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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33화 (134/226)

8화

"크으으으! 이 개 같은 자식! 내게 이런 모멸감을 주다니……!"

펑! 펑! 펑!

블라드 유진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안드레아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헤드레스트를 두들겼다.

실컷 주먹질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살기등등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숙소로 되돌아가는 중인 방탄 차량 내부에 교황의 분풀이 대상 따윈 없었다.

"고정하시지요. 숙소에 가면 보는 눈이 많을 겁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주케토를 내밀자, 안드레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백색 빵모자를 움켜쥐었다.

"후우……."

"이제 좀 진정되십니까?"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종자만 믿고 놔둬서는 안 되겠어.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일정을 앞당길 수 있겠나? 얼른 바티칸으로 돌아가고 싶군."

교황의 말에 다니엘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손에 든 종이를 넘겼다.

오랜만에 방문한 교황이다 보니, 일정을 빽빽하게 세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닷새 동안 들러야 할 곳이 수두룩한데, 그걸 모두 취소하는 건 불가능했다.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축소해 보겠습니다."

"부탁함세."

"예."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나,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 전화를 들었다.

교황청 국무원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것이다.

다니엘이 바삐 움직이는 동안, 교황을 태운 차량은 주한 교황청 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방탄차에서 내린 안드레아는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품속에서 조그만 책자를 꺼냈다.

유진이 갖고 있던 것과 비슷한 형태의 계시록이었다.

교황은 계시록을 넘겨 보며 잔뜩 굳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언제 세트 아이템을 찾을 수 있을지……. 부작용이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방법을 써야겠군."

원래 닷새였던 안드레아의 방한 일정은 사흘로 줄어들었다.

교황은 상당히 정정한 노인이었지만, 노환을 핑계로 일정을 대폭 감축한 것이다.

그래도 여러 곳을 들르다 보니, 빡빡한 것은 변함없었다.

안드레아는 일부러 힘없는 표정과 몸짓을 연출하며 일정을 소화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노인에게 너무 과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그런 여론이 펼쳐지자, 자연스럽게 예정보다 한참 일찍 전세기에 오를 수 있었다.

전세기는 교황을 태우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또각! 또각!

그런 승무원들 사이에 말끔한 항공 제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어깨와 손목에 두꺼운 금색 선이 새겨진 더블 브레스티드 자켓은 얼핏 조종사 복장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배지와 마크는 없어서 대한항공의 조종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준비 끝나가나요?"

"아, 이제 승객만 탑승하시면 됩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그렇군요. 수고하십시오."

"네."

그럼에도 그자는 한창 준비 중인 승무원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이들의 일원인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일단의 무리가 전세기로 다가오자, 승무원들은 자리로 가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세기의 승객은 흰색 수단에 붉은 구두를 신은 안드레아 교황과 그 뒤를 따르는 주교들이었다.

승객들이 전부 착석한 이후, 전세기는 이륙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와 동시에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스카이팀 회원사인 저희 대한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지금까지 기장 아마르 코너의 안내 방송이었습니다.

뭔가 평소와 상당히 다른 기내 방송이었으나,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한국 비행기인데 우리말 발음이 아주 좋구먼."

"공부를 많이 한 모양입니다. 허허!"

이윽고 관제탑의 이륙 승인이 떨어지자, 전세기는 천천히 활주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교황과 주교들의 웃음을 뒤로한 채, 항공기는 이륙 절차에 들어갔다.

한편, 전세기 조종실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자리한 상태였다.

원래 이륙한 뒤부터 이곳에는 기장과 부기장만 머무르게 되어 있었다.

테러 방지를 위해서 폐쇄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간이 의자에 발을 올린 채, 미소 짓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말끔하게 빗어 넘긴 금발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

방금 이탈리아어로 기내 방송을 송출한 조종실의 지배자 DK였다.

이윽고 표정을 굳힌 녀석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읊조렸다.

"살려 두라니 좀 아쉽군. 지금이 가장 쉬울 땐데……."

* * *

안드레아 교황이 떠난 이후, 블라드 유진의 일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화룡왕 엔세데스와 다이애나 로즈가 식객으로 들어와 앉은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그는 선베드에 누워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최근 유진에게는 커피 외에 소소한 취미가 몇 가지 생겼다.

그중 하나는 바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독서를 하는 거였다.

지금은 그가 봉인된 이후로 무려 1천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간 쌓인 어마어마한 양의 도서 중에는 블라드 유진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것들이 충분했다.

물론 그의 독서 삼매경은 언제나 무시무시한 것들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우당탕! 찍찍찍찍!

"하하! 그따위 사격 실력으로 이 몸에게 덤비다니! 가소롭구나!"

"와! 어떻게 그런 악당 같은 대사가 딱 어울릴 수가 있죠?"

"뭐라고? 이게!"

찍찍찍찍찍!

선베드와 파라솔이 놓인 곳 앞의 풀장에서는 물총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난데없이 벌어진 난장판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유진은 그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커피만 홀짝일 뿐이었다.

찍찍찍찍찍!

―꺄하하핳! 배꼽 때 빼기!

"어머! 저 배꼽에 때 없어요!"

―있을지도 몰라. 언니가 봐 줄게.

"어, 언니라니……."

저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레니도 함께 놀고 있다 보니, 제지하기가 조금 그랬다.

물총으로 다이애나 로즈의 배꼽만 노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그는 피식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러나 금세 저 시끄러운 소리에 적응하고는 다시 책 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유진의 뒤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 어깨를 두드렸다.

"여, 집주인."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불타는 듯한 머리칼의 엔세데스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누가 찾아왔는데 말이야. 초인종을 엄청나게 눌러 대더라고. 자꾸만 내 예리한 감각을 건드려서 죽여 버릴까 하다가 알려 주러 왔지."

"아……. 이제 그 녀석이 없지?"

탁!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항상 곁에 붙어 있던 교황청 외교관을 떠올렸다.

교황과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서, 아크웰 페리티노도 블라드 유진의 곁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안드레아의 명령을 전달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유사시 성물을 발동시켜 그를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통역과 아이템 감정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녀석이라 쓸모없을 줄 알았는데, 이럴 때는 또 조금 아쉬웠다.

물론 그를 보좌할 충성스러운 부하쯤이야 진 연합체에서 얼마든지 뽑아 올 수 있었다.

"DK는 바티칸으로 떠났으니, 오랜만에 흑룡을 불러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유진은 현관 쪽으로 걸어가 큼지막한 LCD 화면을 두드렸다.

그러자 정문 쪽의 CCTV가 켜지며 굳게 닫힌 문 앞의 상황이 보였다.

"오오! 이것도 신기하구먼. 저 멀리 있는 곳을 이리도 깔끔하게 보여 주다니 말이야. 게다가 이런 조작 반응성이라니. 이런 걸 마법으로 하려다간 머리통이 터져 나가겠어."

화면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옆에서 화룡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뭘 하는지 유심하게 살펴보더니, 또 마법을 운운하며 현대 기술과의 비교를 시작했다.

"……."

엔세데스의 말을 싹 무시한 블라드 유진은 LCD 화면을 눌러서 정문을 열었다.

덜컹! 위이잉!

저 멀리서 정문이 개방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다시 원래 앉아 있던 선베드로 되돌아갔다.

저벅! 저벅!

이윽고 정문 쪽에서 일단의 무리가 걸어오더니, 선베드에 누운 유진의 앞에 당도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두에 서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중년 남자는 폰시아노였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늦었군."

"적당한 수준의 보상을 찾느라, 시일이 좀 걸렸습니다. 그래도 만족하실 만한 수준일 겁니다."

"기대하지. 내놔 봐."

방문 목적은 성기사단에 힘을 실어 준 대가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가볍게 턱짓하자, 폰시아노는 고급스러운 상자를 꺼내더니 협탁에 올려놓았다.

이내 그자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버튼을 눌러서 뚜껑을 열었다.

달칵!

그러자 상자 속 붉은 벨벳 위에 놓인 무언가에서 찬란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블라드 유진의 눈빛이 살짝 변하며 낮게 중얼거리자, 폰시아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물건을 소개했다.

"성기사단이 보유한 성물 중 하나인 엘―칼릭스의 눈물입니다."

"엘……. 칼릭스?"

의외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자, 그는 저도 모르게 상대가 한 말을 되뇌었다.

엘―칼릭스의 성배 이후로 같은 이름을 들을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번쩍이는 빛무리가 가시고 나니, 벨벳 원단에 얹힌 물건이 제대로 보였다.

자그마한 마름모 형태의 은판에 금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겨 넣은 목걸이였다.

상당히 수수한 디자인에 은은한 빛을 발하는 것이 묘하게 엘―칼릭스의 성배와 닮아 있었다.

'카이넬의 성물처럼 세트 아이템은 아닐 텐데.'

이름의 첫머리가 같다고 해서 무조건 세트 아이템은 아니었다.

이미 유진은 엘―칼릭스의 성배를 입수함으로써, 토리노의 수의와 한 세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건 그냥 성물이라서 이름만 같은 것일 확률이 높았다.

"이런 물건이 많나 보지?"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꽤 있는 편입니다. 한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

"굳이 성기사단이 보유했다고 하기에 물어본 거다."

"아,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역시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하하!"

"아부할 필요는 없다. 어울리지도 않으니 집어치워."

"아, 예."

폰시아노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괜히 상자를 그의 앞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한번 확인해 보라는 의미였기에, 블라드 유진은 손끝에 펜던트를 걸치고 홀로그램에 비춰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엘―칼릭스의 눈물

등급 : SS

내구도 : S+

효과 : 신성력 증폭 15%, 번개 피해 10%, 냉기 피해 10%, 저주 저항 10% 증가

광진의 성배와 태생이 같은 성물. 신성력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대폭 올려 주는 효과가 있음.

'역시 카이넬의 것보다는 신성력이 난폭하지 않군.'

카이넬의 성검과 투구를 만졌을 때는 꽤 큰 피해가 있었지만, 이 펜던트는 그렇지 않았다.

이미 성배를 만졌을 때 별 반응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는 무리 없이 아이템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칼릭스의 눈물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이걸 착용했다간 계속 신성력에 노출될 테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터였다.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나름 괜찮은 보상이로군."

"그, 그렇습니까? 제 딴에는 신경을 쓴 거였습니다만."

"적어도 EX급은 가져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

"됐어. 이제 가 봐."

"예."

생각보다 유진의 요구가 더 높다는 걸 확인하자, 폰시아노는 밖으로 나가면서 작게 구시렁거렸다.

"어후! EX급이 땅 파면 그냥 나오는 건 줄 아나."

용무를 마친 성기사대장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의 저택을 떠났다.

차르륵!

블라드 유진은 손에 들고 있던 펜던트를 상자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런데 문득 저택에 잠깐 들어갔다가 풀장으로 돌아오던 루시아가 그의 곁을 지나가려 했다.

"거기 잠깐."

"네?"

휙! 척!

유진은 벨벳에 놓여 있던 엘―칼릭스의 눈물을 그녀를 향해서 가볍게 던졌다.

루시아는 S급 헌터다운 몸놀림으로 펜던트를 가뿐하게 잡아챘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펼쳐 보고 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오다 주웠다."

얼마 전에 TV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를 그대로 읊조린 것이다.

뜻밖의 선물을 받아든 루시아의 눈망울은 터질 것처럼 일렁거렸다.

전시영이 블라드 유진에게서 거인의 발걸음이라는 아이템을 받았다며 자랑할 때 얼마나 부러웠던가.

자신은 훨씬 아름다운 목걸이를 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부러워할 것도 없었다.

이 일련의 상황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다이애나 로즈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나도 주워 온 거 잘 받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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