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괜찮으세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전시영과 루시아, 다이애나가 연신 사과를 전하자 안드레아는 방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꽤 오랫동안 교황 자리에 앉아 있었던 만큼, 교황은 세 사람을 바로 알아보았다.
밝은 미소와 함께 한 번씩 손을 잡아 주는 모습은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았다.
"괜찮습니다. 허허! 괜찮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하지만 아크웰이 가져다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걸어가는 교황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방향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덜컥!
아크웰은 빠르게 앞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호위 병력은 바깥에 남고 안드레아와 다니엘만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 좋은 행세하는 것도 힘들군. 쯧!"
물을 모두 닦은 교황은 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곳에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평소의 거만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의 소파에는 블라드 유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할 말만 하고 다시 들어온 상태였다.
제멋대로 하는 행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교황은 일단 차분하게 대화를 해 보기로 했다.
금제를 가할 필요 없이 말로 해결된다면, 피차 좋은 일일 테니까.
"오랜만이로군."
"……."
안드레아가 운을 뗐으나, 유진은 대답 없이 턱을 까딱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무언의 몸짓이었다.
그게 교황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인지, 순간적으로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곧바로 화를 내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한국의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고 골칫거리였던 스페인과 홍콩의 일을 해결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주 잘했어."
"치하하러 온 건가."
"아니, 이건 경고다. 네 자유가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하여 찾아왔을 뿐."
"재미있네. 직접 찾아올 필요까진 없는 것 같은데,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겠군."
"흥! 그건 네놈이 신경 쓸 바 아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폰시아노와 함께한다는 성명을 낸 건 뭐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당연히 중요하지. 네놈의 말실수로 판세가 바뀌고 있으니까."
"그럼 답변을 빨리 줬어야지."
"이이! 어디서 그딴 망발을! 조금만 기다렸으면, 명령이 내려갔을 거 아닌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왜 열 내냐는 식의 반응에 교황은 결국 대로(大怒)하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블라드 유진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아크웰 페리티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에게 듣자 하니, 공략이 끝날 때까지도 답변이 없었다더군. 그렇지 않나?"
"어, 그게……. 그렇습니다."
아크웰이 잔뜩 주눅 든 말투로 말하자, 유진은 보란 듯이 양 손바닥을 펼쳤다.
안드레아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치며 눈을 질끈 감더니, 거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거야 네놈들이 제멋대로 성명을 내 버렸는데, 어떻게 명령을 내린단 말이냐?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
"잘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 다시 말해 줘야겠군. 그럼 빨리 말했어야지."
"……."
정상 회담에는 교황청 외교관인 아크웰이 참석했다.
다른 국가는 파견 규모까지도 다 결정한 상황이었다.
아마 교황과 외교관이 연락을 주고받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콕 집어 말하자, 안드레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실제로 그 당시 교황은 힐러 파견을 망설이고 있었으니까.
홍콩에서의 피해가 너무 커서 한국에는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마침 한국은 대규모 미궁을 정화하면서 최근 승승장구하는 중이 아니었던가.
분명 빨아먹을 건수는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그러나 폰시아노의 성명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최근에는 그간 열심히 쌓아 올린 교황의 입지마저도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만큼 교황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진은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지난번에 낸 성명을 철회하고, 앞으로는 성기사단과 상종도 하지 말라. 네놈을 지배하는 건 나다."
안드레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블라드 유진은 헌터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급부상했지만, 그래 봐야 봉인된 뱀파이어에 불과했다.
팔에 채워진 성물을 발동하면,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줄 수 있었다.
정신을 제압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확한 협박을 가했음에도 그의 태도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가만히 턱을 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무심하게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재미없군."
유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늘하던 교황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제는 불편함을 넘어서서 상대를 찢어발길 듯한 살의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비협조적이면, 앞으로 더 재미없어질 텐데."
"이제 교황청이라는 배경 따위 별로 필요하지도 않아. 그러니 꺼져도 돼."
"이 저열한 흡혈귀 따위가 어디서! 상떼 미카엘 아르캉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안드레아는 대뜸 성 미카엘 대천사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블라드 유진의 팔목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여태껏 평범한 은팔찌로 위장하고 있었던 성물이 기도문에 반응하여 막강한 신성력을 뿜어낸 것이다.
마기를 다루는 존재가 신성력에 노출되면, 극한의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치이이이익!
당연히 성물과 맞닿아 있던 그의 팔은 강렬한 백광과 반대로 시커멓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유진의 왼손에서 암자색 섬광이 번득이며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사람이 질식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마기를 뿜어내는 뱀파이어 로드 궁극의 공격 스킬이 펼쳐진 것이다.
단검 크기의 천계도살검은 그의 손목을 녹이는 중인 성물을 가볍게 찔렀다.
콰칭―! 쩌저저저정!
그저 검신을 갖다 댔을 뿐인데, 성물에서 느껴지는 반발력은 상당히 거셌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본인의 손목이 찔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천계도살검을 쭉 그어 버렸다.
터어어엉!
굉음과 함께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주변의 조도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기도문에 반응하며 신성력을 발하던 성물이 처음부터 존재치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투둑!
바닥에 깔린 러그에 떨어져 내린 팔찌는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성물이 이토록 간단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드레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냉철한 심복 다니엘조차도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너무 안일한 거 아닌가? 고작 이따위 성물만 믿고, 호위도 들이지 않다니 말이야."
화르르륵!
블라드 유진이 피의 권능을 주입하자, 천계도살검의 크기가 2m 정도로 쭉쭉 늘어났다.
그 상태로 가볍게 한 번 휘둘렀는데, 심혼을 갈라 버릴 듯한 살기가 세 사람의 전신을 압박했다.
다니엘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리모컨을 잽싸게 누르려 했다.
유사시에 호위 병력을 호출할 수 있는 장치였는데, 아무리 힘을 줘도 버튼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행동을 하려고 생각과 의지를 불러일으켰지만, 실제로는 극강의 살기에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다니엘의 의도를 눈치챈 모양인지, 유진은 스산한 눈빛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것들을 불러 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야. 내가 누군지 잊은 건 아니겠지?"
"……."
다니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꼼지락거리던 오른손을 축 늘어뜨렸다.
지금까지 블라드 유진은 초월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그에게 덤벼들었던 미국과 러시아의 헌터들이 어떻게 되었던가.
기백 명이 힘을 합쳤지만, 유진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모조리 도륙당하고 말았다.
바깥에 있는 호위 성자들을 불러들여 봤자, 개죽음만 당할 터였다.
그 사실을 안드레아도 잘 알았던 모양인지, 양손을 펼쳐 보이며 상황을 진정시켰다.
"……돌아가지. 이거 내가 괜한 걸음을 했군."
자연스럽게 몸을 돌린 교황은 담담한 표정으로 현관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안드레아의 온몸에서는 새하얀 서기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패용한 성물들을 모조리 발동시킨 것이다.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다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하지만 모든 걸 간파하고 있던 유진에게 그런 허장성세는 통하지 않았다.
쉬이이이익! 쩌어어엉!
"큭!"
어느새 천계도살검이 날아들어 교황의 모자, 백색 주케토(Zucchétto)를 꿰뚫었다.
안드레아의 주케토 또한 신성력을 뿜어내는 일종의 성물이었다.
마치 후광이 돋아나는 듯한 효과도 있어서 교황의 권위를 세워 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천계도살검의 위력 앞에서는 성물도 한낱 빛나기만 하는 물건에 불과했다.
암자색 섬광에 썰린 주케토는 반으로 갈라지며 시커멓게 색이 변해 버렸다.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성물이 하잘것없는 쓰레기가 된 것이다.
"끝까지 가 보자는 건가. 날 건드려서 피차 좋을 게 없을 텐데."
"아니, 이건 경고다. 너 정도야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은 듯해서 말이야."
"……."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자, 교황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하지만 끝끝내 화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현관을 나섰다.
이윽고 안드레아 일행은 황급히 그의 저택에서 도망치듯 자취를 감추었다.
스윽!
그런 교황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블라드 유진의 곁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지팡이를 손에 쥔 멀끔한 차림의 백인 남자, 카르텔 설계자 DK였다.
녀석은 그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대로 그냥 보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기서 교황을 처리하는 게 더 시끄럽겠지. 공개적으로 방문했으니까."
"암살이라면 저도 자신 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참에 처리해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DK의 의견에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황청은 미궁 사태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조직이었다.
만약 저들이 힐러들을 제대로 양산하지 못한다면, 인류는 오염 지대에 휘말려 멸절하고 말 터였다.
굳이 교황청을 흔드는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그의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자가 교황 자리에 있어 주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야 성기사단과의 알력이 계속 생길 테니까.
"그래도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는군."
"어떤 점에서 말씀입니까?"
"저자가 무슨 일을 터트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믿는 구석이 없어지면서 크게 한 방 먹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적당한 감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블라드 유진이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자, DK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