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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22화 (123/226)

22화

검붉은 마기로 충만한 계단을 밟고 내려선 자는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화룡왕 엔세데스의 드래곤 피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욱 흉포하고 잔악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쿠웅!

계단 끝을 가볍게 내디디는데,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음파가 터져 나온 게 아니라, 차원문을 열고 나온 존재가 발산하는 기세로 인해 그렇게 느껴진 거였다.

남자의 목소리는 실제로 작게 읊조리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그마저도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고, 공작 각하!"

"송구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샤르마와 페드로는 검붉은 기운에 휩싸인 남자를 향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공작(公爵)이라 불린 사내는 손끝으로 허공을 한 번 훅 훑었다.

그러자 마기가 마치 불꽃처럼 일렁이며 그자의 손을 휘감고 맹렬하게 타올랐다.

공작이란 자는 붉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칼, 마기가 넘실거리는 기다란 망토를 휘날리고 있었다.

관자놀이에서 돋아난 두 개의 뿔이 머리칼을 따라서 완만하게 휘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그자는 살아남은 백작급 마족 둘을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문득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엔세데스가 있었다.

화룡왕은 누구도 모르게 결계 위로 올라와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다.

공략대의 분투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블라드 유진과 백작급 마족들의 전투를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껏 나름 만족스러운 장면이 있었던 모양인지, 엔세데스는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희한하게 생긴 과일을 허공으로 튕겨 올려, 자신의 입 속에 떨어뜨렸다.

놀랍게도 공작은 그런 화룡왕을 향해서 대뜸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화룡왕 엔세데스."

"그러네. 한 5백 년쯤 됐나?"

둘은 이미 꽤 안면이 있는 듯, 스스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용마대전 이후로는 처음이죠. 긴 잠에 빠져들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슬슬 활동하시려나 봅니다?"

"원래는 좀 더 잘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누가 귀찮게 깨우더군."

어느새 엔세데스의 눈빛은 포악함을 한껏 담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그러자 화룡왕의 주변에서 기묘한 암청색 스파크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일대에 가득 들어찬 공작의 기세와 드래곤 피어가 충돌하며 일어난 현상이었다.

공작은 비릿한 미소를 띠며 평온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갔다.

"안타깝게 되었군요. 그나저나 맹약을 깨고 차원 간의 일에 개입하시려는 건가요?"

"하! 이것 참 기발하게 치사한 놈들이로구나.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으니, 너흰 맹약 위반과 상관없다. 이건가?"

엔세데스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상대를 쏘아보았다.

5백 년 전의 용마대전 이후, 마계와 드래곤 일족은 언령(言靈)을 통해 종전 협정을 맺었다.

더 이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말이다.

하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 마계는 당시의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야망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구의 헌터들을 마계와 엘칸 차원의 싸움에 끼어들도록 한 것이다.

천공의 성을 이루고 있는 시련은 마계가 껄끄러워하는 존재들을 처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공략대가 성공하든 말든 마족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곧장 마계의 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맹약은 지켜질 것이니."

"의외로군요. 억지라도 부리실 줄 알았는데요."

"난 구경이나 할 테니까, 어디 마음대로 해 봐. 5백 년 만에 깨어나서 그런지, 볼거리가 참 많군."

"퇴장을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용언으로 약속은 해 주셔야겠는데요."

"어려울 게 있나."

화룡왕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입도 벙끗하지 않고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약속하지.

투우우웅!

숨겨진 차원문을 찾아낼 때처럼 강력한 에너지의 파동이 허공을 마구 뒤흔들었다.

그러자 공작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제야 엔세데스에게서 시선을 떼려 했다.

한데, 문득 화룡왕이 술잔을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계속 말을 잇는 게 아닌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죠?"

"후후.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라고, 파괴와 멸망의 공작 사르판이여."

엔세데스가 공작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르판?’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그로서도 곧장 떠올릴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너무 스치듯 접한 이름이라서 그런 듯했다.

"……."

뭔가 약점을 찔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사르판 공작은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엔세데스는 허공에 띄워 올린 과일 하나를 날름 씹어 삼켰다.

사방이 그야말로 적막함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과육을 씹는 소리가 명확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죠."

화룡왕을 응시하던 사르판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블라드 유진을 쳐다보았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마계 공작의 존재감은 똑똑히 느껴지고 있었다.

‘승부를 점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다. 이런 놈들을 연달아 만나다니, 신선한 경험이로군.’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르판과 시선을 맞췄다.

단순한 느낌만으로도 난제임을 알아챘지만, 전투를 하기도 전에 그런 기색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상대의 방심을 끌어내는 수법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아쉽군. 이럴 때 관조 스킬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카이넬의 신안을 통한 관조는 이미 화룡왕에게 쓴 상태였다.

한 달 뒤에나 다시 사용할 수 있기에, 사르판 공작의 레벨을 알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객관적인 지표가 있다면, 그에 맞춰서 전략을 짜는 게 가능할진대.

그렇다고 화룡왕을 상대로 관조 스킬을 사용한 게 아깝지는 않았다.

덕분에 저 무지막지한 레드 드래곤에 관해서 잘 알게 되었으니까.

"너희들은 내려가서 각 군단을 지원하라."

사르판은 유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나직이 읊조렸다.

이는 퍼핏의 사체 근처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두 백작급 마족에게 한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러자 페드로와 샤르마가 상체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두 마족은 이내 반투명한 결계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후후! 백작 셋을 거의 가지고 놀다니, 재미있는 놈이로구나."

사르판 공작이 말을 걸자,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번쩍이듯 나타났다.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메시지창을 옆으로 치워 두었지만, 금방 가운데로 휙 되돌아왔다.

메두사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극도로 심각한 경고라 그런 것 같았다.

[파괴와 멸망의 주재자, 멸사공(滅私公) 사르판의 권능과 마주했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지고한 정신력이 사르판의 권능에 저항합니다.]

[디버프의 일부가 해제되고 지속 시간이 줄어듭니다.]

[현재 능력치 감소율 : 26%]

[사르판의 권능 지속 시간 : 50분]

‘메두사의 권능과 비슷한 수준이다.’

사르판의 권능은 메두사보다 능력치 감소율이 1% 높았고, 대신 지속 시간이 10분이 적었다.

전투가 아무리 길어도 1시간 이상씩 계속하기는 어려우니, 능력치 감소율이 높은 게 더 껄끄러웠다.

멸사공 사르판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강력한 디버프를 걸어 놓고 반응을 살피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그런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정도야 쉬운 상대지."

"호오? 상당한 자신감이로군. 하긴 수준이 되니까, 화룡왕께서 경고한 것이겠지."

"……."

"어디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후후후!"

사르판 공작은 옆으로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붉은 마기가 들불처럼 허공을 수놓더니, 거대한 도끼의 형태로 변했다.

족히 수십 미터가 넘어 보이는 무기를 한 손으로 가볍게 든 모습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마기로 이루어진 도끼는 엄청나게 무거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사르판은 장난감을 다루듯 도끼를 가볍게 휘둘렀다.

쿠후우우웅!

움직임은 깃털 같았으나, 그 일격에 실린 힘은 마치 폭풍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으로 맞부딪쳤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군.’

차원을 뒤틀어 버릴 만큼 강력한 에너지의 파동에 정직하게 달려드는 건 무모한 짓거리였다.

이렇게 넓은 면적의 무기를 상대할 때는 측면을 공략하는 편이 가장 좋았다.

물론 그건 어마어마한 속도로 쇄도하는 무기의 옆 부분을 가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유진은 소수혈인에 피의 권능을 잔뜩 밀어 넣으며 빠르게 몸을 날렸다.

태풍과도 같은 도끼질의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며, 계획한 대로 옆면을 후려갈기기 위해서였다.

스윽!

암흑화를 시전한 그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하고 신속했다.

소리도 없이 도끼날의 궤도에서 멀어진 블라드 유진은 곧장 소수혈인을 휘둘렀다.

동작은 사르판 공작과 마찬가지로 매우 간결했지만, 핏빛 칼날 또한 굉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푸캉―! 쩌저저저저정!

피의 권능을 잔뜩 머금어 8m 길이까지 늘어난 소수혈인이 도끼날의 옆면과 충돌했다.

그러자 일진광풍이 몰아치며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충격파가 쏟아져 나왔다.

초월적인 두 힘의 격돌로 인한 영향력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만한 수준이었다.

‘으읏!’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강한 압력에 그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반탄력만으로도 피의 권능이 흔들릴 만큼 충격이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흠……."

하지만 상대도 꽤 피해가 있었던 모양인지, 작게 침음을 흘리며 도끼를 거두었다.

아마 그가 측면을 후려치지 않았다면, 무자비한 연속 공격이 전개되었을 터였다.

저 무지막지하게 큰 도끼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걸 보면, 그럴 확률은 거의 100%에 가까웠다.

"이 정도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부하 녀석들이 고전할 만하군."

공격에 실패했지만, 멸사공 사르판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애초에 그저 간이나 보자는 의미로 가볍게 휘두른 일격일 뿐이었으니까.

"……."

블라드 유진이 아무런 대답도 없자, 상대는 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저 표정 변화일 뿐이었으나, 결과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사르판 공작의 주변을 난폭하게 흐르던 검붉은 마기의 흐름이 돌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그악스러운 기운이었으나, 지금은 마치 어딘가로 쏘아지기라도 할 듯 팽팽하게 당겨진 느낌이었다.

"죽으면 박제해서 예쁘게 전시해 주마. 내 수집품의 한가운데에 말이야. 멸진부(滅盡斧)."

드드드드드드!

수십 미터 크기의 거대한 도끼가 맹렬하게 진동하자, 사르판은 오른손을 우아하게 펼쳤다.

그러자 검붉은 도끼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돌연 두 개로 분열되었다.

스윽!

둘로 나뉘었지만, 크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만 아무런 손실도 없이 그대로 복제되어 증식한 듯한 느낌이었다.

스윽!

이윽고 도끼는 다시 한번 분열하여 네 개가 되었다.

멸사공 사르판은 나비의 날개처럼 펼쳐진 도끼를 둘러보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후웅! 후웅! 훙! 훙!

네 개의 도끼는 묵직한 파공성을 뿜어내며 빙글빙글 돌더니, 점점 회전에 속도를 더해 갔다.

그러다 회전 속도가 극에 달하자, 도끼는 마치 거대한 네 개의 원반처럼 변해 버렸다.

"때가 되었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가!"

사르판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뻘건 눈을 빛내자, 유진의 눈앞에 경고 문구가 불쑥 떠올랐다.

[멸사공 사르판의 마기가 극도로 증폭됩니다.]

[죽음이 눈앞으로 훌쩍 다가왔습니다.]

확실히 이번 건 막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문득 아무 말 없이 전투에 집중하던 유진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초설공(招雪公) 트라시스였나."

그저 작게 중얼거리는 음성이었음에도, 멸사공 사르판은 눈을 크게 부릅뜨며 공격을 멈추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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