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15화 (116/226)

15화

운명의 방에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건 다섯 개의 시련 중 하나였다.

저 문을 열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는 차원문이 나타날 터였다.

블라드 유진의 말에 엔세데스는 신기하다는 듯이 문을 살펴보며 말했다.

"분명 방금까지는 존재치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났어. 내 레어 근처에 숨겨져 있던 차원문과는 다르군."

"좌표가 다르다는 건가?"

"물론 그렇겠지만, 내 말의 요지는 없던 게 나타났다는 거야."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던 시련의 차원문을 찾아낼 정도로 드래곤의 감각은 예리했다.

그런 화룡왕의 말이니, 존재치 않았던 문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게 최종 보스로 가는 차원문이라면, 공략대는 왜 안 돌아오는 거지?’

그는 허공에 둥둥 떠 있을 뿐인 갈색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략대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로 가정할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부상자를 치료하느라 차원문을 타는 게 다소 늦는 경우였다.

65명에 달하는 성기사와 힐러들이 따라갔으니, 부상 회복 정도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공략대가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는 공멸인가.’

다른 가정으로는 시련을 통과하긴 했지만, 공략대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그럼 최종 보스에게로 가는 문은 열리나, 공략대원들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확인해 보면 되겠지."

철컥!

짐작 가는 상황이 있었지만, 유진은 생각을 멈추고 곧장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넘실거리는 시뻘건 차원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

화룡왕 엔세데스를 힐끔 돌아본 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스팟!

"나 참, 이봐. 권하지도 않는 건가? 이제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혼자 남은 엔세데스는 붉은 머리칼을 긁적거리더니, 운명의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곳이 지구인지 아닌지, 창문도 없는 기괴한 공간만 살펴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강력한 에너지가 벽면을 꽁꽁 싸매고 있는 거로 보아, 힘을 뚫고 나가려면 고생깨나 할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화룡왕은 차원문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이쪽도 재미있을 것 같으니, 지구 구경은 나중에 하자고."

스팟!

* * *

블라드 유진과 엔세데스가 도착한 곳은 거대한 폭포 근처의 평지였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4층에서 겪었던 시련과 비슷하게 푸르른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웅장한 건물이 존재했다.

"이건……. 신전 같은 느낌이로군. 버려진 지 오래된 것 같아."

곁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화룡왕을 힐끔 돌아보았다.

"신전? 그걸 어떻게 알지?"

"이런 생산성 없는 석조 건물이 숲속에 덩그러니 있는 이유가 뭐겠나? 게다가 사람의 기척이 전혀 없어."

"사람의 기척이라……."

유진은 정육면체의 황갈색 돌을 쌓아 만든 입구 쪽의 벽면을 따라 걸으며 말끝을 흐렸다.

감각을 확장해 보았지만, 엔세데스의 말대로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넬의 신안을 얻었던 곳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와는 다른 신전인가?’

건축 양식부터 시작해서 건물 전체에 서린 신성력까지, 카이넬의 신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확실한 것은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시련의 시작을 알리는 홀로그램 글귀조차 뜨지 않은 상황 아닌가.

벽면을 지나서 입구로 생각되는 곳을 통과하자, 그는 화룡왕이 왜 버려졌다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신전의 내부는 여기저기가 파손된 상태였고,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였으니까.

화룡왕의 레어처럼 함정 같은 건 없는 듯했다.

그런데 신전을 둘러보던 엔세데스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뭔가를 응시하는 게 아닌가.

"이건 좀 흥미롭군."

걸음을 멈춘 블라드 유진은 화룡왕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녀석은 황갈색 조각상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신전의 벽면에 손을 갖다 댔다.

퍼석!

그러자 정육면체의 큼지막한 벽돌이 부스러지며 엔세데스의 손아귀 안에서 가루가 되었다.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단단한 암석을 마치 쿠키처럼 부숴 버린 것이다.

가루가 된 황갈색 벽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녀석은 조각상을 재차 살펴보았다.

유진은 그런 화룡왕의 곁으로 걸어가며 불쑥 질문을 던졌다.

"뭐가 흥미롭다는 거지?"

"신전 건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는데, 조각상은 전혀 그런 게 없어. 게다가 이 조각상 말인데……. 이게 상당히 이상해."

엔세데스의 말을 듣고 보니, 조각상과 신전 건물의 차이가 눈에 확 들어왔다.

같은 재질임은 분명한데, 만들어진 시기가 극명하게 다른 것 같았다.

"누군가가 조각상을 나중에 만들었겠지."

"여긴 아무도 없는데?"

"흠."

차원문이 연결된 곳에 시련이 존재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아마도 두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존재가 이 신전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화룡왕을 속일 수도 있나?’

엔세데스는 차원의 틈새에 숨겨진 문도 찾아낼 정도로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잠에서 깬 직후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암흑화를 EX급 최대치로 전개해도 들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충 어떤 놈이 이런 짓을 했는지 알겠군."

"그게 누구지?"

"그냥 다 알려 주면 재미없지 않나? 천천히 살펴보라고. 의외로 금방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래도 엔세데스는 이 신전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고작 조각상 몇 개만 보고 상대를 짐작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화룡왕 정도면 같은 엘칸 차원에서 활동하는 강자들은 웬만큼 다 파악하고 있는 게 당연했다.

녀석은 휘파람을 불며 신전 안쪽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블라드 유진은 그런 엔세데스의 뒤를 따르며 조각상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것 외에 다른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황갈색 조각상을 그냥 지나치려던 그는 문득 오른편을 휙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한 조각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벽면에 양손을 짚은 채,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조각상.

두려워하는 표정은 현실감 있었고, 눈빛마저도 제대로 표현한 것 같았다.

‘왠지 낯이 익은 것 같군.’

순간적으로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받은 유진은 꽤 오랫동안 조각상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그라고 해도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이윽고 블라드 유진은 먼저 들어간 엔세데스를 따라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한 조각상이 또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낮게 중얼거리는 유진의 목소리에, 신전 이곳저곳을 누비던 화룡왕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왜? 뭐 알아낸 거라도 있나?"

"그렇게 된 거였군."

"아는 사람인 모양이네."

"……."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라드 유진이 발견한 조각상은 한국 파견 성기사대장 폰시아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엔세데스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오호? 그래? 그럼 이쪽으로 와 봐. 여기에도 조각상이 몰려 있으니까."

척! 척!

녀석을 따라간 그는 이내 반원 모양의 진형을 형성한 수십 개의 조각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시영과 루시아, 안지홍 등의 헌터들이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한 모양이었다.

"공략대로군."

상당히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했지만, 유진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한 마디를 툭 내뱉을 뿐이었다.

그러자 엔세데스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와 함께 왔다는 인간 무리 말이지?"

"그래."

"벌써 깡그리 전멸한 모양인데. 신전의 주인을 죽이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야. 무슨 짓을 하더라도 말이지."

"방법 자체는 간단하군."

블라드 유진은 공략대 석상을 지나쳐 신전 안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그러자 탁 트인 넓은 공간에 웬 단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저건?’

마치 카이넬의 신안을 얻었을 때와 같은 모양의 단상.

아니나 다를까, 꼭대기에는 독특한 모양의 번쩍이는 협탁이 있었다.

한데, 그 위에 놓인 반짝이는 물건을 유심히 살피려는 순간이었다.

[모든 괴물의 여왕, ‘반신(半神) 메두사’의 신전에 들어왔습니다.]

[메두사를 처치하여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메두사?"

"오! 내가 던진 힌트로 정답을 알아낸 건가? 이계의 존재가 메두사를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화룡왕은 그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엔세데스는 유진이 홀로그램 글귀를 통해서 시련에 관한 정보를 받는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그는 굳이 홀로그램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화룡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말라고. 설명 정도는 해 줄 테니까."

"해 봐."

"메두사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의 어미이자, 신성을 탐하던 반신. 신을 따라 하려다가 천벌을 받고 본인이 건설한 신전에 처박힌 신세지. 카이넬의 권위에 도전한 죗값을 영원히 치르면서 말이야."

"반신이라……. 생각지도 못한 상대로군."

메두사는 주신 카이넬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을 만들고, 자신을 추앙하도록 종용했다.

그들이 바로 엘칸 차원에 존재하는 몬스터였다.

‘적어도 화룡왕보다는 강하지 않을까?’

고대룡 또한 주신으로부터 자연계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반신이었다.

반면에 메두사는 생명을 창조할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지닌 존재.

드래곤보다 더 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엔세데스는 그런 블라드 유진의 의문점을 금방 해소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추 싸울 만할 거야. 천벌을 받아서 권능이 제한되었으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적어도 화룡왕과 비슷한 수준만 되어도 상대할 만할 테니까.

유진이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화룡왕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그……. 이이제이인가.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군."

엔세데스의 말에 그는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돋았으나, 당장은 질문할 겨를이 없었다.

신전 안쪽에서 괴성과 함께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홀로그램 글귀에서 보았던 모든 괴물의 여왕, 메두사가 언뜻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딱! 슈우우우!

멀찍이 물러난 화룡왕은 탁상과 의자를 소환하더니, 손끝으로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 싸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밝힌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조언 정도는 해 주었다.

"아까 조각상 봤지? 메두사는 석화 저주를 걸 수 있어.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심하지."

상대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건 상당한 페널티였다.

눈빛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아, 그리고 녀석에게는 거울이 있어."

"그게 무슨 뜻이지?"

"그냥 거울이 있다는 말이야. 힌트는 여기까지지만, 잘 새겨들으라고."

엔세데스의 알쏭달쏭한 말이 끝난 직후, 블라드 유진은 담담하게 신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부터 더 캐물을 마음도 없었고, 그래 봐야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이윽고 단상 주변을 맴돌던 거대한 형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며 괴성을 내질렀다.

"샤아아아아!"

[‘반신 메두사’의 거대한 권능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지고한 정신력이 권능에 저항합니다.]

[디버프의 일부가 해제되고 지속 시간이 소폭 줄어듭니다.]

[현재 능력치 감소율 : 25%]

[메두사의 권능 지속 시간 : 1시간]

"허."

좌르륵 떠오른 홀로그램을 쳐다보며 그는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방금 엔세데스가 한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권능이 제한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