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드디어……. 끝이 도래했구나.
성대를 밑바닥에서부터 긁는 듯한 목소리엔 음울함과 짙은 체념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놀랍게도 블라드 유진을 바라보는 상대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의 사슬을 끊어 준 것에 고마움이라도 느끼는지, 살짝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듯했다.
물론 메두사의 눈은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려서 더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쿠웅!
육중한 그녀의 몸체가 쓰러지자, 묵직한 충격이 신전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내려선 그는 천계도살검을 늘어뜨린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흡!"
그건 긴장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한숨이 아니었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서 마치 숨을 참는 듯한 소리였다.
푸쉭! 뜨드득!
유진은 복부에 박힌 세 개의 손톱을 하나하나 뽑아내고 있었다.
시커먼 기류가 올라오는 3m 길이의 손톱은 메두사의 손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그녀의 반격이 있었지만, 그는 공격을 깡그리 무시한 채 천계도살검을 휘둘렀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 동귀어진의 수법을 사용했기에, 이런 큰 상처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고작 부상을 피하겠다고 날려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웨엑!"
블라드 유진은 폐에 들어찬 혈액을 뱉어 내며 몸을 관통한 세 개의 구멍을 빠르게 메워 갔다.
메두사의 손톱에는 무지막지한 권능이 깃들어 있어서 회복이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최전성기의 자신과 싸운 직후와 마찬가지로, 피의 권능을 때려 박는 거로 해결해 버렸다.
회복 방해도 한두 번 겪다 보니, 이제 면역이 될 지경이었다.
유진은 일단 심각한 부분을 먼저 치료하고, 메두사의 시신으로 다가가 투명하게 변한 손을 내밀었다.
츠츠츠츠츠!
우수한 혈액이 있으면 더욱 수월하게 치유할 수 있으니, 이는 당연한 행위였다.
아직 뜨뜻한 그녀의 피를 받아들이자,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막대한 에너지가 혈액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츠츠츠!
황급히 흡혈 스킬을 끊은 블라드 유진은 차분하게 피의 권능을 일으켰다.
‘하마터면 되레 잡아먹힐 뻔했군.’
이질적인 힘이 한 번에 너무 많이 들어오면, 피의 권능이 지닌 정체성이 흔들릴 여지가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소 천천히 혈액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동물도 음식을 허겁지겁 먹으면, 배탈이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느린 속도로 메두사의 혈액을 빨아들이던 그는 이윽고 흡혈 스킬을 완전히 끊어 버렸다.
그녀의 영혼이 신전을 완전히 떠나면서, 육신에 남아 있던 막대한 에너지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는 혈액을 빨아 들여봐야 별반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반신의 것이라, 맛 자체는 대단히 훌륭했지만.
"건질 만한 스킬이 없다는 게 아쉽군. 석화 저주를 가져올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메두사의 피를 다량 마시게 되었지만, 새로운 스킬을 복사해 오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기술은 죄다 뱀 종족 전용이기 때문이었다.
점점 사그라지는 메두사의 사체를 보고 있자니, 급박했던 전투가 다시금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만약 천계도살검부터 꺼내 들었다면, 불현듯 나타난 거울에 막혀 버렸을 터였다.
놀랍게도 메두사의 거울은 시공투절까지도 막아 내는 일종의 강력한 결계였으니까.
그녀가 거울을 사용할 때까지 기다렸더니, 확실한 기회가 창출되지 않았던가.
‘힌트를 준 화룡왕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문득 엔세데스를 떠올린 그는 사체에서 시선을 떼더니, 한쪽으로 밀어 두었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알짱거리는 게 귀찮아서 잠깐 접어 두었지만, 홀로그램 글귀는 더없이 흡족한 내용을 알려 주고 있었다.
[모든 괴물의 여왕, ‘반신 메두사’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막강한 적을 쓰러뜨림으로써 봉인율이 0%가 되었습니다.]
[1천 년간 잠들면서 생겼던 후유증이 완전히 지워집니다.]
[격 높은 존재의 혈액을 섭취함으로써 레벨이 큰 폭으로 올랐습니다.]
‘이거 능력치 정보창이 궁금해지는군.’
블라드 유진은 치아가 훤히 드러날 만큼 입꼬리를 올렸다.
상당히 이례적일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이제껏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봉인이 말끔하게 날아갔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차르륵!
그는 손목에 채워진 은빛 사슬을 가볍게 흔들어 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제 본신의 힘을 되찾았으니, 이따위 봉인쯤이야 손쉽게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천계도살검의 효과가 아직 남아 있지 않았던가.
"일단은 놔두는 게 좋겠지."
이 봉인은 교황청과의 연결고리이자, 교황이 방심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요소였다.
거슬린다고 굳이 없애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유진은 옷으로 손목을 덮어 버리고, 홀로그램을 살펴보았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1,885
등급 : EX(Lv. 1,501~3,0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그의 능력치 정보에는 이제 봉인율이라는 단어가 존재치 않았다.
더불어 1,775에 정체되어 있던 레벨이 110단계나 대폭 상승했다.
메두사의 혈액을 통해서 받아들인 힘이 생각보다 더 대단했던 모양이었다.
블라드 유진의 종족 효과를 살펴보면, 메두사와 똑같이 반신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는 EX급의 존재에게 기본적으로 붙는 일종의 칭호였다.
능력치 정보를 확인한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스킬창을 열어 보았다.
완전한 EX급으로 돌입하면서 스킬에도 대격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킬 정보>
명칭 : 천계도살검(天界屠殺劍)
등급 : EX 위력 : EX+
사거리 : 5m + α
지속 시간 : 10분
재사용 대기 시간 : 3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타락, 재생 억제
<스킬 정보>
명칭 : 마신강림
등급 : EX 위력 : EX+
지속 시간 : 10분
재사용 대기 시간 : 3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지속 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2배로 적용.
<종합 스킬 정보>
‣ EX급
흡혈, 혈성쇄혼술, 암흑화, 소수혈인, 천계도살검, 마신강림, 시공투절
‣ SS급
권능 폭발, 대군주의 역병
‣ A급
폭사, 레이스 트래킹, 천군압쇄, 초열지옥 역풍
뱀파이어의 기본 스킬은 모두 EX급에 오르게 되었다.
아쉽게도 권능 폭발과 대군주의 역병은 여전히 SS급에 머물렀다.
최전성기 때도 그랬으나, 분명 더 성장할 여지는 있었다.
레벨을 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EX급이 되리라.
"이제 보상을 얻을 차례인가."
모든 정보를 확인한 유진은 홀로그램을 치워 버리고, 단상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단상 위의 화려한 협탁에는 독특한 형태의 투구가 놓여 있었다.
사실 투구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물건이었다.
안면을 가리는 덮개가 없고, 형태도 전투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투구가 이렇게 생겨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음."
<아이템 정보>
명칭 : 카이넬의 투구
등급 : EX 공격력 : EX+
내구도 : 무한
효과 : 신성력 증폭
특징 : 세트 아이템
메두사가 신성을 얻기 위해서 훔치려던 성물. 초월적인 신성력을 공급하며, 성법의 위력을 2배로 증폭.
애초부터 카이넬의 투구는 성직자를 위한 아이템이었다.
악신황의 던전에서 마주한 성직자들 또한 이 성물과 비슷한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 성물을 얻었나?"
그런데 갑자기 블라드 유진의 뒤에서 이제는 꽤 익숙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이나 퍼마시며 전투를 구경하던 엔세데스가 단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여전히 술을 들이켜는 화룡왕의 모습이 보였다.
"얻었지. 쓸 수는 없지만."
"메두사가 카이넬의 투구를 훔치려 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유명해. 천벌을 받아서 머리카락이 뱀으로 변해 버려, 성물을 단 한 번도 쓰지 못하게 되었지."
"적절한 벌이로군."
"진짜 벌은 이 단상 주변에 영원히 묶이는 거였어. 그나저나 상당히 빨리 알아내던데?"
"운이 좋았다."
"역시 넌 정말 구경하는 맛이 있는 놈이야. 꽤 재미있더군."
엔세데스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었지만, 그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나름 도움이 되는 녀석이라, 굳이 멀리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약간 귀찮은 존재긴 했지만.
‘일단은 좀 두고 보자.’
스윽!
유진은 품속에서 복주머니를 꺼내더니, 카이넬의 투구를 집어 들었다.
치이익!
성검 때와 마찬가지로 손끝으로만 살짝 들어서 얼른 복주머니에 밀어 넣어 버렸다.
멋모르고 잡았다가는 투구가 발산하는 신성력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아쉽군."
벌써 카이넬의 성물이 세 개나 모였지만, 세트 효과를 알 수는 없었다.
세트 아이템이 총 몇 개인지 정보조차 없을뿐더러, 성검과 투구는 아예 착용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굳이 성물의 세트 효과를 다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신성력이 가득 깃든 물건이라, 활용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니까.
일단은 어딘가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복주머니에 박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도무지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카이넬의 성검도 상당한 쓰임새가 있지 않았던가.
[반신 메두사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여 운명의 방으로 이동하는 차원문이 생성됩니다.]
단상에서 천천히 내려오던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방문이 아무것도 존재치 않던 허공에 생성되었다.
엔세데스는 문을 힐끔 바라보더니 찬찬히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구나. 이번에는 용언 마법을 쓸 필요가 없어서 좋은데?"
화룡왕은 신기하다는 듯이 불쑥 나타난 방문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차원문이 나타났음에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쳐 버렸다.
그러자 엔세데스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유진을 따랐다.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인간 놈들이 있다고 했지?"
"그런 표현은 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이 시련이라는 것도 세 개는 네가 처리하지 않았나? 아니, 날 잡는 시련까지 합하면 넷이로군. 이 정도면 뭐, 그냥 혼자서 온 거나 마찬가지지."
화룡왕의 말을 듣고 보니, 사실상 공략대가 한 일은 시련 하나를 통과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헌터들의 수준으로는 그런 성과도 상당히 분전한 것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대상이 너무도 강했을 뿐이었다.
무려 상대가 반신인 데다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불현듯 맞닥뜨리지 않았던가.
제대로 대응을 못 했을 만도 했다.
"그래도 거기엔 꽤 재밌는 녀석들이 있거든. 나름 구경할 만해."
"오호?"
유진이 그렇게 말하며 조각상 쪽으로 이동하자, 엔세데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서히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중인 공략대를 찾아볼 수 있었다.
파스스스!
그러나 석화 저주가 풀렸음에도 몇몇 조각상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말았다.
"저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어. 돌이 된 채로 수명이 다한 거지."
"그렇군."
멋모르고 신전에 들어왔던 여행자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다.
아무래도 최근에 조각상이 된 사람은 공략대원들밖에 없는 듯했다.
저주가 풀린 헌터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웅성거렸다.
한창 전투 중에 돌이 되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막 스킬을 사용하는 듯한 모습이던 전시영은 상당히 격한 반응을 보였다.
"으아아! 이 뱀 새끼! 통구이로 만들어 주겠……. 으엉?"
그녀는 마치 연쇄역풍을 시전한 것처럼 오른손을 빙글빙글 돌리는 중이었다.
물론 스킬은 취소되어 전시영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눈앞에 그가 불쑥 나타나자,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메두사와 싸우던 상황에서 기억이 딱 끊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