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24화 (125/226)

24화

한편, 공략대의 전투는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S급 헌터들이 강력한 스킬을 쏟아부은 덕분에 마족 군단은 공성전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상태였다.

더불어 벌써 30분이 넘도록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지만, 공략대원들은 큰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이게 다 다이애나 로즈의 광범위 버프 능력 덕이었다.

"저거 되게 좋으면서도 짜증 나네. 쓰는 사람이 별로여서 그런가."

에너지 회복 속도 증가와 피로 감소 효과를 만끽하던 전시영은 문득 입술을 삐죽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블라드 유진에게 꼬리치는 듯한 다이애나의 행태가 떠올라, 버프마저도 불쾌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마족 군단을 한바탕 쓸어버리고 올라온 루시아가 핀잔을 툭 던졌다.

"딴짓할 시간 있으면, 스킬이나 한 방 더 갈기죠?"

"아, 재사용 대기 몰라? 이미 다 썼는데 어떡해."

"스킬 없으면 내려가서 육탄전이라도 하라고요."

"난 육체파가 아니라서 말이야. A급 애들이 잘 막고 있네. 뭐."

마치 놀고 있는 것처럼 말했지만, 전시영은 훌륭하게 자기 몫을 해내는 중이었다.

그녀가 초열지옥을 터트려 골로 보낸 마족만 거의 천 단위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농을 주고받을 만한 여유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결계 위쪽에서 큰 진동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두 인형이 아래로 불쑥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바로 천공의 성을 기획한 백작급 마족, 페드로와 샤르마였다.

상공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두 마족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마족 군단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S급 헌터들을 방해하며 마족들이 성문을 공격하기 쉽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시영과 루시아가 맡은 성문 쪽으로 다가온 자는 일전에 맞붙은 적이 있었던 샤르마였다.

"오호호호홋! 또 만나는구나. 애송이들."

듣기 싫은 고성의 웃음소리에 두 사람의 얼굴은 와락 구겨졌다.

"저 괴상한 여자를 여기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떻게 우릴 따라올 수 있었던 거죠? 설마 공략대원으로 위장해서 잠입한 건가?"

"그럴 리는 없지. 여기 온 헌터들은 신분이 확실하다고."

"그럼 천공의 성을 만든 존재가 저들일 수도 있단 말인가요?"

"음……."

전시영과 루시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직 마계와 마족들의 정체는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쨌거나 저 마족 군단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군."

놀랍게도 샤르마는 최상급과 상급 마족들을 조종하여 체계적으로 요새를 공략하는 중이었다.

지휘관이 가세한 덕분인지, 마족 군단의 공세는 이전보다 더욱 거세진 상태였다.

휘리리릭! 터덕! 콰아아앙!

암녹색 구체가 날아들어 폭발하자, 성문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두꺼운 금속 성문이 안쪽으로 움푹 들어갈 정도로 강한 폭발력이었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서로를 힐끔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로군요."

"가자."

타닷! 슈화아악!

두 사람은 성문 방어를 A급 헌터들에게 맡기고, 샤르마를 견제하기 위해 나섰다.

S급 헌터가 둘이나 빠지자, 성문의 방어는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지막지한 폭발의 원흉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성문이 뚫리면 마족 군단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지 못한 공략대는 전멸하고 말 테니까.

문제는 지난번에 S급 세 명이 협공했음에도 샤르마를 이길 수 없었다는 거였다.

지금은 조나단 잭슨 없이 전시영과 루시아의 힘만으로 저 괴상한 여자를 쓰러뜨려야 했다.

"오호호호! 학습 능력이 없는 인간들이로구나. 프래그 블라스트!"

휘리리릭! 쉬쉭!

샤르마가 채찍을 휘두르자, 두 개의 암녹색 구체가 성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바로 그 순간, 전시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검지를 강하게 내뻗었다.

"초열지옥 역풍!"

삐이이이―! 콰아아앙!

그러자 빠른 속도로 날아들던 암녹색 구체의 사이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가장 발동이 신속한 초열지옥 역풍을 펼쳐서 프래그 블라스트를 막아 낸 것이다.

"허!"

샤르마는 순간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의 공격이 시작도 하기 전에 터져 버릴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프래그 블라스트가 점착하기 전에 강한 힘을 가하자, 놀랍게도 폭발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는 오랫동안 스킬을 사용해 왔던 샤르마조차도 알지 못했던 약점이었다.

"후후! 우리가 널 조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연구를 했는지 알아? 훗! 어디 마음껏 쏴 보라고. 전부 차단해 줄 테니까."

전시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노란색 구체를 띄워 올렸다.

다음번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서 초열지옥 스킬을 미리 시전해 둔 것이다.

샤르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전시영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CCTV를 오지게 돌려 봤지. 근데 너 너무 방심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음?"

전시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위쪽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내리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을 감지한 샤르마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채찍을 강하게 휘둘렀다.

급박한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펼친 대응이었지만, 동작은 매우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허공에 육신을 띄운 것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텔룸 콩쿠수스(tēlum concúsus)!"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루시아가 자루를 양손으로 잡고 창날을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슈화아아악! 콰칭!

"크읍!"

원래 텔룸 콩쿠수스는 거대한 빛의 화살을 쏘아 보내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에너지의 발출을 끝까지 억제한 상태로 샤르마를 후려갈겼다.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상대의 무기가 채찍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무기로는 체중이 제대로 실린 공격을 막아 내기가 어려웠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회피 동작을 펼치느라 몸을 띄운 상태가 아니었던가.

터엉!

"커헉!"

바닥에 쑤셔 박힌 샤르마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끊어진 채찍을 쳐다보았다.

어찌어찌 깃발 창을 막아 내긴 했지만, 무리한 방어로 인해 무기가 박살 난 것이다.

게다가 루시아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샤르마의 어깨가 흔들리며 음산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으흐흐흐! 이것들이 내 뒷조사를 좀 했나 보군. 어디 그럼 이것도 알아냈나 볼까?"

츠츠츠츠츠!

암녹색 기운이 상대의 전신을 감쌌지만, 루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속타를 먹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깃발 창이 채 절반도 휘둘러지기 전에 샤르마의 몸에서 시뻘건 광채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크크크! 매스 인시너레이션(Mass Incineration)."

기이이잉! 번―쩍!

순간적으로 가해진 기파(氣波)에 루시아의 신형은 뒤로 쭉 밀리고 말았다.

이윽고 응축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분출되자, 샤르마를 중심으로 초고온의 열과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쿠화아아아앙!

초열지옥 역풍이나 프래그 블라스트의 폭발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크흐으!"

루시아는 재빨리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열기는 큼지막한 암석마저도 순식간에 조각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초열지옥 연쇄역풍!"

삐이이! 삐이이! 쿠콰콰콰쾅!

전시영이 준비해 두었던 스킬을 써서 에너지를 상쇄해 보려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연쇄역풍은 매스 인시너레이션에 잡아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대로라면 성문은 물론이고 요새 전체가 저 엄청난 열기에 휘말리고 말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성벽 안쪽에서 백색 서기가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새하얀 파도는 매스 인시너레이션을 상쇄하며 범위를 빠르게 늘려 갔다.

쉬이이이잉! 치이이이익!

"구원의 물결!"

불현듯 뒤를 돌아보니, 다이애나 로즈가 빛나는 오른손을 쳐들고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광범위 버프에 이어 대폭발을 상쇄하는 방어 스킬까지 펼쳐 준 것이다.

아무래도 이쪽의 전투를 지금껏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시영은 왼손으로 엄지를 들어 보이며 곧장 다음 스킬을 준비했다.

"초열지옥 역풍!"

공격력은 십지폭쇄가 가장 강했지만, 스킬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일 발동이 빠른 역풍을 택했으나, 기회를 창출하기에는 충분한 위력일 터였다.

삐이이―! 콰아아앙!

고주파 음이 미약하게 울려 퍼지는 순간, 샤르마의 코앞에서 샛노란 섬광과 함께 대폭발이 일었다.

"크헉!"

매스 인시너레이션에 의해 반감되었지만, 상대를 넘어뜨리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샤르마가 뒤로 벌렁 나자빠지자, 쏟아져 나오던 강렬한 열기가 극도로 줄어들었다.

그러자 루시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전진하며 깃발 창을 내질렀다.

아직도 창날에는 빛의 화살이 장전된 채 뇌전을 뿜어내고 있었다.

"죽어라!"

푸욱!

깃발 창은 상대의 왼쪽 가슴을 그대로 관통했다.

"크흐으……."

창날이 등 뒤로 뚫고 나오자, 매스 인시너레이션의 열기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샤르마의 눈에서 빛이 급격하게 사라져 갔다.

승리를 확신한 루시아는 깃발 창을 뽑아내려 했다.

턱!

그런데 문득 고개를 떨구었던 샤르마가 창대를 덥석 붙잡는 게 아닌가.

"끝, 나지……. 않았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루시아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큰 위험에 처할 것만 같았다.

푸확!

잽싸게 깃발 창을 회수하며 뒤로 몸을 날리려는데, 비릿한 미소를 지은 샤르마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런……!"

쿠화아아앙!

* * *

"허억! 헉! 젠장……."

선전하는 남동쪽 성문과는 달리, 북쪽의 상황은 심각할 정도로 기울어 있었다.

페드로라는 S급 비인가 헌터가 전투에 개입하면서 모든 것이 어그러진 것이다.

놀랍게도 대마초를 입에 문 남자의 낫질에 프랑스의 S급 헌터 구스타브 아말릭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게다가 레프는 얼굴에 사선으로 큼지막한 상처가 생겼다.

페드로의 암청색 낫이 왼쪽 안구 위를 거침없이 가르고 지나간 탓에, 한쪽 시야가 완전히 상실되었다.

패배의 이유는 간단했다.

기습당하는 바람에 성벽 위에서 정신없이 활을 쏴 대던 아말릭이 초장부터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방심하면 죽는 수밖에 없지."

스윽!

대마초 필터를 옆으로 뱉어 낸 페드로는 이내 사라지듯 모습을 감춰 버렸다.

마치 투명 망토라도 쓴 것처럼 완벽하게 은신한 것이다.

"빌어먹을……."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무기를 들었다.

자꾸만 시야를 가리던 핏물은 힐러의 치유 능력에 의해 지혈되었으나, 파열된 왼쪽 안구는 그대로였다.

한쪽 눈으로만 저 신출귀몰한 암살자를 찾으려니, 어렵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크아악!"

비틀거리며 성벽 뒤편을 바라보니, 북쪽 성문을 지원하기 위해서 달려오던 안지홍의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안지홍은 왼팔이 잘린 채로 바닥을 나뒹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페드로가 암청색으로 번들거리는 낫을 들고 서 있었다.

"저 개자식이 어느새 저리로!"

레프는 불같이 화를 내며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조금만 빨리 움직이면 안지홍을 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페드로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훨씬 기민했다.

암청색의 거대한 낫이 마치 단두대처럼 높이 들어 올려졌다.

"이, 이런!"

여차하면 무기라도 던져서 구해 보려고 했지만, 무리하게 움직이느라 얼굴의 상처가 재차 터지고 말았다.

피가 왈칵 쏟아져 흐르자, 레프는 황급히 눈두덩이를 닦으며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하지만 이미 페드로의 낫은 낙하를 시작한 상태였다.

"안 돼!"

레프가 소리치며 이판사판으로 무기를 던지려는 순간.

두우우웅!

하늘을 뒤덮은 반투명한 결계에서 묵직한 충격파가 번져 나오더니, 페드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놈은 암청색 낫을 늘어뜨린 채, 위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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