어 있었다.

그 정도 전력이라면, 힐러 지원이 다소 줄어들었더라도 파죽지세로 영토를 넓힐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런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면, 그분이 움직일까요?"

"음……. 이제는 필요하신 게 거의 없지요. 당장 천공의 성 공략에 큰 도움을 주신 대가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요. 어?"

조지훈이 던진 말에 회의적으로 대답하던 이상식은 문득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블라드 유진이 없었다면, 천공의 성은 해낼 수 없는 수준의 난이도였다.

사실상 그가 네 개의 시련을 혼자서 해결하고, 몰살당할 뻔한 공략대를 구해 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헌터들의 소속 국가들은 유진에게 감사의 표시조차 하지 않았다.

이상식은 좌중의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상기해 주었다.

"이거 피해 복구에만 너무 열을 올리다 보니, 중요한 걸 빼먹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아차려서 다행입니다. 더 늦었다면,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었을 거예요."

"파견 힐러 감축은 해결하기 힘든 과제니 일단 뒤로 밀어 둡시다. 우선 지금은 보상부터 책정할 땝니다. 뭐가 좋겠습니까?"

장진석 대통령의 질문에 이상식과 조지훈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블라드 유진이 만족할 수준의 보상을 내놓아야 다음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가 성체 미궁 몇 개를 정화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보상은 최대한 신중하게 택해야 했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말이다.

그런데 한창 중지를 모은 상태로 보상안을 조율하고 있던 찰나, 어디선가 둔탁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드!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죠?"

"지진이라도 난 게 아닌지……. 일단은 대피 방송 송출하고 바깥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지진이 발생한 것을 우려한 조지훈이 문을 열며 외치자, 대통령과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쿠구구구구구!

확실히 그저 간단한 상황은 아닌 듯, 진동은 갈수록 그 위력을 더해 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탈출하라는 방송이 다 송출되기도 전에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쿵! 투두두둑!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과 함께 이동한 장진석은 건물의 구조물이 강력한 진동에 떨어져 나가는 걸 목격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추락하는 돌덩이에 맞아 경을 칠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대통령 일행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드리우는 게 아닌가.

"어? 갑자기 웬 그림자가……."

건물과 멀찍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늘이 생길 리는 없는 일이었다.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홱 돌린 그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존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시뻘건 거체를 자랑하는 그것은 장진석 대통령을 보고 괴성을 내질렀다.

"크롸아아아아!"

쿠구구구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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