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초설공 트라시스.
이는 5백 년 전 용마대전에서 전사한 마계 공작의 이름이었다.
유진의 입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이름에 사르판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전사한 사르판의 상관이 바로 초설공 트라시스였으니까.
트라시스는 삼공작 가운데 가장 강한 자였으나, 용마대전 중 고대룡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고대룡 둘의 목숨을 빼앗은 전적만을 남긴 채.
그 사건 이후로 사르판은 별다른 공적도 없이 멸사공에 추대되며 그 뒤를 이었다.
"네놈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살짝 떨리는 듯한 사르판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주변을 장악하던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더불어 블라드 유진의 전신을 찢어 발겨 버릴 정도로 강한 압박을 가해 오던 살기 또한 몇 배는 증폭되었다.
마치 분노가 실체화하여 그의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유진이 초설공 트라시스에 관해서 아는 건, 안테리오르 타워의 4층 보상 175456번째 회의록 덕분이었다.
마계 원로회의 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작은 책자였는데, 거기서 그는 두 마족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회의록은 사르판이 늦게 도착함으로써 트라시스가 전사한 건을 징계하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멸사공 추대에 관한 비사를 담고 있었다.
용마대전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었던 마계의 존재들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승진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초설공의 자리를 대신할 자가 전혀 없었다.
사르판을 제외한 초설공 휘하의 최상위 마족들이 거의 멸절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과오는 덮고 그자를 공작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사르판의 뒤에는 동급보다 부족하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실력의 증명에 목말랐고, 초설공 트라시스라는 이름에 기이한 열등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자격도 안 되는 주제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뭐, 뭣이?"
블라드 유진이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사르판의 얼굴은 악귀처럼 와락 일그러졌다.
멸사공 사르판은 양손에서 검붉은 마기를 길게 뽑아내더니, 도끼의 수를 두 배로 증식시켰다.
후웅! 후웅!
이제 맹렬하게 회전하는 도끼는 총 여덟 개가 되었다.
"내 앞에서 그따위 망발을 꺼내다니, 간담이 크다 못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로구나. 뒈져라!"
드드드드드!
사르판이 일갈하자, 요새 위를 뒤덮은 반투명한 결계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한계 이상의 압력이 전해져 마치 깨질 것처럼 요동치는 것이다.
‘평정심을 잃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다가,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의도치 않게 상대의 약점을 건드린 상황이었지만, 유진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극도로 강한 힘을 지닌 존재의 심혼을 흔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기회가 왔을 때 거침없이 붙잡는 것 또한 뛰어난 능력이었다.
"그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지?"
"다 알려 주면 재미없지 않나. 원한다면, 내 머릿속이라도 열어 보든가."
"크으으! 대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지. 진천단(震天斷)!"
사르판 공작이 손끝으로 그를 지목하자, 여덟 개의 멸진부가 동시에 쏘아지기 시작했다.
쒸이이이잉―!
원반 모양으로 변한 도끼들은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휘어지며 급격하게 꺾였지만, 놀랍게도 멸진부는 절대로 부딪치지 않았다.
물고기처럼 유기적으로 교차하며 목표가 이동할 수 있는 전 방위를 차단했다.
블라드 유진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짓쳐들어오는 거대한 원반들을 피해 몸을 움직였다.
저것들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쿠콰콰콰콰! 스핏! 스핏!
암흑화를 시전하며 신형을 좌우로 흔들자, 멸진부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공격은 섬전과도 같았으나, 그의 움직임은 더 빨랐다.
게다가 회전하는 도끼보다도 더욱 불규칙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돌아오는 건가.’
여덟 번의 멸진부를 모조리 피했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저 멀리 날아갔던 도끼들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며 재차 쇄도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척에서 마주한 멸진부의 위력은 가히 가공할 수준이었다.
하나라도 적중되었다가는 곧바로 위험에 처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수혈인으로 옆면을 후려쳐 보았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반탄력을 이미 느껴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후속타를 허용할 수도 있기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회피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타닥!
방향 전환을 위해서 바닥을 강하게 박찼던 유진은 문득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의 권능을 일으켜 제법 강하게 내리찍었음에도 마족들이 펼친 반투명한 결계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이거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소수혈인을 휘돌렸다.
지지지지직!
멸진부의 측면에 핏빛 칼날을 갖다 대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막강한 반발력이 발생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원반의 윗부분에 지그시 힘을 가하며, 부드럽게 팔을 돌렸다.
그러자 시시각각 변화하던 도끼의 궤도가 소수혈인을 따라 방향을 바꾸는 게 아닌가.
놀랍게도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르게 마구 휘던 멸진부의 움직임을 원하는 대로 유도하고 있었다.
쿠콰콰콰콰! 쩌어어엉!
맹렬하게 회전하던 도끼날은 반투명한 결계에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그러자 굉음과 함께 바닥을 이루던 결계 전체가 크게 출렁거렸다.
쩌적! 쩌저적!
동시에 멸진부의 마기에 균열이 가더니, 이윽고 산산조각으로 박살 나 버렸다.
‘됐다!’
단단한 결계의 방어력과 멸진부의 막강한 위력을 충돌시킨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애써 만들어 둔 마족들의 결계를 뒤흔들면서, 사르판의 도끼 하나를 소멸시킬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한 수로 유진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쒸이이이잉―!
아직 멸진부는 일곱 개나 남은 상태였고, 사르판은 오른손에 검붉은 마기를 뿜어내는 중이었다.
마치 소멸한 도끼 하나를 재생성하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놀랍군. 그런 방식으로 멸진부를 흘려보내다니. 하지만 그래 봐야 요행일 뿐……. 커흑!"
스슥! 푸화악!
새로운 멸진부를 만들어 내던 사르판 공작은 갑자기 복부를 부여잡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별안간 허공에 미세한 틈이 생기더니, 대뜸 시뻘건 칼날이 튀어나와 몸통에 쑤셔 박혔기 때문이었다.
사르판은 대경한 표정으로 복부에 꽂힌 칼날을 뽑아냈다.
그러자 핏방울이 떨어져 희미하게 빛나는 반투명한 결계 위를 암청색으로 물들였다.
쓰컹! 투두둑!
"이, 이건……."
그자의 몸에 박힌 것은 시공투절로 공간을 뛰어넘은 소수혈인이었다.
‘15분쯤 남았나.’
세 마족과 싸우면서 그는 이미 시공투절을 발동한 바 있었다.
권능 폭발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지속 시간은 이제 막 절반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이번 싸움에서 충분히 활용할 만큼 남았다고 할 수 있었다.
‘힘에 부치는군.’
한 번 블라드 유진의 검술에 당해 결계와 공멸한 탓인지, 멸진부의 움직임은 좀 더 역동적으로 변했다.
기습적으로 시공투절을 펼쳐서 도끼가 재생성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진천단이라는 전대미문의 유도 기술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 시선을 분산해야겠다. 그래야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 있어.’
[권능 폭발이 발동되었습니다.]
[1시간 동안 모든 스킬의 등급이 1단계 상승합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군압쇄’가 S급으로 적용됩니다.]
[천군압쇄로 30% 능력치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최대 생성량 100/100]
쓰스스스슥!
이번에 A급으로 성장한 천군압쇄는 25% 능력치를 지닌 분신을 40명까지 생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권능 폭발로 인해 S급이 되어 DK의 것과 마찬가지의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효의 분신을 만들어 상대의 눈을 어지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따위 술수가 통하리라고 생각하느냐? 진천단!"
쿠화아아앙!
하나, 같은 EX급에 해당하는 사르판 공작의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상대는 분신들을 깡그리 무시한 채, 정확히 유진에게만 멸진부를 보냈다.
하지만 아예 천군압쇄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부 때려 박아.’
그는 도끼날의 진행 방향에 소수혈인을 든 분신들을 왕창 밀어 넣었다.
쿠콰콰콰콰!
그들은 멸진부의 위력을 버티지는 못했으나, 속도를 다소 늦추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는 동안, 블라드 유진은 자신에게 날아든 검붉은 도끼에 핏빛 칼날을 갖다 대고 있었다.
지지지지직! 쩌어어엉!
두 번째 멸진부를 결계에 처박은 그는 제자리에서 연속으로 소수혈인을 휘둘렀다.
그러자 분신과 충돌하며 속도가 줄어든 도끼들이 부드럽게 회전하는 칼끝에 걸려들었다.
쩌어엉! 쩌저정! 푸캉!
무려 다섯 개의 멸진부가 연신 결계에 쑤셔 박히게 된 것이다.
드드드드드!
과도한 충격에 바닥이 뒤흔들리자, 사르판은 신경질적으로 오른팔을 펼쳤다.
빙글빙글 돌며 기회를 노리던 멸진부는 이내 상대의 등 뒤로 되돌아갔다.
지금 공격을 가해 봐야 그의 교묘한 검술에 걸려 결계에 처박힌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르판 공작은 탁자에 발을 올린 채 싸움을 구경 중인 엔세데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화룡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쉽지 않은 놈인 건 확실하군."
츠츠츠츠츠!
나지막이 중얼거린 사르판은 마기를 끌어 올리며 멸진부를 양손에 쥐었다.
그러자 이글거리던 검붉은 마기가 몇 배로 증폭되더니, 도끼날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손잡이는 작은데 무기는 엄청나게 큰 기형적인 모습이었지만, 움직임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만큼 사르판 공작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하다는 증거였다.
척! 투웅!
앞으로 슬쩍 발을 내디디자, 놀랍게도 사르판의 신형이 지워지듯 사라져 버렸다.
시공투절처럼 공간을 꿰뚫는 건 아니었지만, 거의 그와 비슷할 정도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마치 사라졌다가 불쑥 나타나는 모양새로 유진의 앞에서 튀어나왔으니까.
"내 도끼에 범벅이 되어 죽어라! 멸진광풍(滅盡狂風)!"
쿠콰콰콰콰!
사르판 공작이 도끼를 휘둘러 대자, 그야말로 미친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변한 도끼날은 결계든 뭐든 아랑곳하지 않고, 부딪치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렸다.
당연히 목표가 된 블라드 유진의 상황은 매분 매초가 위기였다.
츠리릿! 피싯!
도끼날에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그의 피부는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광풍에 뒤섞인 사르판의 마기가 유형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바람만으로도 이럴진대, 저 무지막지한 크기의 멸진부에 직격당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빈틈을 찾아야 하는데…….’
위기에 봉착했지만, 유진의 전의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도끼의 궤도를 파악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해서 그저 회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블라드 유진은 상대의 빈틈을 탐색하고 있었으니까.
하나, 심적으로 흔들린 상태임에도 사르판은 완벽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빈틈을 발견하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지고 말 터였다.
‘승부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순간적으로 붉은 안광을 빛낸 유진은 소수혈인을 허공에 띄우며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EX급 스킬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이 시전되었습니다.]
[EX급 스킬 ‘마신강림(魔神降臨)’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과 ‘마신강림’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5분간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최대 세 배로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된 레벨 3,000(EX).]
전력을 끌어모은 그의 몸에서는 시뻘건 피의 권능이 마치 증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천계도살검은 무려 10m 길이까지 늘어나,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다.
사르판의 멸진부보다는 훨씬 가늘고 짧았지만, 검에 담긴 위력은 결단코 아래가 아니었다.
블라드 유진은 눈앞으로 다가온 도끼날에 천계도살검을 불쑥 들이밀었다.
이전에는 어떻게든 정면 대결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태도였다.
콰칭! 투우웅!
시커먼 마기로 이루어진 두 무기가 격돌하자,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놀랍게도 그는 거대한 멸진부와 맞부딪치고도 태연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유진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빈틈을 보이지 마라. 제대로 싸움을 즐기기도 전에 널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