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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14화 (115/226)

14화

‘키에리?’

유진은 미간을 좁히며 엔세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한 눈빛이 스치자, 상대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모르나?"

"모른다."

"이상하군. 그 기술을 쓸 수 있다면, 그자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거짓이 아니라는 게 문제로군."

화룡왕의 말을 들은 그는 상대의 능력치 정보에서 보았던 글귀를 불현듯 떠올릴 수 있었다.

‘진실의 판별자.’

드래곤의 종족 효과에는 진실의 판별자라는 문구가 있었다.

아마도 이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드래곤 특유의 능력인 모양이었다.

"쓰읍! 아무리 꿰뚫어 봐도 똑같아."

엔세데스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손을 휘저었다.

휘익! 털썩!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서 화려한 형태의 의자가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화룡왕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오른손을 대충 들어 보였다.

휘이익!

이윽고 블라드 유진의 앞에도 쿠션이 붉은 벨벳으로 된 의자가 날아와 바닥에 놓였다.

그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엔세데스는 어느새 큼지막한 술잔을 쥐고 있었다.

"잠이 덜 깨서 좀 난폭했던 것 같군. 이제야 진정이 되네. 근데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건가?"

더 이상 상대에게서는 저릿저릿한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급변한 분위기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유진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저 화룡왕의 뒤편에 널브러져 있는 붉은 칼날 더미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공투절로 수도 없이 쑤셔 박았던 소수혈인은 이미 화룡왕의 몸에서 다 빠져나온 듯했다.

그의 손을 떠났지만, 핏빛 칼날들은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의 몸속으로 공간 이동시킬 용도로 만든 거라, 멀어져도 변형되지 않도록 권능의 결속력을 강화했기 때문이었다.

츠츠츠츠츠!

블라드 유진의 의지가 발현되자, 소수혈인의 무더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피의 권능은 시뻘건 운무(雲霧)로 변하여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엔세데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인가.’

싸움이 끝까지 간다면,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상대의 레벨은 그보다 903이나 높았기에, 불리한 건 사실이었다.

아마 마신강림에 천계도살검까지 동원하고도 패배할 수 있었다.

일단 상대가 먼저 전의를 거두어들였으니,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진은 엔세데스가 소환한 의자에 착석했다.

스윽! 척!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군. 한잔할 텐가?"

그가 자리에 앉자, 상대는 입가로 기울이던 술잔을 들어 보였다.

뱀파이어는 혈액 외의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몇 가지 음료는 예외적으로 마실 수 있었다.

술이나 커피 따위가 그런 종류였는데, 일족 중에서는 취미로 차를 즐기는 자들도 간혹 존재했다.

블라드 유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엔세데스가 슬쩍 손을 휘저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술잔이 그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휙! 척!

자연스럽게 유리잔을 받아든 유진은 찰랑거리는 붉은 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작은 의심이 솟아올랐지만, 자신보다 훨씬 강한 레드 드래곤이 장난을 쳐 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천천히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자 엔세데스는 피식 미소를 짓더니 붉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 근방에서 나는 아만베리로 만든 과실주야. 물론 따로 증류 과정을 거친 거라 독하지. 독극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

"……."

마지막 말은 그냥 농담인 것 같았다.

뱀파이어에게 독이란, 성수나 신성력 따위를 의미했다.

체내로 들어온 액체쯤이야 얼마든지 배출할 수 있으니, 독극물이라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는 거로 보아, 확실히 이상한 액체는 아닌 듯했다.

맛 자체는 이제껏 마셔 보았던 그 어떤 술보다 좋았다.

"향이 좋군."

"그렇지? 난 아만베리가 이래서 좋다니까? 다른 과실주는 이런 향이 안 난다고."

블라드 유진의 말에 화룡왕은 맞장구를 치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종족 효과에 ‘놀랍게도 다혈질’이라는 글귀가 있더니, 진짜로 성격이 그런 모양이었다.

‘득도한 자의 지혜도 있었던 것 같은데, 서로 너무 다르지 않나?’

문득 의문이 생겼지만, 사실 저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키에리는 뭐지? 내가 사용한 기술과 무슨 관련이 있나."

"아! 그거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 키에리는 마계의 군주, 세 마왕 중 하나의 이름이다."

"마왕?"

"피의 제왕 키에리 라비에스. 모든 사악한 것들의 시초이자, 어둠의 권속을 지배하는……. 그러고 보니 너도 뱀파이어로군. 그런데 뭔가 느낌이 좀 달라."

엔세데스는 그의 정체를 손쉽게 알아차렸다.

‘진실의 판별자’라는 종족 효과로 인해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카이넬의 신안에 탑재된 관조 스킬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론 능력치 정보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쨌거나 키에리 라비에스에 관련된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유진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자, 화룡왕은 고개를 갸웃하며 처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역시 모르나?"

"처음 듣는 이름이로군."

"쓰읍! 그럼 넌 마계의 인물이 아니라는 소린데……."

"한데, 마계라고 했나?"

"그래. 여기서 그리 멀지도 않은 동네지. 차원이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하니까. 근데 지금 네가 구사하는 언어도 마족어 아닌가?"

"잠깐 들러 본 적이 있다. 게일드 백작령이었지."

"호오? 그랬군. 거긴 못 들어 본 곳인데. 나는 용마대전(龍魔大戰)을 치르고, 휴식기에 들어갔거든. 좋아. 어디 이야기를 좀 들어 보자고. 계속해 봐. 넌 어디서 왔지?"

엔세데스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양손을 펼쳐 보였다.

자신의 레어에는 뭐하러 들어왔는지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을 뗐음에도 화룡왕의 유리잔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한 방울의 술도 흘리지 않았다.

드래곤이 부리는 마법의 힘인 모양이었다.

조금 귀찮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나름 꽤 상세하게 지구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잘하면 이 레드 드래곤으로부터 좀 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지구에 관해서 그가 모르는 부분도 있었기에, 설명은 최대한 간결하게만 했다.

그럼에도 화룡왕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런 세상이 있다니, 신기한 곳이로군. 어쨌거나 그쪽 말로 하면, 이건가? 이이제이."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압한다. 현 상황과 딱 들어맞는군."

"마족 놈들이 지구와 엘칸의 공멸을 바라는 모양인데……."

엘칸에는 카이넬을 모시는 크로노렌 신성 제국과 마계와 연결된 악시움 암흑 제국이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작은 왕국들이 있었지만, 크게 두 제국이 대립하는 구도였다.

마계는 악시움 제국을 통해서 엘칸을 지배하려 했다.

마족 놈들은 동시에 지구에도 마수를 뻗쳤다.

지구와 엘칸을 연결하여 눈엣가시들을 제거하려는 심산이었다.

더불어 헌터들의 힘이 약해지면, 지구도 겸사겸사 점령하고 말이다.

"노리는 건 크로노렌 신성 제국과 우리 드래곤인가. 어떤 놈이 기획한 건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좀 썼구먼."

엔세데스의 혼잣말에 유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번 시련은 지금껏 상대해 왔던 놈들과는 영 달랐다. 성기사에 신전, 이어서 드래곤까지. 어쨌거나 이자와는 싸우지 않는 게 좋겠군.’

굳이 마계 놈들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는 화룡왕과 결판을 내겠다는 일말의 여지를 완전히 지워 버렸다.

하지만 그러고 나자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이 드래곤을 죽이지 않는다면, 시련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지막 시련은 화룡왕 엔세데스를 처치하는 것이었다.

미간을 살짝 좁힌 유진은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싸우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바로 조금 전이었는데, 결국에는 이자를 죽여야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엔세데스는 술을 마시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할 말 있나?"

"……시련을 끝내려면 널 죽여야 한다. 그래야 차원문이 열리거든."

블라드 유진이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자, 화룡왕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 앞에서 그런 소릴 하다니, 너무하는 거 아닌가? 게다가 싸움도 진작 끝났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다. 돌아갈 방법을 모르니까."

"그래? 흠 어디 보자……. 공간 이동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데, 차원을 관통해야 한다는 게 문제로군."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엔세데스는 문득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거슬리게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있었는데, 혹시 이건지 모르겠군."

화룡왕은 잠깐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더니 오른손에 충만한 에너지를 와락 움켜쥐며 눈을 번쩍 뜨는 게 아닌가.

―나와라!

투우우웅!

그러자 묵직한 에너지의 파동이 뻗어 나와 주변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잠시 후, 상당히 익숙한 형태의 방문이 허공에 불쑥 나타났다.

"짜잔! 절대라는 건 없지. 봐 봐. 내가 안 죽고도 돌아갈 길이 생겼잖아?"

"어떻게 한 거지?"

"용언 마법이다. 언령에 의지를 부여해서 실현하는 거지. 아까부터 거슬리는 감각이 있더라고."

"……."

상대의 놀라운 능력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척! 척! 덜컥!

자리에서 일어난 유진은 평범한 갈색 문으로 다가가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새빨간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차원문이 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이게 그 차원문이로군. 신기한데? 하도 차원을 넘어 다니다 보니, 이런 것도 만들 줄 아는 모양이네. 마족 놈들도 참 많이 발전했어."

어느새 엔세데스는 그의 곁에 다가와 차원문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라드 유진은 차원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스팟!

이윽고 그는 운명의 방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왔군.’

네 번째 시련은 상당히 이상하게 끝나고 말았다.

화룡왕 엔세데스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차원문을 찾아서 운명의 방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성공했다.

과연 이게 시련을 제대로 클리어한 거로 인정되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결과는 공략대가 도착해 봐야 알 수 있는 건가."

"……뭘 알게 된다는 거지?"

"음?"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유진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편에는 훤칠한 키의 붉은 머리 미남자가 서 있었다.

엔세데스도 차원문을 통과하여 지구로 넘어온 것이다.

"괜찮은 건가?"

"뭐가 말이냐?"

"이쪽 차원으로 넘어와도 상관없는지 묻는 거다."

"음. 로드에게 걸리면 욕 좀 먹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너희도 막 넘어 다니잖아. 뭐가 문제지?"

"……."

즉각적으로 돌아온 대답에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족이나 인간 또는 뱀파이어도 차원을 넘나드는데, 드래곤이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나.

따지자면 저들은 차원 여행에 훨씬 더 특화된 종족이 아니었던가.

무지막지하게 강한 데다가, 몸뚱이까지 엄청나게 단단했으니까.

‘알아서 하라지.’

녀석이 지구로 넘어오든 말든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행보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야 말릴 이유가 없었다.

번―쩍!

그런데 문득 둘의 뒤편에서 붉은 빛무리가 번득이더니,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돌린 유진은 미간을 좁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게 왜 다시 나타난 거지?"

두 사람의 감각에 걸린 것은 이제껏 몇 번이나 보았던 평범한 나무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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