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총 다섯이었다.
선두의 셋은 사람과 똑같은 형상이었지만, 나머지 둘은 마치 시체를 얼기설기 엮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콥스 크리처, 외눈 안경. 이놈이 바로 퍼핏이로군.’
블라드 유진은 선두에 선 흑발의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인상착의를 보아하니, DK가 말했던 시체 애호가 퍼핏이 확실한 듯했다.
그놈의 좌우로는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와 정체불명의 S급 비인가 헌터 샤르마도 있었다.
한국에서 카르텔을 만들며 괴상한 공작을 벌이던 놈들이 한곳에 모두 모인 것이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급인가."
"후후! 그냥 전투만 잘하는 목석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치가 빠르네?"
퍼핏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하지만 유진은 놈의 도발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반투명한 결계 위에 서 있는 세 명의 마족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대마초를 뻑뻑 피워 대던 페드로가 필터를 옆으로 튕기며 입을 열었다.
"비행 능력은 소용없을 거야. 위를 보라고."
지이이이잉!
페드로의 말대로 문득 시선을 위로 돌리자, 마족들이 밟고 선 결계와 똑같은 것이 생성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번진 반투명한 막은 녹턴의 비행 능력을 제한하겠다는 듯이 점점 고도를 낮추는 중이었다.
날아다니면서 공격을 퍼붓는 건 그야말로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니, 초장부터 통제할 작정인 듯했다.
그러지 않고 그를 잡는 건, 세 명이나 되는 백작급 마족을 동원하고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늘이 막혔지만,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녹턴을 통한 비행 능력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 상대도 날지 못한다면 전투에 큰 영향이 가지 않았다.
페드로에게서 시선을 거둔 그는 시체 애호가 퍼핏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자가 가운데에 서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닌 듯, 유진의 눈빛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음?"
노골적인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퍼핏은 눈에 이채를 띠며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모양이네. 이거 의외인걸?"
"아주 깊은 원한이 있지."
"호? 원한이라. 서로 불가침 하기로 한 사이에 감정 생길 만한 게 있나? 되레 우리가 분노할 입장인 것 같은데."
퍼핏은 불가침 조약을 깨고 천공의 성 공략에 참전한 블라드 유진의 행태를 꼬집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퍼핏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네놈들이 최종 보스인가."
"그래. 우리 셋을 모두 쓰러뜨리기 전에는 천공의 성을 나갈 수 없다. 결국에 네놈들은 멸망하고 말 테지."
"같잖지도 않군. 고작 백작급 마족 셋이 벌인 일이라니……. 네놈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유진의 말에 퍼핏은 페드로와 샤르마를 돌아보았다.
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천공의 성을 설계한 퍼핏도 알지 못하는데, 그저 협력했을 뿐인 페드로와 샤르마가 이유를 파악했을 리는 없었다.
시체 애호가 퍼핏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럼 불가침은 깨지는 거지. 후후! 애초부터 종잇장 같은 조약 아니었나? 우리랑은 별 상관도 없었으니 말이야."
마족들이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전투를 준비하자, 블라드 유진 또한 소수혈인을 뽑아 들었다.
스이잉!
그러고는 세 백작급 마족을 쳐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영지에 쓰레기를 던지고도 무사할 줄 알았나?"
마족들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가침을 깬 이유가 고작 그런 거였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 그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지 않아?"
"네놈들은 내 일조권도 방해했다."
"아니, 무슨 뱀파이어가 일조권 같은 개 헛소리를……."
세 마족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유진 님이 고립되었습니다! 어, 어쩌죠?"
결계가 생성된 직후, 다이애나 로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프랑스의 S급 헌터인 구스타브 아말릭 또한 표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전선과 천공의 성에서 블라드 유진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았지만, 최종 보스를 혼자서 감내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나머지 S급 헌터들의 기색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특히 전시영과 루시아는 그가 혼자서 세 명과 싸우게 되었음에도 상당히 태연했다.
다이애나는 그런 두 사람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질책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당신들은 유진 님과 가장 가까운 동료 아니었나요? 어떻게 그리 깔끔하게 무시할 수가 있죠?"
그러자 전시영은 더욱 어이없는 눈빛을 하며 답했다.
"저 결계를 뚫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마족 군단 웨이브에 집중하는 게 나을 텐데?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직접 구해 보든가."
"판단은 공략대장께서 하실 겁니다. 한데, 왜 옆에서 설레발을 치세요? 감정적인 발언하지 말고, 의견 개진 정도로만 하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타박하자, 조나단 잭슨은 살짝 곤란한 얼굴로 다이애나 로즈에게 다가갔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S급 헌터다 보니, 어떻게든 그녀를 감싸고 싶은 모양이었다.
"쉽게 쓰러질 사람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할 일을 하면서 지원할 방법을 찾아봅시다."
"그래도 웨이브를 막는 것보다는 최종 보스를 쓰러뜨리는 게 우선 아닌가요? 그래야만 시련이 끝난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명령권은 공략대장에게 있으니 좀 기다려 보시죠."
"알겠어요."
대화를 마친 조나단과 다이애나는 안지홍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무래도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높은 인물들의 발언이니,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안지홍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계를 뚫고 블라드 유진 님을 지원하는 건 2차 목표로 잡아야 할 것 같군요. 지금은 방어선을 구축하는 게 우선입니다. 각 성문을 방어할 팀을 나누겠습니다."
안지홍의 선언에 다이애나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아직 마족 군단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나, 여기서 반발해 봐야 분란을 조장하는 거로 비칠 테니까.
현재 공략대의 전력은 S급 일곱에 A급 154명, 성기사단 41명이 남아 있었다.
메두사를 상대하면서 무려 75명에 달하는 공략대원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성문마다 67명의 인원을 배치하는 게 가능했다.
안지홍은 마족 군단의 규모를 가늠하여 신속하게 팀을 나누었다.
인원 배분을 끝냈지만, 단 한 명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바로 방금까지 이견을 제시했던 다이애나 로즈였다.
"왜 저는 빼신 거죠?"
"S급이 일곱이라서 그렇습니다. 다이애나 님께서는 중앙에서 광범위 버프를 걸어 주십시오. 부족한 곳에 화력 지원을 해 주셔도 좋습니다."
"아, 그런 의미였군요. 알겠습니다."
광범위 버프에 원거리 공격 능력까지 갖춘 그녀라면, 세 성문을 모두 지원할 수 있을 터였다.
다이애나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위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여전히 최종 보스들과 마주한 블라드 유진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공략대원들은 요새의 중앙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 각자 성문을 지키기 시작했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남동쪽, 조나단과 안지홍은 남서쪽, 아말릭과 레프는 북쪽이었다.
탱커와 딜러를 적절하게 나눔과 동시에, 껄끄러운 상대를 떨어뜨린 매우 합당한 배치였다.
안지홍의 결정에 불만을 지닌 헌터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남동쪽 성문에 진을 친 전시영과 루시아의 팀은 마족 군단 웨이브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쿠구구구구!
"□□¡ □□□□ □□□ □□□!"
놈들은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좁은 성문을 향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놀랍게도 마족 군단은 요새 성벽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성문에만 달려들었다.
마치 이 요새를 구성하는 석재 자체에 기이한 힘이 있어, 저들이 절대로 파괴하지 못하는 듯했다.
제대로 된 수성 무기 따위를 갖추지 못했던 공략대의 입장에서는 아주 유리한 현상이었다.
성문을 틀어막은 상태로 성벽 위에서 공격을 퍼부으면, 손쉽게 요새를 방어할 수 있었으니까.
"아, 그러췌에! 계속 그렇게 꾸역꾸역 들어오라고. 초열지옥 십지폭쇄(十指爆鎖)!"
삐이이! 쿠콰콰콰콰콰쾅!
전시영은 쾌재를 부르며 연신 노란색 구체를 날려 댔다.
그녀의 손짓이 마족 군단의 중심으로 향할 때면, 여지없이 대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사체를 양산했다.
물론 십지폭쇄의 위력에 휘말린 마족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겨 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전시영은 그야말로 일당백 아니, 일당만(一當萬)의 활약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남동쪽 성문의 전황은 매우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북쪽과 남서쪽은 그리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말릭과 조나단의 원거리 공격 능력은 소수 인원을 저격하는 데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무기가 활과 차크람이라,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거 우리가 너무 유리한데, 병력을 분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북쪽과 남서쪽에 각각 A급 열 명과 힐러 두 명을 보내세요. 추리는 건 알아서 하시고요."
"알겠습니다."
루시아의 요청에 폰시아노는 얼른 인원을 차출하여 지원 병력을 보냈다.
무려 절반의 전력이 감소했지만, 동남쪽의 상황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원투 펀치가 마족 군단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영이 대폭발로 마족 군단을 조져 놓으면, 루시아가 성문 앞으로 나서서 깃발 창을 휘둘렀다.
넓은 범위를 휩쓸어 버릴 수 있는 루시아의 스킬 또한 만만치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24명이나 되는 인원의 빈자리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스킬 쿨 돌았다! 빠져! 루시아!"
"네!"
성벽 위에서 전시영의 외침이 들려오자, 루시아는 깃발 창을 크게 휘돌렸다.
치지지직! 쿠콰콰콰!
창끝에 달린 백색 천에서 뇌전이 쏟아져 나와 마족들을 마구 감전시켰다.
그녀가 성문 안쪽으로 되돌아오는 동안에는 A급 헌터들이 화력의 공백을 메꿔 주었다.
이윽고 동남쪽 성문 앞에는 전시영이 쏘아붙인 노란색 구체가 불쑥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것들은 순식간에 대폭발로 이어졌다.
"젠장할. 정말 끝도 없네."
벌써 수천 마리의 마족들을 학살했지만, 웨이브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평원에 새카맣게 몰려든 마족 군단은 끊임없이 병력을 보냈다.
누가 먼저 지치는지 자웅을 겨루는 극강의 소모전이었지만, 공략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에너지 소비를 적당히 조절하면서 몰려드는 마족들을 처치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다이애나 로즈의 광범위 버프 덕분에 쉬이 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공략대의 여유는 오래 가지 못했다.
[최종 보스의 부하가 결계를 통과하여 요새에 직접 타격을 시도합니다.]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지키십시오.]
불현듯 떠오른 홀로그램 글귀에, 헌터들은 요새 안쪽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