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32화 (133/226)

7화

똑똑.

"촬영 들어갈 시간입니다."

"아, 네."

대기실로 스태프가 들어와서 촬영 시작을 알리자, 다이애나 로즈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 듯 안 한 듯 상당히 가벼운 메이크업에 깔끔하게 정리된 구불구불한 머리칼.

평소 일상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잡지 촬영에는 이대로 임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자신의 매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자신의 녹색 눈동자가 왠지 처연해 보였다.

"벌써 이게 몇 개째더라?"

성체 미궁 공략이 끝나면 늘 그랬듯 다이애나는 수십 개의 광고와 화보 촬영에 들어갔다.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인물이니만큼 일정은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와처스(Watchers) 길드는 매우 중요한 작전에만 그녀를 써먹고, 그 외의 전투에서는 완전히 배제했다.

전선의 소모전에 다이애나 로즈를 내보내느니, 연예 활동을 하는 게 훨씬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 이러려고 길드에 들어온 게 아닌데."

그녀는 영국인이었지만, 좀 더 전투가 많이 일어나는 미국으로 넘어와 헌터 활동을 시작했다.

초반에는 레벨을 올리기가 극악할 정도로 어려웠다.

다이애나가 각성하면서 얻었던 스킬은 효과가 미미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강력한 버프와 더불어 치유 능력까지 부여하는 게 아니라, 아주 미약한 능력치 상승만 있었으니까.

게다가 근접전에는 젬병이라 무기를 들고 싸울 수도 없었다.

파티를 구하려 해도 버퍼(Buffer)라는 괴상한 포지션을 헌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별로 도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보상은 나눠야 했으니, 그녀를 배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다이애나 로즈를 지지한 건 와처스 길드였다.

그녀의 성장 가능성을 직관적으로 알아본 길드 마스터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길드의 후원 덕분에 초반 성장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던 다이애나는 결국에 S급 헌터가 될 수 있었다.

공격뿐만 아니라, 회복과 아군 강화까지 가능한 만능형 헌터가 된 것이다.

게다가 능력을 광범위로 뿌릴 수 있으니, 걸어 다니는 주유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갖췄음에도 다이애나의 일은 전장 투입이 아니라, 화보 촬영이었다.

"늦었어요. 얼른 들어가야 해요."

아까 그 스태프가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재촉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네, 바로 갈게요."

스태프의 말에 대답한 다이애나 로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살짝 번진 화장을 고쳤다.

그러고는 대기실 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문고리를 붙잡고 잠깐 서 있었다.

그녀는 와처스 길드의 요구를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다이애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준 건 분명 와처스 길드였다.

"그래도 해야지."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일은 충실히 해야만 했다.

마음을 다잡으며 나직이 중얼거린 그녀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이 끝난 직후, 스튜디오를 나선 다이애나 로즈는 곧장 큼지막한 검은색 밴에 탑승했다.

드르륵! 텅!

그러자 보조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매니저가 퍼뜩 몸을 일으키며 종이를 주섬주섬 넘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뒷자리에 앉은 그녀에게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다음 일정이야. 유니온스퀘어 헌팅 바이에서 팬 사인회가 있어."

"이게 마지막인가요?"

"아니, 그럴 리가. 그 뒤로 몇 개가 더 예정되어 있는데, 어디 보자. 그다음은 뉴욕 헬스 플러스 병원 응급실이야. 이벤트성 치료 홍보로 가는 거지."

다이애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매니저는 그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스타일리스트와 시선을 맞췄다.

촬영 중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듯했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도 다이애나 로즈가 왜 저기압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일정이 많아서 그런 거로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손에 들린 일정표를 가리키자, 매니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규모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항상 이러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그런데 문득 헤드레스트 뒤편에 달린 9인치 LCD에서 웬 중후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This is NBC news special report. Here's Lester Holt. Good day, everyone.]

앵커의 목소리와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건 거대한 탑이 부스러지는 모습이었다.

시커먼 마기를 마구 뿜어 대던 홍콩의 탑은 공략 성공 직후, 완전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이어진 것은 300명으로 구성된 공략대가 탑으로 접근하며 벌인 전투 장면이었다.

콰아앙! 콰직! 퍼버벅!

그저 헌터들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였지만, 꼭 저런 소리가 날 법한 자료 화면이었다.

"우리가 지금 중국 걱정할 때냐? 다이애나 쉬게 TV 꺼."

"네."

매니저가 투덜거리며 고갯짓하자, 스타일리스트가 LCD 화면을 터치하려 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뜬 다이애나가 옆에서 다가온 손을 부드럽게 막았다.

"놔둬요."

"아, 네."

그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그마한 LCD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탑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블라드 유진의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탑이나 대규모 미궁에서 찍은 영상이 없었기에, 한국의 양수역에서 촬영된 전투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반짝이는 은발을 휘날리며 프리클 플라워를 압도하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니까.

다이애나 로즈는 이동하는 내내 한숨도 자지 않고, NBC 긴급 속보를 시청했다.

차에만 타면 잠을 자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끼이익!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가 차를 세웠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LCD 화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리셔야 합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몇 번 재촉하고 나서야 다이애나는 차에서 내려 유니온스퀘어 안쪽으로 이동했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행사였으나, 팬 사인회는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13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팬이 그녀의 앞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안녕? 이름이 뭐니?"

"콜린이에요. 진짜 멋있어요! 저도 언니처럼 S급 헌터가 될 거예요. 전 여기다가 사인해 주세요."

콜린이라는 아이는 자그마한 액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든 건 7년 전쯤, 다이애나 로즈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동부 전선 진격 작전의 포스터였다.

좀 더 많은 헌터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 제작된 거였는데, 그 중심에는 그녀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동부 전선에서 와처스 길드와 함께 몬스터들을 몰아내는 모습이었다.

7년 전이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이애나의 자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걸 아직도 가지고 있다니……. 정말 고마워."

"뭘요. 이런 건 기본이라고요. 근데 요즘에는 전선에 안 나가세요?"

"갑자기 그건 왜 묻니?"

"전 언니가 이 포스터에서처럼 활약하는 게 좋았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성체 미궁에만 가서 싸우는 걸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미안하구나."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투쟁을 이어 가신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까요."

콜린의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그녀는 어마어마한 자괴감이 엄습해오는 걸 느꼈다.

그와 동시에 차에서 보았던 블라드 유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의 모습은 7년 전의 자신보다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다이애나 로즈는 흐트러진 표정을 정리하며 콜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네."

"기회가 되면 언제든 보러 올게요. 나의 우상."

"그래. 잘 가렴."

콜린이 지나간 다음부터 그녀는 빠르게 사인회를 이어 나갔다.

유니온스퀘어에서의 일정이 끝나자, 매니저는 다이애나를 태우고 뉴욕 헬스 플러스 병원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매니저의 손에 방금 벗은 구두 한 켤레를 쥐여 주며 운동화를 신었다.

"갑자기 신발은 뭣 하러 갈아 신는 거야?"

"음…….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니까요."

"뭐?"

"이후 일정은 다 취소하시고, 마스터한테는 알아서 전해 줘요!"

타다다다다!

매니저가 제지할 틈도 없이 다이애나 로즈는 인파를 뚫고 저 멀리 사라지려 했다.

얼빠진 표정으로 빨간 구두를 든 매니저는 그런 그녀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 뭐라고 전하라는 거야!"

그러자 다이애나는 힐끗 돌아보며 웃는 낯으로 외쳤다.

"휴가요!"

* * *

"그렇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거야. 그 아이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은 거지."

―으음. 그렇구나. 이제 궁금증은 풀렸어.

다이애나 로즈의 말에 레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탕을 와그작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눈앞으로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당장 더 내놓으라는 의사표시였다.

"그래. 그래. 앞으로 언니가 좀 바빠질 예정이라, 이거 먹고 다른 데 가서 놀아야 한다?"

―언니?

"한국에서 나이가 많은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래. 요즘 한국어도 배우고 있거든."

―그건 알아. 근데 누가 언니야?

"당연히 내가 언니지 않아?"

―난 674년 살았는데.

"……."

레니의 대답에 다이애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긴 이 친구는 겉모습만 어린아이지, 인간과 전혀 다른 종족이었다.

600세가 넘었다고 이토록 귀여운 꼬마에게 할머니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하하! 이거 줄 테니 얼른 가 보렴."

―웅.

그녀는 레니가 좋아하는 커다란 롤리팝을 몇 개 쥐여 주며 부드럽게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중인 블라드 유진을 쳐다보았다.

최근 그녀가 푹 빠진 일은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였다.

마치 조각처럼 아름다운 유진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우상이 된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천공의 성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다이애나만의 취미 생활이었다.

이렇게 바라보고 있을 때마다 블라드 유진을 향한 마음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우상을 대하는 팬으로서의 마음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그런 그녀의 곁에 누군가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여. 뭐해?"

다이애나 로즈의 앞으로 불쑥 고개를 내민 건, 운동복 차림으로 나가는 중인 전시영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당황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냥 사색 중이에요."

"무슨 사색을 사람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하냐? 스토커야?"

"에엑? 스토커라니요!"

"이거 눈이 음흉한 게 딱 봐도 스토커 같은데……."

"자,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다이애나는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전시영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레니 때와 마찬가지로 현관 쪽으로 등을 떠밀었다.

"오! 이거 수입 안 된다고 하던데, 어떻게 구한 거야?"

"당연히 입국할 때 가져왔죠!"

"갑자기 이건 왜 주는데?"

"입막음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가세요."

"오케이."

전시영은 입술을 지퍼로 잠그는 제스처를 하더니,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이애나 로즈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수첩을 꺼냈다.

블라드 유진의 일상을 관찰하며 매일매일 간단하게 메모를 적어 두는 다이어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가 바람을 불어 넣는 게 아닌가.

후!

"읏!"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루시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저는 파자마요."

다이애나는 오늘따라 왠지 호구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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