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쿠화아아아아!
화룡왕의 브레스에 직격당한 비공정은 이제 활활 타오르는 상태로 낙하하고 있었다.
숫제 거대한 유성이 떨어지는 모양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헉! 이거 더 위험한 거 아니야? 불타고 있어!"
"저, 저런 미친!"
공략대원들은 레드 드래곤의 출현보다 천공의 성이 강북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고 있었다.
마치 소행성이 지면에 충돌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러면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전체가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꺼져라!
투우우웅!
엔세데스가 묵직한 에너지의 파동을 발하자, 불타는 비공정이 저 멀리 튕겨 나가는 게 아닌가.
생각대로 되지 않자, 화룡왕은 곧장 용언 마법을 시전하여 천공의 성을 날려 버린 것이다.
지름이 10km쯤 되는 거대한 구조물이었지만, 마치 공깃돌처럼 가볍게 밀려나고 말았다.
쿠후우우우웅!
브레스로 인해 위치 유지 장치가 망가진 모양인지, 비공정은 힘없이 떠밀려 날아가 지면에 처박혔다.
낙하한 위치는 안지홍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위쪽이었다.
천공의 성이 떨어진 곳은 연천군 한탄강 북쪽 성산 인근.
무시무시한 충격이 대지를 뒤흔들고 곧이어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콰아아아아앙!
하지만 오염 지대 너머에서 일어난 일이라, 도시까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서울 상공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너무도 황당한 장면을 연속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던 공략대원들은 양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저 거대한 걸 한 방에 처리한다고?"
"아니, 갑자기 뭔 레드 드래곤이 나타나? 이거 실화냐?"
엔세데스가 생각했던 반응과는 사뭇 달랐지만, 어쨌든 성공적으로 천공의 성을 치워 버릴 수 있었다.
* * *
[……속보입니다. 연합 공략대가 천공의 성을 완전히 정화하고 서울 상공의 쾌적한 하늘을 되찾았습니다. 더불어 공략이 끝난 직후, 천공의 성이 추락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는데요. 공략대가 저지에 실패했지만, 난데없이 붉은 괴물이 나타나 낙하물을 불태우고 쳐 냈습니다. 당국은 괴물을 토벌하겠다는 성명을 밝히고 위치 추적에 나선 상황입니다. 변형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화룡왕의 데뷔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단 한 번의 활약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이목을 확실히 집중시켰다.
엔세데스는 그 대가로 블라드 유진의 집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지구 생활에 적응할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었지만, 이 괴상한 생명체가 언제 나갈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이거 진짜 죽여주는 기능의 물품이 가득하구먼. 지구로 오길 아주 잘했어. 구경거리가 이렇게 많다니 말이야."
화룡왕은 TV 앞에 서서 양팔을 쫙 벌린 채, 호탕하게 소리를 질러 댔다.
뉴스를 보고 있던 유진은 엔세데스를 향해서 심드렁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화면 가리지 말고 좀 비켜."
"크흠! 그, 그러지. 이래 봬도 난 매너가 아주 좋은 드래곤이라고. 남의 집에서는 예의를 지켜야지."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더니, 이번에는 냉장고 앞에 다가가 턱을 괴는 게 아닌가.
똑똑! 똑똑!
이윽고 화룡왕은 홈바를 두드리며 노크온 기능을 반복적으로 사용했다.
"충격에 반응해서 불이 켜지는 건가? 어떻게 이리도 민감할 수가 있지?"
새로운 세상에 온 엔세데스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드래곤 본연의 종족 효과인 지독한 게으름으로도 저 탐구욕이 억제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1천 년 만에 깨어난 블라드 유진 또한 현대의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었으니까.
"어이, 굴러온 돌. 좀 비키지?"
그런데 노크온 기능을 무한 반복하던 화룡왕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며 손을 팔랑거리는 게 아닌가.
이제 막 씻고 온 듯, 촉촉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전시영이 눈앞에 서 있었다.
엔세데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에서 시뻘건 불꽃을 피워올렸다.
"허! 하찮은 인간 따위가 위대한 고대룡인 내게 망발을 지껄이다니, 간땡이가 붓다 못해 정신까지 나가 버린 모양이로구나."
"확! 마, 네가 용이면 뭐? 그런 건 나도 할 수 있거든?"
화르륵!
전시영은 연옥의 숨결을 시전하여 시퍼런 불꽃을 생성하고는 화룡왕보다 더 크게 키웠다.
그러자 엔세데스의 한쪽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며 치켜 올라갔다.
자신이 고대룡이든 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당돌함에 되레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군. 엘칸 차원의 인간들은 내 피어와 마주하기만 해도 벌벌 떠는데."
"분위기 곱창 내지 말고 비키기나 해. 집주인 있는데, 여기 다 태울 거야?"
"으음."
TV를 시청 중인 블라드 유진 쪽을 힐끔 바라본 화룡왕은 침음을 흘리며 옆으로 슬쩍 비켜 주었다.
전시영은 홈바를 열어서 탄산수 한 병을 꺼낸 다음, 거실 창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엔세데스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지구인답게 이런 걸 잘 쓰는군. 이렇게 여는 거였나?"
달칵!
버튼을 눌러서 냉장고 문을 연 화룡왕은 한동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모든 걸 다 파악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흡족하게 웃었다.
"마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이렇게 미개한 방법으로라도 음식을 보관해야 하는 거로구나. 쯧쯧! 불쌍한지고."
TV를 보면서 엔세데스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유진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저렇게 현대 물건들을 분석한 뒤, 마법이 더 위대하다는 소리를 하는 게 열 번도 넘었기 때문이었다.
주방으로 걸어간 그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원두를 넣고, 분쇄도를 조금 굵게 맞췄다.
지이이이잉!
이윽고 원두가 갈려 나오자, 탬핑을 한 뒤 투 샷으로 추출을 시작했다.
그가 커피 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룡왕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아마 이 에스프레소 머신 또한 냉장고처럼 실컷 만지작거릴 모양이었다.
"안 돼."
"왜 안 되나?"
"이건 중요한 거야. 저딴 건 별 필요 없지만."
"냉장고가 훨씬 크고 디자인이 좋아 보인다만?"
"난 어차피 저거 안 쓰거든. 이거 건드리면 쫓아낼 줄 알아."
"끄응……."
"분해해 보고 싶으면, 돈 벌어서 사든지."
머그잔을 든 블라드 유진은 화룡왕을 잠깐 주시하더니, 이내 테라스를 향해서 느긋하게 걸어갔다.
방금의 눈빛은 분명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짓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드래곤이 이따위로 궁핍하게 살 순 없지. 그까짓 돈, 얼마든지 벌어 주마. 흐흐!"
엔세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1층의 빈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얌전히 방으로 사라지는 화룡왕을 힐끔 바라본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선베드에 앉았다.
시련 하나를 건너뛴 대가긴 하지만, 너무 오래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 이거 여기 있더라."
옆자리에 앉아 탄산수를 마시고 있던 전시영이 유진에게 불쑥 선글라스를 건넸다.
아까 저 자리에 누워 있다가 들어가면서 놔두고 간 모양이었다.
"안 바쁘나? 협회 쪽은 시끌시끌하던데."
선글라스를 받아 쓴 그가 커피를 홀짝이며 질문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야 뭐, 아무 자리도 안 맡고 있으니까."
천공의 성을 정화한 이후, 한국 정부와 헌터 협회는 미친 듯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공략을 지원해 준 국가에 예를 표하고, 전사자들에게는 확실한 보상을 약속했다.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으니, 감사를 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불어 혼란에 빠진 도시를 수습하고 난 다음에는 천공의 성 잔해를 조사할 작정이었다.
협회 일에 관심 없는 척해도 전시영은 내부 사정을 꽤 잘 알고 있었다.
한국 헌터계에서 입지가 크다 보니, 이래저래 들리는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두 사람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올려다보니, 다이애나 로즈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천공의 성 공략이 끝났음에도 다이애나는 영국이나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협회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짐을 빼서는, 곧장 블라드 유진의 저택으로 들어온 것이다.
어차피 차고 넘치는 게 방이라서 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전시영을 바라보았다.
"싫어하지 않았나?"
"아하하! 생각보다 괜찮은 애더라고."
전시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에 걸친 상아색 재킷을 어루만졌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상황을 부지불식간에 알아차렸다.
"뇌물을 받은 건가."
"뇌, 뇌물이라니? 그냥 얘가 신상 가져온 거 선물 받은 것뿐이야."
"미안한데, 인간들은 그걸 뇌물이라고 하기로 했어. 그게 사회적 약속이지."
"아, 몰라. 어쨌든 허락함! 땅땅!"
전시영은 재킷과 탄산수를 주섬주섬 집어 들더니, 황급히 풀장으로 도망쳐 버렸다.
한데, 문득 테디베어가 그려진 귀여운 파자마를 입은 루시아가 눈에 들어왔다.
블라드 유진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파자마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못 보던 잠옷인데, 너도 뇌물인가."
"으흠! 그, 그럴 리가요. 그냥 선물이죠. 그렇죠? 다이애나."
그녀 또한 본인의 취향에 맞는 뇌물을 받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루시아와 손을 잡고 있던 레니도 그를 향해서 커다란 롤리팝 사탕을 내밀었다.
―이거! 뇌물!
"어머! 그런 말 하면 안 돼."
―뇌물 좋아!
루시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솔직함의 대명사인 레니의 입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다.
풀장 쪽으로 총총 사라지는 둘을 쳐다보며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커피를 홀짝이던 그의 뇌리에 문득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내 영지 아닌가? 대체 누구 허락을 받는 거지?"
"원래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자를 공략하는 게 가장 쉽답니다. 후훗!"
다이애나 로즈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 유진의 말에 답했다.
그러자 그는 무미건조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귀찮게만 하지 마."
"물론이죠."
머그잔을 내려놓고 선베드에 몸을 눕힌 유진은 햇살을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다이애나는 그런 그를 방긋방긋 웃으며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타다다닷!
그런데 어디선가 다급한 발소리가 휴식을 취하는 블라드 유진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이제 좀 쉬나 싶은 찰나여서 그런지, 그의 미간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스이잉!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유진은 소수혈인을 뽑아 이쪽으로 달려오던 무언가를 향해 내질렀다.
슈화아악!
"히에엑!"
코앞으로 시뻘건 섬광이 닥쳐오자, 요란스럽게 질주하던 자는 괴성을 지르며 팔을 마구 흔들었다.
급하게 멈추지 않았다면, 저 무시무시한 핏빛 칼날에 꿰뚫려 버렸을 터였다.
그의 휴식을 방해한 자는 교황청 외교관 아크웰 페리티노였다.
"으으! 급보입니다. 급보!"
"급한 소식이 아니면, 넌 죽는다."
"진짜 급한 거 맞습니다!"
"읊어 봐."
"히끅!"
지척에서 마주한 블라드 유진의 거대한 살기에 놀란 아크웰은 딸꾹질이 올라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스윽!
그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소수혈인을 들이밀자, 녀석은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으아아! 교, 교황 성하께서 내한하신답니다! 히끅!"
"교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