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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17화 (118/226)

17화

"드디어 눈치챘군. 아니, 꽤 빠른 건가?"

화룡왕 엔세데스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블라드 유진의 행적을 좇았다.

메두사는 단상으로부터 일정 범위 밖으로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단상 위의 화려한 협탁에 놓인 카이넬의 성물을 지키는 형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에 도전한 대가로 권능을 절반 이상 거세당한 데다가, 단상에 묶여있어도 그녀는 여전히 강력했다.

당장 신전을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농도 짙은 살기만 보더라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단상에 속박된 상태가 아니라면, 고대룡인 엔세데스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나보다 약한 건 확실한데, 어째서 저런 투지를 보일 수가 있지? 참 신기한 녀석이야. 딱 봐도 무모하지만, 해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화룡왕은 술을 들이켠 뒤, 탁자에 놓인 과일 한 알을 손가락으로 튕겨 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멈춘 이름 모를 녹색 과일이 입을 향해 느릿하게 날아왔다.

엔세데스는 과육을 씹어 삼키며 전투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원거리 공격을 마구 뿜어 대던 메두사의 움직임이 돌변했다.

"호? 안줏거리가 죽여주는군. 너의 승리를 위해. 치얼스!"

독주를 삼키는 화룡왕의 울대는 눈 앞에 펼쳐진 전투의 향방처럼 크게 출렁거렸다.

* * *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시공투절을 피해 내기 위해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던 메두사가 돌연 방향을 바꿔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유진과의 거리를 좁히려던 녀석이 대뜸 반대편을 향해서 미끄러져 간 것이다.

어차피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무 상관 없었던 그는 무심하게 시공투절을 꽂아 넣었다.

스슥―! 푸확!

"킈이익!"

이번에는 그녀의 몸속에 시공투절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상대가 워낙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기에, 웜 홀을 생성시킬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등을 보일 때는 손쉽게 공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좌우는 신경 쓰지 않고 앞뒤만 가늠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푸캉!

체내에 소수혈인이 쑤셔 박혔으나, 메두사의 움직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녀석은 신전의 가장자리로 쭉 이동하더니, 대뜸 기다란 꼬리로 조각상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블라드 유진을 돌아보며 조각상을 지면에 내리꽂는 게 아닌가.

쿠화아앙!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졌지만, 메두사의 무지막지한 힘에 조각상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상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무심하게 소수혈인을 놀렸다.

스슥―! 푸확!

"키에에엑!"

조각상을 부수느라 잠깐 멈추었던 메두사는 시공투절을 피하지 못했다.

게다가 녀석이 서 있는 곳은 질주의 늪도 아니라서, 아무리 움직여 봐야 소용없을 터였다.

체내에 큼지막한 칼날이 연신 쑤셔박히는 동안에도 메두사는 포기하지 않고 꼬리를 휘둘렀다.

콰앙! 콰과과광!

주변에 즐비한 조각상들을 마구 때려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나 이들 중 연관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가 다가올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기계적으로 시공투절을 쏟아부었다.

스슥―! 콰지지직!

"키에에에엑!"

결국에 메두사는 조각상 부수기를 멈추고, 다시 쇄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조금도 흔들리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박살 낸 조각상 중에는 공략대원의 것도 있었으나, 유진과는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뱀파이어 로드가 피 주머니에 불과한 인간을 뭣 하러 걱정한단 말인가.

그르륵! 촤하아아악!

메두사는 바닥에 보라색 액체를 깔고, 다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질 작전이 먹히지 않으니, 다른 방식으로 유진을 공략하려는 모양이었다.

문득 시공투절을 날려 대는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심각한 경고 문구라, 옆으로 밀어 두었던 글귀가 가운데로 돌아와 있었다.

[메두사의 분노가 시작됩니다.]

[석화 저주가 극한으로 발휘되어, 신전 내부의 모든 존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 시선을 마주치지 않아도 석화 저주가 걸릴 수 있습니다.]

‘시선과 상관없이 석화에 걸린다고?’

유진은 홀로그램의 경고에 감사하며 오른손을 위쪽으로 쭉 뻗었다.

두두두두두!

허공을 유영하던 녹턴이 빠르게 날아와 그의 곁에 아주 잠깐 멈추었다.

그러고는 재차 어마어마한 속도로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유령 군마의 등에 탈 수 있는 건 찰나에 불과했지만, 블라드 유진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녹턴의 등에 몸을 반쯤 걸친 채로 날아가다가, 신전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곧이어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살기가 덮쳐 왔다.

"읏!"

쿠후웅! 찌이유우웅!

블라드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한 채 옆으로 몸을 날렸다.

메두사가 서 있던 방향에서 매우 탁한 회색 광선이 쏘아져 나오더니, 그가 내려선 곳을 강타하는 게 아닌가.

쿠화아아앙!

광선이 닿은 곳은 신전 벽면이든 지면이든 가리지 않고 모조리 가루가 되어 버렸다.

악염도의 화신이 초고온의 에너지를 발출해 대상을 잿더미로 만든다면, 석화 광선은 가공할 힘으로 물질을 그냥 찢어발겨 버리는 느낌이었다.

박살 난 석재 가루가 사방팔방으로 흩날리자, 유진의 시야가 심각하게 축소되었다.

짙은 분진이 시계를 가린 탓에 다음번 석화 광선이 어디로 올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노한 메두사는 반드시 회색 광선을 쏘아붙여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신전에 침입한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것이 녀석이 치르는 천벌이므로.

번―쩍! 쿠콰콰콰콰!

희미한 불빛이 번득이면서 비추어지자, 블라드 유진은 잽싸게 몸을 틀며 석화 광선을 피해 냈다.

‘차라리 제대로 안 보이는 게 훨씬 낫군.’

방금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던 건, 상대의 머리가 있을 법한 방향을 주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뿌옇게 휘날리는 돌가루 덕분에, 고개를 들고도 메두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어서였다.

광선이 뻗어 나오기 전에 잠깐 번득이는 불빛을 보고, 그는 방향을 유추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분진 밖에선 다시 녀석의 복부로 시선을 고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광선을 피하고 자시고 일단 눈이 마주치면, 그대로 석화 저주에 걸려 버릴 테니까.

"슬슬 나올 때가 되었는데."

유진은 뭔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시공투절을 전개하며 메두사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스슥―!

그러다 상대의 뱃속에 소수혈인을 쑤셔 박고 나서는 곧장 옆으로 몸을 날렸다.

지금쯤이면 석화 광선이 날아들 때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몸속을 휘젓는 소리 대신, 날카로운 소음이 울려 퍼졌다.

카앙!

‘음?’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 뻔한 그는 간신히 시선을 낮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메두사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반투명한 유리 같은 직사각형 판에 적중된 소수혈인은 그대로 튕겨 나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화룡왕 엔세데스가 전개하던 정적의 결계와 마찬가지로 시공투절의 공간 도약을 막아 낸 것이다.

츠츠츠츠츠!

이윽고 신전 곳곳에는 큼지막한 유리판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엔세데스가 말했던 거울?’

거울이라 하기에는 아무것도 비추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생김새는 꽤 흡사했다.

일단 시공투절이 막혔으니, 기능 자체는 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유리판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적의 결계처럼 주변을 완전히 감싸는 것도 아니고, 신전 곳곳에 듬성듬성 설치되는 수준이라니.

시공투절은 못 쓰겠지만, 그냥 슬쩍 돌아가서 메두사의 몸뚱이에 천계도살검을 쑤셔 박으면 그대로 끝 아니겠는가.

"별거 아닐 리가 없지."

그러나 블라드 유진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분명 화룡왕이 메두사의 거울을 경고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윽고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번―쩍! 티디디디디딩!

메두사에게서 쏘아진 회색 광선이 반투명한 유리판에 닿더니,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는 게 아닌가.

석화 광선이 거울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쏘아지자, 도무지 어디에 떨어질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상대가 노리지 않을 법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게 최선의 회피 방법이었다.

다행히 유진의 선택은 메두사가 예측한 곳과 전혀 다른 위치였다.

쿠화아아아앙!

탁한 회색 광선이 닿은 곳은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저 반투명한 유리판에 닿을 때마다 석화 광선의 위력이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전의 세 배는 될 법한 범위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문제인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는 광선을 피해서, 메두사에게 다가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짜 거울과는 다르게 입사각과 반사각이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략을 구상하는 동안에도 상대의 공격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메두사는 그야말로 폭주하듯 석화 광선을 쏘아 내는 중이었다.

이러니 그 많은 헌터가 달려들어도 몽땅 조각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틈이 없지는 않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며 블라드 유진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리판은 고정되어 있고, 모서리 부분으로는 광선이 발출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꺾이는 방향은 무작위지만, 각도에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유리판의 옆면은 안전하다. 그렇다면?’

그는 메두사가 석화 광선을 발출하기를 기다렸다가 타이밍에 맞춰서 몸을 날렸다.

번―쩍!

‘지금!’

천군압쇄를 시전하며 달려간 유진은 유리판의 옆으로 슬라이딩했다.

여러 개로 나뉜 신형이 사방팔방으로 이동했지만, 상대의 시선은 진짜를 정확하게 따라왔다.

아무래도 메두사를 속이기에는 천군압쇄의 스킬 등급이 너무 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석화 광선을 피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었다.

티디딩!

그러자 탁한 회색빛 광선이 바로 지척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각이 나오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니, 그를 노리던 공격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 버린 것이다.

블라드 유진은 눈을 빛내며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권능 폭발’로 인해 ‘마신강림’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5분간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최대 세 배로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된 레벨 3,000(EX).]

[‘권능 폭발’로 인해 ‘천계도살검’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그는 그야말로 암자색 빛무리에 휩싸여 있었다.

마신강림으로 인해 능력치가 EX급 최대치인 레벨 3,000까지 증가했다.

그 덕분에 천계도살검마저도 어마어마한 위력을 흩뿌리고 있었다.

닿는 모든 물질을 타락시키고, 영혼을 나락으로 내리꽂는 극악한 마기가 유진의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반투명한 유리판을 지나친 그는 메두사의 복부에 암자색 섬광을 거칠게 쑤셔 박았다.

쿠화악―!

이번에는 시공투절을 시전할 필요가 없었다.

천계도살검은 무지막지하게 단단한 상대의 비늘을 마구 찢어발겨 버렸으니까.

블라드 유진은 거무튀튀한 보랏빛 섬광을 그대로 그어 올리며 허공에 몸을 띄웠다.

푸화아아악!

그러자 메두사의 복부가 갈라지며 암녹색 혈액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그는 시뻘건 섬광이 형형한 눈빛으로 상대를 직시했다.

"쉬, 쉬쉭……."

수백 마리의 뱀으로 된 머리카락 사이로 악귀처럼 일그러진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광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회색 눈동자는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라면 눈이 마주치자마자 석화 저주에 걸려야 하건만, 유진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천계도살검에 의하여 메두사의 신성은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의 권능은 발동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상대의 목을 날려 버리려던 그의 뇌리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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