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30화 (131/226)

5화

알이탈리아 항공의 전세기가 성남 서울공항에 착륙하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다름 아닌 안드레아 교황이 항공기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세기에서 내린 교황은 꽤 성대한 환영식과 함께 사진을 찍고, 큼직한 검은 세단에 탑승했다.

헌터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답게 안드레아를 호위하는 인원은 상당했다.

똑같은 세 대의 방탄차와 무장 병력이 탄 30대의 승합차가 줄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위 병력 중 절반은 하나같이 육중한 헌터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볍게 움직이는 걸 보면, 저들은 교황청 소속 성자들인 모양이었다.

성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괴력난신과 전투를 벌여 온 존재로, 성기사단이 아니라 교황 직속이었다.

둘을 구분하는 건 간단했다.

성자들은 금색과 은색 열쇠와 왕관 형상의 교황 문장을 갑옷에 새기고 다녔으니까.

"성가시군. 저들에게 별 관심도 없는 방한인데, 이런 난리를 피우다니."

방탄 차량의 뒷좌석에 앉은 안드레아 교황은 멀어져가는 환영식장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교황청은 전 세계에 힐러들을 공급하는 조직이었다.

힐러의 8할에서 9할이 교황청 사제로부터 나왔으니, 안드레아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장진석 대통령이 직접 마중을 나오려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교황청에서 과례는 비례라며 말리지 않았다면, 환영식은 이보다 더욱 성대하게 열렸을 것이다.

"그래도 대외적인 이미지는 중요합니다. 이제 한국은 상당히 요긴한 곳이 되었으니, 일정은 소화하셔야 합니다."

심복인 다니엘이 공손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하자, 교황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닐세. 그저 별로 마음에 안 들 뿐이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변방의 소국 아니었습니까? 물론 S급 헌터가 둘이나 있지만, 그 외에는 별 볼 일 없었죠."

한국의 영향력이 이만큼 커지고 화제의 중심이 된 이유는 블라드 유진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를 떠올린 모양인지, 안드레아는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며 짧게 혀를 찼다.

"흡혈귀 놈 주제에 괴상한 일을 꾸미고 있더군. 어디서 성기사단과 뜻을 함께한다는 개소리를 지껄여?"

교황이 이토록 노여워하는 이유는 파견 성기사대장 폰시아노의 천명 때문이었다.

유진이 성기사단과 함께한다는 말로 인해, 교황청 내부의 정치적 세력 구도는 급변해 버렸다.

막강한 힘을 지닌 그가 안드레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교황의 입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창 성기사단을 상회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라, 교황은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다.

그랬기에 이토록 긴급히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안드레아는 당장이라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블라드 유진의 낯짝을 보러 달려가고 싶었다.

"이참에 함부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놔야겠어."

교황은 최근 그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기사단을 정치적으로 제압해 가던 와중인데, 유진이 거기다 찬물을 끼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미궁 군체부터 시작해서 안테리오르 타워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천공의 성 공략에 참전하는 것도 안드레아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자신의 입지만 높일 수 있다면, 성배를 찾는 일이 늦어지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선을 넘고 말았다.

끼이익!

"다 왔습니다. 내리시지요. 교황 성하."

"……생각 외로 빠르군."

"의전을 위해서 도로를 비워 뒀다고 합니다."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한국 대통령은 당연히 뭐라도 하고 싶을 테지요. 아무한테나 다 붙여 주는 국빈도 아니고, 무려 교황 성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크흠! 그렇긴 하지."

덜컥!

경호팀의 성자가 문을 열어 주자, 안드레아는 거만한 표정을 정리하며 웃는 낯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주차장까지 달려 나온 장진석 대통령이 그런 교황을 맞이했다.

"벤 베누띠 인 코레아! 하하하!"

장진석은 어색한 이탈리아어로 안드레아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교황은 대통령의 손을 감싸 쥐며 차에서 몇 번 연습했던 한국어 인사말로 답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허허! 한국어가 유창하시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장진석은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안드레아를 안내했다.

원래라면 일국의 대통령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의 위상이 워낙 높다 보니, 이런 반응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그대로 힐러들을 거둬 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바로 그게 교황이 각국에 방문할 때마다 과한 의전을 행하는 원흉이었다.

이게 다 가톨릭 교황청이 행정 기구와 순수 종교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도주의적인 결정을 바랄 수 없을 정도로 현 정세는 하 수상한 상태였으니까.

"고맙습니다."

안드레아는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은 급했지만, 교황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 * *

절차대로 청와대 공식 환영 인사에 참석한 뒤, 교황은 개인 면담도 건너뛰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숙소인 주한 교황청 대사관에도 들르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안드레아의 일정에 관해서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황이 가는 곳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교황을 태운 호위 행렬은 청담동까지 쭉 이어졌다.

예정에 없던 이동이라, 의전을 이어 가는 서울 경찰들만 개고생이었다.

호위 차량의 움직임에 따라 신호기를 조정하고, 교통 통제를 해야만 했으니까.

삑! 삐빅!

교차로에 나온 교통경찰이 호각을 불며 수신호를 보내자, 우회전하려던 차들이 그 자리에 멈췄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교통 통제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이이잉!

"20세기 폭스 자식아! 아니, 대체 뭐 하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못 가게 하는 거야? 민방위 대피 훈련도 아니잖아!"

화가 난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자, 교통경찰은 곤란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교황 방한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워낙 중요한 분이시다 보니……."

요즘은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다 나오는 세상이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교통경찰이 교황을 들먹이자, 운전자는 혼자 구시렁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교황이 왔다는 말이 먹힌 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부아아아앙!

이윽고 교황의 호위 행렬이 교차로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십 대의 차량이 줄지어 이동하는 광경에 운전자와 교통경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었다.

항의하던 운전자는 그 장면을 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야……. 교통 통제 할 만하네."

* * *

"쯧! 이런 거 좀 하지 말라니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동네방네 광고하는 느낌이군. 주인이 개를 찾아가는 형국이야."

한편, 안드레아는 교통 통제가 이루어지는 교차로를 통과하는 중이었다.

창문 너머로 수십 대의 차량을 가로막은 교통경찰의 모습을 보고 있던 교황은 혀를 차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니엘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당에서 탈주한 개를 찾으러 가는 주인이지요. 성하께서 방문한 이후로 그자의 행보가 변한다면, 세간의 인식 또한 한순간에 뒤바뀔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듣고 보니, 공개적으로 다니는 게 훨씬 낫겠군."

"천공의 성 공략 이후 성기사단 측에서는 아직 접촉하지 않았다고 하니, 효과는 더욱 좋으리라 예상됩니다."

"좋아. 얼마나 남았나?"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끼이익!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차량은 숲 옆에 딸린 널찍한 주차장에 멈춰 섰다.

서울의 도심지에는 의외로 이런 공원이 많았지만, 이곳은 사뭇 달라 보였다.

사람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아니라, 주변에 벽이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도 차단기가 설치된 걸 보니, 이곳은 사유지인 것 같았다.

"도시 한복판에 이런 걸 만들어 두고 있다니……. 노예 따위가 과한 호사를 누리는구나."

주위를 둘러보던 안드레아는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린 뒤,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여기부터는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에, 걷는 내내 불편한 기색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교황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포착되었다.

두두두두두!

―헤헤헿!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준마가 숲속을 뛰어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유령 군마의 뒤에는 예쁘장한 어린아이가 따라서 달리는 중이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애는 아닌 듯했다.

기본적으로 불타는 말과 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데다가, 저 아이는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마치 유령 군마와 뜀박질 경쟁이라도 하는 듯했다.

쉬이이이익―! 처저저적!

불타는 말과 여자아이가 빠르게 다가오자, 교황청 성자들은 안드레아의 앞을 막아서며 방어 태세를 굳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휘이이잉!

두 녀석은 기묘한 돌풍만 남긴 채, 교황청 일행을 지나쳐 버렸으니까.

이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면 공격을 했어야 정상인데, 성자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그만큼 유령 군마와 여자아이의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한데, 문득 안드레아가 성자들을 돌아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 방금 날 건드린 건 누구요?"

"저희는 아닙니다만."

"그럼 저것들이 나를 치고 지나간 건가?"

"……죄송합니다. 교황 성하."

놀랍게도 여자아이는 교황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지나쳤다.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암살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완벽한 호위 실패에 성자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안드레아는 미간을 좁혔지만, 그들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사소한 실수로 성자들을 내쳐 봐야 본인의 입지만 줄어든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쉰 교황은 쌀쌀한 표정으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고대했던 블라드 유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엉뚱한 인물들만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거 걸린 사람이 굴욕 사진 찍기다. 대충 찍으면 알지?"

"그런 건 제가 또 일가견 있죠. 물론 전 안 걸릴 거지만요."

"후훗! 모델이라고 뺄 줄 아셨나 보죠?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

저택 앞의 마당에는 세 여인이 가운데에 바구니를 두고 둘러 서 있었다.

그중에서 빨갛게 염색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둥그런 무언가를 손에 쥐고는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그러자 백금발의 키 큰 여인과 굴곡진 몸매의 백인 여성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간다!"

휘이익!

허공에 새파란 물건을 힘껏 던진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다른 두 명과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위로 던졌던 물체에 적중당하는 사람이 벌칙을 받는 변형 러시안룰렛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간 둥근 물체는 불규칙하게 꿈틀거리더니, 바람을 받아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잉! 철퍽!

그녀들이 던진 건 상당히 묵직한 물풍선이었다.

문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낙하를 기다리는 세 여인에게 물풍선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잉?"

슬그머니 눈을 뜬 키 큰 여인이 물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고성을 질렀다.

"교, 교황 성하?"

그 목소리를 들은 세 여인은 동시에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크웰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쩍 벌린 채 서 있었다.

"갑자기 교황은 뭔 교……."

무심코 시선을 돌린 세 사람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늘 높이 던져 올린 물풍선에 직격당한 사람은 바로 안드레아 교황이었으니까.

"어, 음……."

한데, 붉은 머리의 여인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저택 입구 쪽에서 문득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주변 공기를 강제로 내리누르는 듯한 무겁고 짙은 존재감과 함께.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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