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슈화아아악! 콰칭!
"크윽!"
멸사공 사르판은 신음과 함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블라드 유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 암자색의 날렵하게 생긴 검의 위력은 어떠한가.
고농축 마기의 결정체인 멸진부로 막아 냈음에도 내장이 둥둥 울리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이제껏 정면 대결에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용마대전에서 맞붙었던 고대룡보다 더 위력적이군."
무지막지한 충격이 전신을 뒤흔들었지만, 사르판 공작은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가 펼치는 검술의 위력이 강하다고 해서 물러서기에는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의 사르판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초설공 트라시스를 거론해 대는 지구의 애송이 녀석을 상대로 도망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까짓 이쑤시개 같은 검! 내 도끼로 박살 내 주마! 크아아압!"
사르판 공작은 괴성과도 같은 기합을 지르며 멸진부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한편, 유진은 EX급 최대 수치로 증가한 힘을 온전히 공격에 쏟아붓고 있었다.
‘5분 정도 남았군. 그 안에 무조건 끝내야 한다.’
천계도살검과 마신강림은 둘 다 지속 시간 10분에 재사용 대기가 3시간인 스킬이었다.
지속 시간이 끝나면, 그때부터는 급격하게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궁극 스킬 중 두 가지가 사라진 채로 나머지 전투를 이어 가야 했으니까.
시공투절의 지속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 있긴 하겠지만, 마계 공작을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할 터였다.
스슥―! 스피잉!
그는 폭풍처럼 검술을 펼치다가 대뜸 허공에 천계도살검을 쑤셔 박았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사르판은 대번에 회피 동작을 펼쳤다.
그러자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암자색 섬광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사르판 공작은 핏발선 눈으로 블라드 유진을 노려보면서 냅다 멸진부를 휘둘렀다.
쿠후우웅!
기습적으로 시전되는 시공투절이 부담되어서 그를 잠깐 떼어 놓으려는 의도였다.
그와 동시에 그자는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크으으! 이 자식이 잘도 이따위 잔재주를? 그러고 보니, 네놈이 어떻게 이 기술을 쓸 수 있는 거지?"
처음에는 부지불식간에 펼쳐진 시공투절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지닌 천계도살검이 공간을 꿰뚫자, 사르판은 스킬의 정체를 깨닫고 말았다.
피의 제왕 키에리 라비에스가 지닌 능력이 바로 웜홀을 만들어 엉뚱한 방향에서 공격하는 거였으니까.
사르판은 마계 서열 6위에 해당하는 멸사공이었으니, 마왕 키에리의 기술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대응하는 게 쉬워지는 건 아니었다.
스슥―! 콰치지지징!
"이익!"
재차 시공투절이 전개되며 천계도살검이 갑자기 튀어나오자, 사르판 공작은 잽싸게 멸진부를 뒤로 돌렸다.
가까스로 검격을 막아 낼 수는 있었지만, 놈이 펼치던 부법(斧法)은 흐름이 끊겨 버렸다.
그러다 보니, 유진을 제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르판은 수세에 몰려 수비 일변도로 전투를 풀어 나가고 있었다.
"이, 이렇게 될 줄이야……."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동작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유려하면서도 간결하고, 쾌속무비한 블라드 유진의 검술은 대응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그뿐이랴, 힘으로 밀어붙이려 해도 천계도살검 자체의 위력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사르판 공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검격을 차단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렇다고 궁지에 몰린 채 방어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비를 굳히는 순간부터 마계 공작의 자존심은 바닥에 처박힌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결국에 녀석은 검붉은 마기를 극한까지 끌어 올리며 괴성에 가까운 기합을 내질렀다.
"크아앗! 진천폭뢰(振天爆雷)!"
쿠르르르! 쿠콰콰콰콰쾅!
멸진부를 높이 들어 올리자,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쪽도 반투명한 결계로 막혀 있었지만, 기운을 선별적으로 통과시키는 기능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페드로와 샤르마 또한 결계를 통과하여 아래쪽으로 내려가지 않았던가.
번득이는 붉은 뇌전이 연이어 떨어지자, 결계 내부 공간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콰칭! 쑤화아아아!
낙뢰가 바닥을 강타할 때마다 결계의 파편이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갔다.
마치 클레이모어 지뢰 수십 개를 동시에 터트린 듯한 느낌이었다.
초음속으로 쏘아지는 단단한 파편에 얻어맞았다간 결단코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일반적인 물질도 아니고, 진천폭뢰의 붉은 뇌전이 가득 담긴 파편이었으니까.
‘방어에 시간을 써야 한다니, 거슬리는 기술이로군.’
티디디디딩!
블라드 유진은 천계도살검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 붉은 파편들을 휩쓸 듯 한꺼번에 쳐 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발을 놀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파편을 막아 내는 순간에도 사르판의 진천폭뢰가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콰칭! 쑤화아아아!
뇌전에 의하여 결계의 상단부가 부서지며 재차 파편이 튀었다.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하여 쏟아진 상황이었으나, 낙뢰는 끝날 줄을 몰랐다.
그는 홀로그램을 힐끔거리며 재빨리 스킬의 지속 시간을 확인했다.
[천계도살검 : 2분 4초.]
[마신강림 : 2분 4초.]
[시공투절 : 12분 20초.]
벌써 유진의 궁극 스킬 중 두 가지가 2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왠지 불안한데.’
지속 시간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전투는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생각 외로 사르판의 대처가 훌륭했기에 벌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도발로 인해 눈이 돌아간 상황.
그는 블라드 유진을 때려눕히기를 원하고 있었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싸움은 단기 결전으로 치달으리라.
그런데 진천폭뢰를 마구 쏟아 내던 사르판 공작이 문득 멸진부를 거두며 물러나는 게 아닌가.
‘빈틈인가.’
맹공이 멈추자, 이제 그에게 검술을 펼칠 여유가 생겼다.
바로 그때, 사르판 공작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폭발적으로 도끼질을 쏟아 내던 공격 패턴이 한순간에 차분한 방식으로 변모한 것이다.
유진이 잠깐의 여유를 느낀 건 그저 거칠게 퍼붓는 공격이 정교해짐으로써 생긴 공백일 뿐이었다.
쉬이이익! 터더더더덩!
동작이 간결해지자, 찰나에 들어오는 공격 횟수는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아예 멸진부가 서너 개로 늘어나 보일 정도였다.
검붉은 마기의 향연이 이어지는 틈으로 상대의 얼굴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
‘웃어?’
분명 사르판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흥분을 가라앉힌 상대가 자신의 약점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정교한 부법을 펼칠 리가 없었다.
[천계도살검 : 1분 20초.]
[마신강림 : 1분 20초.]
[시공투절 : 11분 36초.]
슬쩍 시선을 돌리자, 마신강림이 1분 20초가량 남았다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좋지 않아. 놈은 평정을 되찾았다.’
초설공 트라시스의 비사를 통한 도발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터였다.
그 정도로 절제력이 없는 자가 마계 공작의 임무를 다할 수는 없을 테니까.
멸진부와 천계도살검이 연신 공방을 나누고 있었으나, 블라드 유진은 아무런 진전도 얻을 수 없었다.
그저 서로가 막고 막히는 수만 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이어지자, 점점 여유로워지는 건 사르판 공작 측이었다.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마계 공작의 무력은 단시간에 넘어설 수 없는 수준이었다.
‘빈틈이 없군.’
작정하고 소모전에만 집중하자, 3천에 달하는 레벨로도 압도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뭔가 상대의 정교한 부법을 깰 만한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비슷한 계열의 마기만 사용해서는 압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더니, 찬란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둥그런 것이 허공을 가르자, 사르판은 반사적으로 그 물체를 쳐 냈다.
쉬이익! 카아앙!
"읏!"
그런데 간결하게 후려갈겼던 멸진부의 도끼날이 서너 조각으로 박살 나 버리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녀석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충격과 함께 둥그런 물체가 옆으로 살짝 튕겨 나가면서 강렬한 신성력을 뿜어냈기 때문이었다.
"그건 카이넬의 투구? 허! 이젠 별걸 다 무기로 사용하는……. 허억!"
헛웃음을 지은 사르판 공작은 도끼를 둘로 나누려다가, 대경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대뜸 새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직선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휘리리리릭! 터엉!
유진이 날린 건 시련의 결정체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카이넬의 성검이었다.
이번에는 성검을 직접적으로 사용한 게 아니라, 폼멜만 잡고 그냥 집어던진 것에 불과했다.
회전하며 날아간 성검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창출된 거였다.
사르판은 카이넬의 투구를 후려갈기고, 성검을 피하느라 균형을 제대로 잃었으니까.
스윽!
암흑화를 시전하며 미끄러지듯 이동한 블라드 유진은 사르판 공작의 빈틈을 향해서 천계도살검을 내질렀다.
콰칭!
"크흡!"
하나밖에 남지 않은 멸진부를 놀려서 간신히 방어해 냈지만, 사르판의 위기는 끝난 게 아니었다.
휘청거리는 상태에서 검격을 받아 내다 보니, 더더욱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신체 균형이 무너지고 손발이 어지러워지면, 당연히 정교한 부법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까짓 꼼수로 날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멸진광풍!"
쿠콰콰콰콰!
사르판 공작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처럼 거칠고 위력적인 공격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놈의 손에는 멸진부가 하나 더 들려 있었다.
멸진광풍을 전개하며 도끼를 두 개로 분열한 모양이었다.
무지막지한 광풍이 일어나자, 따라붙으며 공격을 퍼붓던 그가 되레 수세에 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곁눈질로 홀로그램 글귀를 확인하는 유진의 눈빛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천계도살검과 마신강림의 지속 시간이 30초 남았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돼.’
콰가가각! 쩌저정!
멸진부의 막강한 위력에 천계도살검이 연신 튕겨 나왔지만, 블라드 유진은 우직하게 밀고 들어갔다.
수십 미터 길이의 도끼가 코앞에서 춤을 추고 있음에도 그는 모든 공격을 쳐 내고 있었다.
거리를 좁히자 이제 시공투절을 전개하는 건 어렵기 그지없었다.
단 한순간도 멸진부를 튕겨 내지 않으면, 그대로 몸통이 썰려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크하아아! 멸진광풍!"
쿠콰콰콰콰콰!
사르판 공작이 괴성과 함께 스킬을 발동하자, 검붉은 도끼에서 칼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밧!
날카로운 바람에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있음에도 유진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계도살검과 마신강림의 지속 시간이 10초 남았습니다.]
[9초.]
[8초.]
[7초.]
……
홀로그램은 계속해서 경고 문구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에 초읽기가 1초에 다다르자, 그는 눈을 부릅뜨며 전방을 향해 천계도살검을 쑤셔 넣었다.
"뛰어넘고 끊어 낸다."
스슥! 콰직! 쩌억!
그러자 무언가가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와 묵직한 타격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