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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21화 (122/226)

21화

아직 본격적으로 마족 군단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

결계 위에서 세 명의 백작급 마족과 대치하게 된 블라드 유진은 일단 녹턴을 돌려보냈다.

비행에 제약이 생긴 이상, 유령 군마를 타고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척!

그는 반투명한 결계 위에 발을 디뎠다.

마치 수많은 삼각형이 반복되는 듯한 형상의 결계는 엄청나게 단단하고, 충분한 마찰력이 있었다.

지면과 마찬가지로 이 위에서 운신하는 건 문제없을 것 같았다.

"둘로는 안 되니까 셋이 나온 모양인데……. 고작 그런 거로 날 이길 수 있을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자, 샤르마가 녹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네놈의 능력에 관해서는 파악이 끝났다. 지금은 그 비정상적으로 강한 사생아도 없지 않나."

샤르마가 말하는 사생아란, 최후의 다크 엘프 암살자 레니를 뜻하는 거였다.

레니는 S급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하는 능력치를 지닌 동반자로, 천즈한과의 싸움에서 훌륭하게 본분을 수행한 바 있었다.

무려 SS급으로 예상되는 백작급 마족의 발을 묶어 둘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

녹턴 또한 S+등급이었지만, 전투 능력은 레니보다 심히 뒤떨어졌다.

녀석은 기본적으로 탈 것에 해당하는 동반자기 때문이었다.

보조적인 역할밖에 수행할 수 없으니, 이 싸움에는 아예 끼지 않는 게 나았다.

둘러쳐진 결계 안에서 유진은 오롯이 혼자서 세 명의 백작급 마족과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저들이 미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날 아직 게일드 백작과 싸웠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일반적으로 헌터들은 몬스터를 잡아서 경험치를 쌓거나, 에너지 코어를 사용해 레벨을 올렸다.

초반에는 에너지 코어의 효율이 높았다.

하지만 C급부터는 가성비가 극단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에너지 코어는 엄청나게 비싸지는데, 올릴 수 있는 레벨은 미미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A급 이상의 최상위 헌터들에게는 수십 개씩 사용해도 1레벨이 오를까 말까 하는 지경이었다.

그럴 바에는 각종 산업이나 아이템 제작에 쓰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한편, 블라드 유진은 레벨을 올리는 방식이 일반적인 헌터들과 전혀 달랐다.

뱀파이어는 강력한 존재의 혈액을 섭취함으로써 레벨이 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작급 마족 셋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는 질 수도 있을 거란 생각 자체를 아예 해 본 적이 없지만.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멋모르고 자신만만한 네놈들을 보고 있는 게 말이야."

"하! 이딴 개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이제 좀 시작하지? 퍼핏."

샤르마는 눈동자를 사납게 빛내며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만히 그를 살펴보던 시체 애호가 퍼핏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 끌 필요 있나. 이자만 죽이면, 공략대는 끝일 텐데 말이야. 가랏!"

타다다다다!

퍼핏의 외눈 안경이 시퍼런 빛을 번득이자, 시립해 있던 두 마리의 콥스 크리처가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페드로와 샤르마 또한 양쪽으로 갈라지며 각자 무기를 꺼내 들었다.

유진을 향해서 본격적으로 파상공세를 퍼부으려는 모양이었다.

좌측으로 이동하던 페드로는 암청색 반월도를 다발로 날려 대기 시작했다.

촤좌좌좌좌좍!

한편, 오른쪽으로 각을 벌린 샤르마는 채찍을 휘둘러 암녹색 구체를 투척했다.

쐐애애액! 콰아아앙!

두 마족의 연계 공격은 무자비하고 거칠었지만, 상당히 치밀한 체계가 있었다.

페드로의 반월도 다발이 퇴로를 차단하는 동안, 마치 점착 폭탄 같은 샤르마의 맹공이 작렬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폭발이 지나간 뒤에는 거대한 덩치의 콥스 크리처가 달려들면서 녹색 액체를 분사했다.

푸쉬이이이익!

그야말로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완벽한 연계 공격이 전개된 것이다.

콥스 크리처가 산성 액체를 토해 낸 다음에는 재차 페드로의 카니지 사이드가 빛을 발했다.

슈가가가각!

"음?"

거대한 낫을 휘두르며 연신 반월도를 날려 대던 페드로는 문득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파상공세 속에서, 고고하게 서 있는 블라드 유진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바람에 페드로가 순간적으로 멈추었지만, 공격은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중이었다.

그러나 마치 환상처럼 옆으로 쭉 움직이고 있던 그에게는 충분히 여유로운 빈틈이었다.

스슥―!

유진은 허공에 시커먼 음영 같은 것을 생성시키더니, 그곳으로 소수혈인을 강하게 찔러 넣었다.

한데, 놀랍게도 엉뚱한 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점착 폭탄 형태의 암녹색 구체를 연신 날려 보내던 샤르마가 복부를 부여잡고 결계 위를 나뒹군 것이다.

순간 고개를 홱 꺾으려 했던 페드로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러자 방금까지 녀석이 있던 곳에 시뻘건 칼날이 불쑥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읏!"

깜짝 놀란 페드로는 미간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블라드 유진은 눈빛을 바꾸며 소수혈인을 고쳐 쥐었다.

‘호오? 시공투절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군. 이이제이의 술수로 차원문을 어디론가 연결하긴 했어도, 감시는 불가했단 말인가.’

만약 네 번째부터 다섯 번째 시련을 지켜보았다면, 저들이 이토록 쉽게 당할 리가 없었다.

화룡왕의 가디언을 잡은 이후로 그는 줄곧 시공투절을 펑펑 사용해 왔으니까.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저들이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화룡왕과 메두사가 어떤 존재들인가.

둘 다 최전성기 유진의 레벨을 가뿐히 뛰어넘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능력치를 자랑하는 괴물들이었다.

고작 SS급에 불과한 백작급 마족들로서는 철저하게 살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엔세데스는 무려 공간의 틈새에 숨겨진 차원문마저 용언 마법으로 끄집어내기도 했으니까.

"이런 미친……!"

"나, 난 괜찮아! 계속해!"

페드로가 반월도를 다발로 뿌리며 지원하려 했으나, 샤르마는 손을 내저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수혈인이 쑤셔 박힌 정도로는 백작급 마족을 단번에 죽일 수는 없었다.

샤르마는 암청색 혈액을 뚝뚝 흘리며, 복부에 꽂혀 있던 핏빛 칼날을 뽑아냈다.

푸확―!

고통이 상당한 모양인지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지만, 전의를 잃은 모습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녀는 이내 꽤 멀쩡한 상태로 전장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샤르마가 이만큼 회복할 수 있었던 건, 페드로와 퍼핏의 더욱 거세진 공격이 블라드 유진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콥스 크리처들과 반월도 다발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도륙하는 중이었다.

양손에 나눠 쥔 6m 길이의 소수혈인이 번갈아 번득이자, 근처로 날아들던 모든 것들이 처참하게 찢어발겨졌다.

촤좌좌좌좍! 카가가강!

샤르마의 공백 때문인지, 유진은 꽤 여유롭게 전진하고 있었다.

"오호호호홋! 내가 돌아왔다!"

휘리리릭! 쿠콰콰콰콰쾅!

여러 개의 암녹색 구체가 날아들어 폭발과 함께 어마어마한 파편을 휘날렸다.

상처를 회복한 샤르마가 채찍을 휘두르며 페드로를 지원한 것이다.

그러자 이윽고 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전면을 새카맣게 채우며 날아드는 파편을 막아 내다 보니, 블라드 유진의 이동 방향은 반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힘의 균형추가 세 마족에게로 살짝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되찾은 승기는 그가 내지른 단 한 수에 의해 다시 꺾이고 말았다.

스슥―! 푸확!

"커허억!"

유진이 허공에 강한 일도(一刀)를 내지르자, 샤르마는 다시금 복부를 부여잡으며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백작급 마족의 육신으로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 기척을 숨긴 채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 소수혈인에 적중된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결계 위로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샤, 샤르마!"

페드로가 크게 이름을 불렀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통증을 무시하고 거뜬히 일어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 본다. 계속 공격해!"

그나마 여유가 있었던 퍼핏이 샤르마를 향해 달려가 상세를 살펴보았다.

칼날에 당한 상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문제는 주변에 남은 피의 권능이었다.

놀랍게도 이 진득한 마기에는 상처 복구를 저해하는 힘이 있었다.

무려 백작급 마족의 육신임에도 무리 없이 작용하는 무시무시한 능력이었다.

"조금만 참아."

"크윽!"

푸쉬익!

퍼핏은 샤르마의 복부에 박힌 소수혈인을 뽑아내며 황급히 마력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자 상처 주변에 머무르던 피의 권능이 물러나며 출혈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제야 샤르마는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제, 젠장할! 이게 대체 뭐야?"

"나도 모른다. 아무래도 시련을 거치면서 예전보다 더한 괴물이 된 듯하군."

두 마족은 콥스 크리처와 함께 분투하는 중인 페드로를 지원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그때, 몸을 돌리던 퍼핏의 눈에 믿지 못할 광경이 박혀들 듯 들어왔다.

스슥―!

"어, 어느새……!"

페드로를 마치 싫증 난 장난감처럼 날려 버린 블라드 유진이 벌써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퍼핏의 목에 핏빛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내 집에다 장난질을 친 놈은 너겠지."

"으으! 이 빌어먹을 샊……."

푸확!

퍼핏이 무언가 찾는 듯 품속을 더듬자, 유진은 일절 망설임도 없이 그대로 목을 베어 버렸다.

"끄르륵!"

그런데 시체 애호가 퍼핏은 목이 잘린 채로도 오른손을 움직여 기어이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펄떡이며 뛰고 있는 사람의 심장이었다.

기괴한 행동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재차 소수혈인을 놀려 핏기없는 심장까지도 깔끔하게 잘라 냈다.

스각―!

그러자 거기서 뿜어져 나오던 마기가 급격하게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그와 동시에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반가운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시체 애호가 퍼핏의 궁극 스킬 ‘콥스 데터네이트’가 취소되었습니다.]

[백작급 마족 한 명이 목숨을 잃습니다.]

[퍼핏이 절명함으로써 콥스 크리처의 활동 또한 정지합니다.]

"허억!"

퍼핏의 근처에 있던 샤르마는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이자 천공의 성을 설계한 퍼핏이 이토록 간단하게 절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놀란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잽싸게 발을 놀리는 중이었다.

유진의 곁에서 한시라도 빨리 물러나지 않으면, 퍼핏과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목이 잘릴 것만 같았으니까.

샤르마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콥스 크리처들을 지나, 널브러져 있던 페드로에게로 접근했다.

"괘, 괜찮나?"

"크허억……."

"상태가 심상치 않군."

상세를 살핀 샤르마는 페드로가 자신과 똑같은 것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마기를 나눠주었다.

그러자 이윽고 페드로는 복부가 관통당한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두 마족은 복잡한 눈빛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유진을 쳐다보았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빌어먹을! 이러다간 계획이 모조리 실패하겠어. 무슨 수를 써서 든 저자를 막아야만 한다."

"나도 알아."

샤르마의 말을 들은 페드로는 서울에서 잠깐 마주쳤던 블라드 유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도 분명 강하긴 했으나, 상대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백작급 마족 세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압도당할 만큼 경지 차이가 극심했다.

"작당 모의는 끝났나."

두 마족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유진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 이 시시한 싸움의 끝을 낼 때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우웅!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하늘에 차원문이 열리더니, 검붉은 마기로 이루어진 계단이 쭉 생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이 일대를 장악하며 그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척! 척!

이윽고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이 보이는 순간, 심혼을 찢어발길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한심한 작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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