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순간적으로 공략대원들의 시선이 화룡왕에게로 확 쏠렸다.
규명하지 못하는 현상에 의아해하고 있는데, 엔세데스가 마치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러자 폰시아노를 보조하던 다이애나 로즈가 질문을 던졌다.
"놔두면 알아서 회복할 거다. 한데, 이 녀석보다는 다른 곳이 더 급해 보이는군."
화룡왕의 말에 폰시아노와 다이애나는 뜨끔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블라드 유진의 상세가 꽤 중해 보이긴 했으나, 이곳에 여러 명의 힐러가 붙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치료에 필요한 인원만 남겨 두고, 다른 공략대원들을 지원하는 게 우선이었다.
게다가 치료 대상인 그는 현재 어떤 치유 능력도 소용없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유진이 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 우르르 몰려온 듯했다.
"흠흠! 그럼 전 이만."
이내 폰시아노는 괜히 헛기침을 반복하며 성기사대를 따라서 부상자 치료에 나섰다.
그러자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전시영이 다이애나 로즈에게 고갯짓했다.
"너도 가.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하지만 아직 치료가……."
"어차피 치유 능력도 안 먹히잖아? 괜히 힘 빼지 말고 다른 데다 써."
전시영이 단호하게 말하자, 다이애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블라드 유진은 최종 보스인 멸사공 사르판과 단독으로 혈전을 벌이지 않았던가.
공략대의 영웅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이애나 로즈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더니, 다른 부상자 치료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전시영은 엔세데스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확실해? 유진이 알아서 회복할 거란 말."
"못 믿겠으면 말든지. 어쨌든 내 느낌에는 그래."
"뭐? 느으끼임? 아니, 그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된다니? 이 몸의 감각만큼 정확한 게 어디 있다고?"
"……??"
화룡왕의 뻔뻔한 대답에 전시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블라드 유진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빛나는 미모를 뽐내며 인형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쉬며 그런 유진을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얼른 일어나서 이 이상한 것 좀 갖다 버려. 제발."
* * *
실눈을 뜬 유진이 가장 처음 목격한 건 붉은 빛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마계의 하늘이 눈에 들어오는 거로 보아, 아직 공략대는 천공의 성을 빠져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음.'
슬쩍 상체를 일으키려던 그는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몸을 다시 눕히고 말았다.
왼쪽 어깨와 가슴팍에서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뱀파이어 로드는 극강의 자연 치유력을 지녔지만, 멸사공 사르판에게 당한 상처는 여전했다.
내부로 침투한 마기를 몰아내지 못했기에,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고 있었으리라.
다시 눈을 감은 블라드 유진은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려 보았다.
츠츠츠츠츠!
기절 직전 지혈을 잘해 둔 덕분에, 다행히 다량의 출혈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강력한 충격을 받다 보니, 심장에 새겨진 마기의 중추에 문제가 발생했다.
'피의 권능이 잘 움직이지 않는군. 상대의 마기에 침식당했어.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피의 권능을 조심스럽게 발동시켜 본 그는 체내에 머무는 사르판의 마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집중하자, 어깨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윽고 유진은 비교적 멀쩡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론 손상된 마기의 중추를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했다.
"어? 일어났네. 와! 그 미친 인간의 말이 맞았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가장 먼저 다가온 건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던 전시영이었다.
"미친 인간?"
"응. 쟤 말이야. 빨간 대가리."
그녀가 가리킨 곳에서 엔세데스를 발견한 블라드 유진은 아주 잠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결계가 붕괴할 때, 자신의 몸을 지상으로 옮겨 놓은 건 화룡왕인 모양이었다.
그는 요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구경 중인 엔세데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전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 안다고. 이번에 돌아가면 머리 색부터 바꿔야겠어. 왜 저런 걸 주워 와서 염색 새로 하게 만들어?"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크흠! 그랬어? 피곤해서 환청이 들리나."
지레 제 발을 저린 전시영은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유진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던 루시아가 문득 말을 걸었다.
"몸은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그저 그래. 별로 좋지는 않군."
"그래도 상처가 없어져서 다행이네요."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볼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이며 고개를 돌렸다.
블라드 유진의 뇌쇄적인 눈빛과 계속 마주하고 있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전부 끝난 건가."
"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될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공략대의 전후 처리는 거의 끝난 상태였다.
이번에는 안테리오르 타워 때처럼 최종 보스를 쓰러뜨린 직후, 공간이 붕괴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사자 수습과 부상자 치료를 모두 한 다음에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러면 허겁지겁 되돌아가느라, 시체조차 찾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을 터였다.
'레벨이 올랐군.'
유진은 시야의 한쪽 구석에서 반짝이는 홀로그램 글귀를 불러와서 차례로 쭉 읽어 보았다.
아쉽게도 시체 애호가 퍼핏과 멸사공 사르판의 혈액은 미처 흡수하지 못했다.
그런데 원래라면 거의 변화가 없어야 했을 그의 레벨은 1,996이 되어 있었다.
사르판을 처치함으로써 무려 111레벨이 오른 것이다.
아무래도 상대와의 격차가 워낙 컸기에, 직접적으로 받은 경험치만으로 그만큼 성장한 모양이었다.
"깨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한데, 문득 근처에서 안지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략대장으로서 전후 처리를 마친 다음, 블라드 유진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가 말을 건 모양이었다.
그는 상대의 상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안지홍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뭐, 싸우다 보면 이럴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목숨을 건진 게 어딘가요."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에게 왼팔이 잘렸지만, 안지홍의 태도는 의연했다.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라 해도 신체의 일부를 잃은 충격은 상당할 터였다.
하물며 육체 능력이 중요한 헌터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붙이지 못한 모양이로군."
"예, 마기 때문인지 떨어져 나간 팔이 금방 썩어 버리더군요. 전황이 좋지 않아서, 조치가 꽤 늦기도 했습니다."
"한 손 검으로 바꿔."
"예?"
"오른팔만으로는 휘두르지 못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싶군요."
블라드 유진이 대검을 보며 말하자, 안지홍은 씁쓸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역시 그다운 조언이라고 중얼거렸다.
"정리가 끝났으니 슬슬 돌아가시죠."
차원문을 가리키는 안지홍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잠깐 움직여 보니,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 유진의 등에 무언가가 슬그머니 다가와 비비는 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거동이 불편할까 싶어, 녹턴이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그의 등을 받쳐 준 것이다.
"고맙군."
유령 군마의 등을 몇 차례 쓸어 준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블라드 유진은 차원문 근처로 걸어갔다.
지구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공략대원들은 각자 짐을 들고 차원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의 침울했던 분위기는 그를 발견한 이후부터 다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 유진 님이다."
"상처가 심해 보였는데, 멀쩡하시잖아? 그 빨간 머리 녀석의 말이 옳았어!"
"자가 회복 능력이 엄청나신 모양이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유진 님!"
"감사합니다!"
공략대원들은 유진을 향해서 감사 인사를 한마디씩 던졌다.
그가 최종 보스와 전투를 벌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만은 않아요. 아말릭 씨는 전사했고, 레프 씨는 한쪽 눈을 잃었죠. 공략대의 전력은 절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도 안테리오르 타워 때보다는 낫군."
루시아의 설명에 유진은 안테리오르 타워를 거론했다.
확실히 그때보다는 전사자가 월등히 적었으니, 성공적인 공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피해가 없는 건 아니죠. 제가 좀 더 지휘를 잘했더라면……."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지홍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돌아가지."
"네."
그러나 블라드 유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뭐라고 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을 갔을 뿐이지만, 안지홍의 생각은 달랐다.
자책하는 자신의 감정을 깨부수기 위해,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거로 해석한 것이다.
왠지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안지홍의 눈빛에는 존경심이 가득 담긴 듯했다.
물론 그는 그런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 지금부터 귀환하겠습니다."
천으로 감싼 시체를 옆구리에 낀 안지홍이 가장 먼저 차원문을 지났다.
스팟!
그러자 저마다 짐을 든 공략대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블라드 유진은 마지막까지 문 앞에 남아있다가 문득 엔세데스를 돌아보았다.
"갈 건가?"
"내친김에 지구 구경 정도는 해 봐야지. 어차피 여긴 내 레어와 더럽게 먼 곳이라고. 마계잖아. 마계."
"마음대로 해."
"기대되는군."
스팟! 스팟! 덜컹!
그와 화룡왕까지 통과하고 나자, 양쪽으로 열렸던 차원문이 접히며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요새를 중심으로 붙어 있었던 대지가 지진과 함께 세 방향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세 개의 백작령이 합쳐지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인 것 같았다.
* * *
운명의 방으로 귀환한 공략대는 다시 한번 차원문을 넘어서 지구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온갖 기계 장치가 덕지덕지 붙은 듯한 천공의 성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와아……. 하필이면 왜 돌아와도 여기냐?"
덜덜거리는 굉음과 함께 귓가를 스치는 칼바람은 이곳이 서울 상공임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전시영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서 지상까지 내려가려면, 또 스카이다이빙인지 뭔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덜컹! 드르륵!
"음?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루시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기묘한 소리를 내는 벽면을 가리켰다.
"원래도 좀 시끄럽지 않았어?"
"그러긴 했는데, 지금은 뭔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서요."
"바람에 흔들려서 그런 거 아니야? 지금 거의 광풍이 불고 있는데."
천공의 성은 지상으로부터 대략 4km 상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류 현상에 의해서 얼마든지 난기류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점이라, 구조물이 요동치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상을 향해서 강하해야 할 때라는 게 문제였다.
자칫 난기류에 휘말려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공략대원들은 불안감을 감춘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천공의 성 내부는 어지럽게 길이 꼬여 있었지만, 안지홍은 금방 출구를 찾아냈다.
처음에 진입하면서 지도를 만들어 둔 덕분이었다.
비공정 바깥으로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바람이 맹렬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저기 있군요."
안지홍은 적당한 곳에서 바람을 피하는 중인 공수부대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분의 낙하산을 들고 공략대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흔적을 보아하니, 여기서 교대로 야영하며 며칠째 대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공략대를 발견한 한 공수부대원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게 아닌가.
"다, 당장 내려가야 합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급발진을……."
모두가 영문을 모르고 전시영의 혼잣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곧바로 공수부대원의 말이 이어졌다.
"천공의 성이 추락하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