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전시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하자, 블라드 유진은 대답 대신 먼지가 되어 버린 사체를 돌아보았다.
무시무시한 모습의 메두사는 온데간데없고, 신전에는 한 무더기의 시커먼 재만 남았다.
신전을 둘러본 그녀는 이내 그가 메두사를 처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들이 전원 조각상이 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구해 준 거로구나. 고마워."
전시영은 머쓱하게 볼을 붉히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활활 불타오르던 전의는 유진의 얼굴을 보게 되자,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어느새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전시영의 곁에 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왔다.
"호오? 이게 바로 네가 말했던 재미있는 녀석 중 하나인가? 머리카락 색이 마음에 드는군. 뭔가……. 부자연스럽기는 하지만 말이야."
마치 조각상을 감상하는 듯한 자세로 그녀를 둘러보는 존재는 엔세데스였다.
화룡왕은 어이없는 듯한 전시영의 태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문제는 마족어로 말하고 있었기에, 블라드 유진 외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전시영은 엔세데스를 가리키며,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끗거렸다.
‘이 미친놈은 뭐야?’라는 말임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의미를 알지 못한 화룡왕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녀를 품평하는 중이었지만.
"근데 뭐가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군. 힘을 좀 지니고 있지만, 그냥 평범한 인간 여자인데? 아!"
엔세데스는 혼잣말을 하더니, 손가락을 딱 튕기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의 인간이니 내 말을 알아들을 리 없지. 통역 마법을 써야겠군."
츠츠츠츠!
이윽고 화룡왕의 몸에서 미약한 에너지의 파동이 퍼져 나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전시영은 엔세데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재밌다는 게 뭔지 알고 싶군. 재주를 좀 부려 봐라. 인간 여자."
상상을 초월하는 헛소리에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돌변했다.
"이야! 참신한 또라이를 주워 왔구나? 이거 좀 구워도 되지?"
전시영은 어느새 양손에서 시퍼런 불길을 내뿜는 중이었다.
블라드 유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둘을 지나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알아서 해."
화염에 좀 닿는다고 화룡왕이라는 존재가 타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긴장감을 더해 가는 둘을 뒤로한 채, 곧장 안지홍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런데 대뜸 누군가가 그런 유진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구하러 와 주신 데,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전투가 참 인상 깊었어요."
문득 시선을 돌려 보니, 다이애나 로즈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감격한 표정으로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마치 눈빛에서 꿀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척!
그런데 다이애나의 말에 그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네?"
"전투가 인상 깊었다는 말."
블라드 유진이 메두사의 시련에 도착했을 때, 공략대는 전원 석화 저주에 당해서 조각상이 되어 있었다.
석화 저주는 메두사를 죽인 다음에야 풀렸으니, 그의 전투 장면을 본 자는 엔세데스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이애나 로즈는 마치 모든 걸 다 본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문득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양손을 빠르게 흔들며 황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 제 스킬 때문에 그런 건데요. 석화 저주가 완벽히 걸리지 않아서, 드문드문 눈앞의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이애나는 본인이 보유한 약화 면역 스킬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자체 저항 스킬로 인해, 상황을 얼추 관찰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오해할까 싶었던 듯, 타인에게는 걸어 줄 수 없는 스킬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유진은 그런 자세한 상황까지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여자가 천즈한과 같은 마족의 끄나풀은 아닌지 잠깐 의심했을 뿐.
‘한없이 선한 모습을 보이는 게 천즈한과 비슷하긴 하니, 좀 더 두고 봐야겠어.’
그는 다이애나 로즈에게서 시선을 거둔 뒤, 안지홍을 향해서 쭉 걸어갔다.
공략대장을 맡은 안지홍은 몹시 바쁘게 인원 파악을 하는 와중에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사실상 전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결과가 나왔으니까.
아니, 블라드 유진이 메두사를 처치하지 못했다면 이건 그냥 전멸이었다.
안지홍은 그가 근처로 다가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딱히 기척을 감추지 않았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는 증거였다.
"오셨습니까? 바빠서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군요."
"됐다."
"하하! 한데, 어쩐 일이신지요."
"정비하고 넘어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음……. 아무래도 휴식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사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에너지 소모가 극심하거든요."
"알겠다."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질문에 대답하던 안지홍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원래 저런 분이셨지."
이제 할 말만 하고 휙 사라져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재사용 대기 시간을 채우는 건 충분하겠군.’
블라드 유진은 메두사의 신전 가장자리로 걸어가며 잠깐 상념에 빠졌다.
레벨이 1,800을 돌파하면서 그가 보유한 뱀파이어 로드의 궁극 스킬들은 페널티가 완전히 사라졌다.
재사용 대기가 3시간이면, 무난하게 활용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특별히 연속으로 엄청난 강자와 전투를 치러야 하는 경우만 아니면, 큰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유진의 눈에 시퍼런 불길을 뿜어내는 전시영의 모습이 딱 들어왔다.
그녀는 형형한 눈빛으로 연옥의 숨결이라는 스킬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대상은 화룡왕이었다.
아무래도 엔세데스가 뭔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죽어! 이 또라이야!"
쿠화아아아!
맹렬하게 푸른 화염을 분출하고 있음에도 화룡왕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되레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것처럼 불길을 빨아들이기까지 했다.
"음! 유진의 말이 맞았어. 역시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엔세데스에게 연옥의 숨결이 통하지 않자, 전시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푸른 화염을 멈추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존재할 수가 있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화룡왕은 그런 그녀를 향해서 신경을 긁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얼른 더 해 봐. 오늘부터 넌 내 전용 난로로 써 주지."
"으아아! 뒈져!"
삐이이―!
화를 참지 못한 전시영은 십지폭쇄를 전개하여 엔세데스가 서 있던 공간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무지막지한 폭발이 신전을 뒤흔들었지만, 놀랍게도 화룡왕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연옥의 숨결을 쏟아 냈을 때보다 더욱 흥미로운 표정이었다.
"난로 성능이 참 좋군. 움직일 수 있으니, 화산보다 훨씬 쓸 만하겠어."
엔세데스의 말에 전시영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화룡왕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녀도 나름대로 참신한 대응 방안을 내놓았으니까.
* * *
공략대의 휴식은 대략 10시간 정도 이어졌다.
놀랍게도 공략대원들은 전장에서 72시간을 버텨야 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욱 힘들다며 호소했다.
석화 저주에 걸렸다가 풀리자,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멀쩡하게 뛰어다녔던 전시영의 체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았던 거였다.
재정비가 끝난 뒤, 공략대는 차원문을 통해서 운명의 방으로 되돌아왔다.
"드디어 마지막인가 보군요."
안지홍은 긴장한 표정으로 운명의 방에 생긴 큼지막한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경험했던 시련의 문은 평범한 나무 재질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섯 개의 시련을 모두 클리어하고 나자, 양쪽으로 여는 은빛 금속 문이 나타났다.
마치 대놓고 최종 보스로 향하는 문이라며 광고하는 느낌이었다.
고작 문에서조차 대단한 자신감이 느껴졌기에, 공략대원들은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메두사의 시련이 가져다주었던 넘사벽의 난이도가 그들의 심혼을 아직도 옥죄는 모양이었다.
최종 보스라면 당연히 메두사보다 강할 게 뻔하니까.
"가시죠."
그러나 안지홍은 담담한 목소리로 공략대를 이끌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공략의 성패에 달렸는데, 지레 겁먹고 위축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공략대장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대번에 사기가 꺾일 터였다.
철컥!
양손으로 문고리를 돌려서 거칠게 문을 열자, 붉은빛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차원문이 나타났다.
안지홍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차원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공략대원들도 긴장감을 감추며 그 뒤를 따랐다.
스팟! 스팟!
차원문을 통과하자마자 보인 것은 거대한 요새였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4층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한 형태였지만, 이번에는 출입구가 세 곳이었다.
요새의 주변으로 쭉 펼쳐진 녹색과 청색, 흑색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대지마다 성문이 한 개씩 있는 형국이었다.
"여긴……. 그때와 유사하군."
"맞아요. 건축 양식이 상당히 비슷하네요."
"그거 진짜 악몽이었는데."
전시영과 루시아는 안테리오르 타워에서 겪었던 마족 군단 웨이브를 떠올린 모양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의 시련은 결단코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전투였다.
사람이나 몬스터도 아니고 최상급 마족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건 그야말로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마족 군단이군."
블라드 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이미 녹턴에 올라타 공중으로 떠오른 그는 요새의 주변을 쭉 둘러보고 있었다.
"으에? 진짜?"
"어디 나도 좀 봐야겠어요."
두 사람은 황급히 성벽 위로 올라가 마족 군단을 확인했다.
유진의 말대로 삼면의 평원에는 각기 다른 색상의 기운에 휩싸인 존재들이 무수히 몰려온 상태였다.
누가 봐도 마족 군단인 모습에 전시영과 루시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으! 저놈들과 또 싸워야 한다니……."
"어서 공략대에 알리죠. 바로 전투에 대비해야 할 겁니다."
루시아는 얼른 안지홍에게 달려가 마족 군단의 출현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지옥 같은 일이 되풀이될 거라는 홀로그램 글귀가 공략대원들의 눈앞에 떠올랐으니까.
[마족 군단의 공세로부터 중립 요새를 수호하십시오.]
[시련은 마족 군단을 패퇴시킬 때까지 이어집니다.]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
[30, 29, 28, 27…….]
이번에는 마력 탑을 지키라는 내용 따위는 전혀 없었다.
이 중립 요새는 공략대에게 주어진 어드밴티지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그냥 맨땅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무언가가 요새를 그대로 덮어 버렸다는 거였다.
지이이이잉!
[중립 요새의 지상과 상공이 분리되었습니다.]
녹턴과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던 유진과 공략대가 분리되자, 대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어어? 이러면 박멸자와 따로 싸우게 되는 건가?"
"저 사람 없이 가능해?"
"……힘들겠지."
공략대원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래쪽의 상황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허공의 어느 지점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반투명한 결계 위에 내려서는 게 아닌가.
스으윽! 척!
"역시 당신 감각을 속일 수는 없군. 어때? 무대가 마음에 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