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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26화 (127/226)

1화

블라드 유진과 멸사공 사르판은 지척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왼손에 들린 천계도살검은 멸진부의 옆면과 맞닿아 있었다.

검신의 손잡이까지 푹 들어간 것처럼 보였으나, 도끼날의 반대편에는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다.

암자색 섬광은 상대의 등판에서 튀어나와 고고한 빛을 뿌리는 중이었다.

초근접전을 유도한 상태로 시공투절을 시전하여, 사르판의 몸속에 천계도살검을 쑤셔 박은 것이다.

아무리 단단하게 방어를 굳히고 있더라도 공간을 뛰어넘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바로 그 순간, 역할을 다한 천계도살검이 흩어지며 사르판 공작의 몸에 큰 구멍이 뚫렸다.

스핏! 투두두둑!

그러자 암청색 혈액이 상처 부위를 통해서 왈칵 쏟아져 나왔다.

본디 마계 공작의 강력한 마기가 담긴 피는 조금 흐르다 멈추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천계도살검의 재생 억제 옵션에 의하여 지혈이 전혀 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구멍이 난 그대로 피가 마구 쏟아지는 것이다.

"이, 이런 수법을 쓰다니……."

사르판은 천계도살검에 관통당한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초월적인 감각으로 이미 웜홀이 생길 만한 위치에서 벗어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블라드 유진의 끈질긴 공세에 묶인 탓에 도무지 피할 겨를이 없었다.

상대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그렇다고 유진의 상태가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했다. 조금만 더 깊게 들어왔으면, 내 심장도 파열되었을 거야.’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던 만큼, 유진도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찌걱! 우드득!

사르판이 손목을 움찔거리며 멸진부를 내리누르자, 그의 어깨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더니 도끼날에 반 이상 갈라진 왼쪽 가슴팍을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어깨에 작렬한 멸진부는 거의 심장을 가를 정도로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오른손으로 펼친 소수혈인이 멸진부의 침범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몸이 그대로 쪼개져 버렸을 것이다.

심장에 구멍이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르판 공작의 완력은 여전히 무지막지했다.

하지만 녀석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건 금방이었다.

천계도살검에 깃든 마기가 놈의 육신을 타락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빌어먹을 정도로 지독한 힘이로구나."

으드득!

이를 악물며 안간힘을 쓰던 사르판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심장이 꿰뚫렸다지만, 마계 공작의 육신은 고작 이따위 타격에 붕괴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재생 억제에 더불어 격의 타락까지 이어지니, 놀랍게도 신체가 말초부터 부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천계도살검의 타락 능력은 존재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었다.

마기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마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치짓! 치지직!

"크흐으으."

사르판 공작의 낮은 신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멸진부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글거리던 검붉은 마기가 힘을 결속하지 못하고 사그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멸진부는 평범한 크기의 도끼로 변해 버렸다.

쩍!

그러자 유진의 상체 깊숙이 박혀 있었던 도끼날이 저절로 빠져나왔다.

투두두두둑!

순간적으로 다량의 혈액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재빨리 지혈을 시도했다.

피의 권능을 응집시켜 큰 줄기의 출혈부터 막은 것이다.

털썩!

블라드 유진이 지혈에 집중하는 동안, 사르판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벌써 붕괴가 상당 부분 진행되어 다리의 절반가량이 가루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철컹!

그뿐이랴, 손도 이미 조각조각 흩어지는 중이라 멸진부마저 놓친 상태였다.

이제 사르판 공작의 눈에서는 더 이상 번들거리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자는 희뿌연 위쪽의 결계 어딘가를 응시하며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을 이루지도 못하고 끝나다니."

워낙 나지막이 읊조린 목소리라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진은 죽어 가는 놈의 유언 따위를 들어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피의 권능이 왕창 소진되었기에, 육신을 복구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은 대충 지혈만 해 놓는 것에 그쳐야 했다.

놀랍게도 아직 멸사공 사르판의 마기가 남아서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그는 최후의 순간에 사르판이 응시하던 반투명한 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윽고 블라드 유진의 눈꺼풀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심각한 부상과 체내에 잔존하는 사르판의 마기로 인해, 일종의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수마(睡魔)가 몰려들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오른팔로 눈을 가렸다.

‘아, 나 아무 데서나 잠 못 자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빠지려는데, 문득 유진의 앞에 웬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스윽!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기절한 그의 근처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였다.

북쪽 성문에서 안지홍에게 거대한 낫을 휘두르려는 순간, 녀석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느낌이 백작급 마족의 예리한 감각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드로는 부지불식간에 사르판의 위기를 깨닫고, 부랴부랴 날아와 결계를 통과한 참이었다.

그러자 부스러지다 만 사르판과 쓰러진 블라드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안지홍을 끝장내는 것도 멈추고 달려왔지만, 상황은 벌써 끝나 있었다.

반밖에 남지 않은 사르판의 몸에 손을 대 본 페드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자신의 상관 멸사공 사르판은 이미 차디찬 주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윽! 척!

바닥에 떨어진 멸진부를 집어 든 페드로는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녀석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유진이 누워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잘도 멸사공 전하를……."

페드로는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주시한 채 멸진부를 들이밀었다.

아무래도 무방비 상태인 블라드 유진을 죽여, 상관의 복수를 할 작정인 듯했다.

번―쩍!

높이 솟구친 큼지막한 도끼날은 순간적으로 섬뜩한 빛을 토해 냈다.

마기를 뿜어내며 허공에 잠시 멈췄던 멸진부는 페드로의 분노를 가득 담은 채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일격에 그의 목을 끊어 버릴 듯한 기세로 말이다.

후우우웅! 찌릿!

그런데 문득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도끼질을 가하려던 녀석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갑자기 공격을 중단한 것이다.

멸진부는 유진의 목울대와 거의 딱 붙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정지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안 되지. 안 되지. 언제부터 백작급 마족 따위가 고대룡의 유희를 방해할 수 있었나."

"……."

어디선가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페드로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붉은 머리칼의 미남자가 녀석의 눈에 들어왔다.

기척도 없이 접근한 상대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멸사공 사르판보다도 더욱 흉포하고 강력한 기운이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페드로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맹약을 지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직접적으로 마족을 치지만 않으면, 맹약을 깬 게 아니지. 하지만 내가 먼저 공격당한다면?"

죽음의 위기에서 블라드 유진을 구한 건,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던 엔세데스였다.

수만 년을 살아온 고대룡답게 상당한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온 상태였다.

화룡왕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멈춰서자, 페드로는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전신을 내리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힘겹게 입을 열며 엔세데스의 말에 답했다.

"맹약이 깨지지는 않지만, 제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렵겠지요."

화룡왕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래도 넌 대가리가 좀 돌아가는 놈이로구나. 하긴 그러니 이 아사리판에서 잽싸게 몸을 빼냈겠지."

"저는 그저 공작 전하가 걱정되어……."

"그래. 그래. 그랬겠지. 아! 어찌 보면, 네놈 상관과 비슷한 짓을 한 거로군. 역시 끼리끼리 모인다는 건가."

"더 이상의 모욕은 삼가시죠."

상당히 뒤틀린 언사에 페드로는 표정을 굳히며 이를 악물었다.

실제로 사르판의 휘하에는 파격적으로 승진한 마족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멸사공 군단은 항상 충성심을 의심받곤 했다.

초설공 트라시스가 전사하고 난 이후에 급조된 군단이라, 좋지 않은 평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저만치 밑에 있던 녀석들이 운 좋게 올라오면, 아니꼬운 시선이 붙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엔세데스는 멸사공 군단이 근본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호오. 반응이 상당한데? 보통은 격하게 부정하는 놈들이 범인일 확률이 높지. 네놈은 어떤지 궁금하군."

"뭐가 궁금하다는 말씀입니까?"

"전사한 상관의 복수를 위해서 무기를 휘두를 것인지, 그걸 묻는 거야."

"……."

"자, 선택의 시간이다. 복수를 완성할 것이냐? 이대로 물러날 것이냐?"

화룡왕이 팔을 양쪽으로 펼치며 소리 높여 질문하자, 페드로의 이마에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멸진부로 블라드 유진의 목을 노리려는 순간, 녀석의 몸뚱이는 사르판과 똑같이 변해 버릴 것이다.

용마대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저 무지막지한 고대룡에 의해서.

한 번 더 마른침을 삼킨 페드로는 바닥에 누운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엔세데스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 도끼는 가지고 가. 뭐라도 들고 가야 다른 데서 받아 줄 거 아닌가."

"……."

자신의 손에 들린 멸진부를 힐끔 바라본 녀석은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페드로는 곧장 반투명한 결계를 통해서 지상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북쪽 성문을 공략하던 마족 군단이 가장 먼저 병력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 * *

[최종 보스 ‘멸사공 사르판’을 쓰러뜨렸습니다.]

[심각한 피해를 본 마족 군단이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모든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아쉽지만 도전자들의 승리입니다.]

[운명의 방으로 되돌아가는 차원문이 생성되었습니다.]

"어? 노, 놈들이 물러간다!"

"잠깐만, 홀로그램 메시지를 보라고! 우리가 이겼어!"

사력을 다해서 요새를 지키던 공략대원들은 양손을 번쩍 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쿠구구구구!

그러자 위쪽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반투명한 결계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말끔한 하늘이 보이자, 공략대원들은 더욱 소리 높여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들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우! 척!

그때, 그런 그들의 앞에 웬 붉은 머리의 미남자가 불쑥 내려서는 게 아닌가.

결계가 사라지면서 낙하하던 블라드 유진을 마법으로 낚아챈 엔세데스였다.

녹턴은 두 사람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불안한 투레질을 반복했다.

"푸르르!"

화룡왕은 그의 몸을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고,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자 공략대원들의 시선이 엔세데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아니, 당신이 왜 이 사람을 데리고 있어?"

"부상이 중합니다. 얼른 조치해야겠어요."

그 모습을 본 전시영과 루시아는 한달음에 달려와 유진의 상태를 살폈다.

피는 흐르지 않았지만, 뼈가 훤히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가 어깨부터 가슴팍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사이 루시아가 얼른 폰시아노를 데리고 왔다.

그의 몸 상태를 살피던 성기사대장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양손을 모았다.

"어서 치료해야겠습니다."

"빨리요!"

"예."

츠츠츠츠츠!

폰시아노가 치유 능력을 발휘하자, 새하얀 빛무리가 블라드 유진의 어깨로 스며들었다.

팅!

그런데 상처를 수복해야 할 신성력이 되레 외곽으로 튕겨 나오는 게 아닌가.

"음? 이거 왜 이러는 거지?"

폰시아노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번 치유 스킬을 시전했다.

츠츠츠츠츠! 팅!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성기사대장이 치료에 실패하자, 이번에 나선 건 다이애나 로즈였다.

티딩!

하지만 그녀의 스킬 또한 그의 상처에 스며들지 못하고, 속절없이 튕겨 나왔다.

다이애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폰시아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성기사대장이라고 해서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신성력은 물론이고 치유 능력 자체가 듣지 않는 몸이라니, 세상에 이런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득 치료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엔세데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거 아무 소용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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