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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13화 (114/226)

13화

혹시나 알아들을까 싶어서 마족어로 중얼거린 그는 곧장 소수혈인을 뽑아 들었다.

스이잉!

그러자 화룡왕 엔세데스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돌변하며 강렬한 의지가 뇌리를 강타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내 단잠을 깨우고 도발까지 해?

놀랍게도 녀석은 유진의 마족어를 똑똑히 알아듣고 거친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허공을 향해서 다시 한번 아가리를 쫙 벌렸다.

하늘을 날고 있던 그에게 브레스를 쏘아붙이려는 의도였다.

[‘화룡왕 엔세데스’의 드래곤 브레스가 전개됩니다.]

[이 일대에서의 스킬 사용이 30초간 차단됩니다.]

쿠화아아아아!

시뻘건 고에너지 집약체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흩뿌려지며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강한 힘에 기체가 쭉 밀려 나가며, 브레스의 중앙이 일순간 진공 상태가 될 정도였다.

"읏!"

두두두두두!

스킬 사용이 30초간 차단되었지만, 녹턴의 비행은 고유 능력이라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유령 군마는 허공을 수놓은 드래곤 브레스의 향연을 피해 초고속으로 날아다녔다.

그러자 한바탕 시뻘건 기운을 토해 낸 엔세데스가 눈을 흉포하게 빛내며 포효했다.

"크르르르! 크콰아아아!"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녹턴의 존재가 상당히 거슬린 모양이었다.

하긴 화룡왕은 이곳에서 절대자에 가까운 존재일진대, 오늘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브레스가 두 번이나 빗나가는 것은 수만 년을 살아온 고대룡에게 굉장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아마 자신의 손톱보다도 작은 상대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일 것이다.

―곱게 죽지는 못하게 해 주마. 정적(靜寂)의 결계.

드드드드드드!

엔세데스의 전신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발산되자, 지축이 뒤흔들리며 화산의 경계 부근에 기묘한 빛 가루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녹턴을 타고 날아다니던 블라드 유진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막대한 힘이 빠져나가는 건 느껴졌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짝이는 가루들은 이내 사라져 버렸고, 주변은 기이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이제 좀 맞힐 만하겠군. 어디 그럼 시작해 볼까? 크하하하!

화룡왕의 걸걸한 목소리가 뇌리에 울려 퍼지는 순간, 허공에 시뻘건 무언가가 불쑥 생겨났다.

처음에는 한 줄기 선에 불과했던 게 점점 수를 늘려가더니, 어느샌가 허공에 거대한 판을 만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마그마로 이루어진 불타는 창이었다.

수천 발의 마그마 스피어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르륵 늘어서자, 마치 널찍한 판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엔세데스는 앞발을 내리찍으며 거세게 날개를 펼쳤다.

쿠화아앙! 쉬쉬쉬쉬쉭!

그러자 빽빽하게 늘어서 있던 수천 발의 마그마 스피어가 동시에 발출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목표는 녹턴을 타고 날아다니던 유진이었다.

"온다."

자신을 향해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지는 붉은 창의 향연을 본 그는 비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령 군마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저 엄청난 크기의 화망(火網)을 모조리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유진은 녹턴의 갈기를 살짝 잡아당기며 화산과 최대한 먼 곳까지 잠깐 피하려 했다.

아무래도 멀리 이동하면 마그마 스피어의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두두두두두! 터엉!

"이히히힝!"

그런데 허공을 질주하던 유령 군마가 몸을 뒤틀며 옆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뒤로 크게 젖혀지는 걸 보아하니,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휘리리릭!

"크윽!"

찰나 간에 제어를 잃은 녹턴은 빙글빙글 돌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그러는 동안에도 수천 발의 마그마 스피어는 그를 뒤쫓아 물고기처럼 방향을 휙휙 전환하고 있었다.

아마 낙하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면, 방금의 충격으로 덜미가 잡혔을 것이다.

‘대체 뭐였지?’

블라드 유진은 거슬려서 옆으로 치워 놓은 홀로그램 글귀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그는 금방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화룡왕이 시전한 정적의 결계로 인해, 화산에서 일정 거리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고속 이동 중의 충격으로 유령 군마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분간 비행 제어가 불가합니다. 지면에 닿기 전에 탈출하십시오.]

슈우우우우!

떨어지는 속도가 점점 올라가는 중인데도 유진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다.

상당한 높이였지만, 뱀파이어 로드의 육신은 그까짓 낙상으론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했다.

‘그렇다고 홀로그램에 적힌 대로 탈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충격을 견디느라 움직임이 둔해진 사이, 그대로 쑤셔박힐 마그마 스피어가 문제였다.

츠츠츠츠츠!

손에 피의 권능을 발현한 그는 녹턴의 뒷덜미를 짚었다.

붉은 기운이 유령 군마의 체내로 쭉 빨려 들어가자, 새로운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피의 권능이 유령 군마의 혼란을 일순간 억제합니다.]

[임시방편일 뿐이라, 회복 효과가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혼란 상태에 빠지기까지 남은 시간 : 30초]

"이히히힝!"

두두두두두!

삽시간에 제정신을 차린 녹턴은 재빨리 다리를 놀리며 허공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따르던 마그마 스피어와의 거리가 빠르게 벌어졌다.

‘들어가!’

슈화악!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던 유령 군마는 어느 순간 갑자기 그림자에 녹아들 듯 사라져 버렸다.

어차피 혼란 상태에 빠지면 비행할 수 없으니, 안락한 동반자창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슈우우우우! 타닥!

녹턴이 질주하던 가속도에 의해서 앞으로 쭉 날아가던 유진은 눈을 번득이며 소수혈인을 뽑아냈다.

스이잉―!

그런 그의 뒤를 쫓아서 마그마 스피어들이 물고기 떼처럼 달려들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수천 발의 마법에는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마그마 스피어를 제어하고 있는 엔세데스만 주시하고 있었다.

‘승부다.’

스슥―!

[EX급 스킬 ‘시공투절(時空透切)’이 시전되었습니다.]

[‘권능 폭발’로 인해 ‘시공투절’이 EX급 최대치의 위력으로 적용됩니다.]

[시공투절의 지속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아직 화룡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유진은 두 자루의 핏빛 칼날을 망설임 없이 내질렀다.

스핏! 스핏!

그런데 허공을 격하던 소수혈인이 번득이는 붉은 빛과 함께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는 피의 권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며 새로운 핏빛 칼날을 계속 만들어 냈다.

당연히 그렇게 생성된 소수혈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자 브레스를 발출하려던 엔세데스가 움찔거리며 머리를 흔드는 게 아닌가.

―크윽! 이, 이것은……!

그와 동시에 블라드 유진의 뒤를 따르던 마그마 스피어들이 힘을 잃고 엉뚱한 곳에 처박히기 시작했다.

콰직! 콰앙! 퍼버버벙!

화룡왕의 제어가 끊기는 바람에 유도 기능이 제대로 발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시.’

그는 마그마 스피어가 날아드는 동안에 엔세데스가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 유도 마법의 원리를 알아차렸다.

마법을 원하는 대로 날려 보내려면, 시전자가 계속 의지를 발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안다고 해서 손쉽게 파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엄청난 방어력을 지닌 드래곤의 집중을 끊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시공투절을 시전하여 화룡왕의 체내에 소수혈인을 마구 집어넣었다.

외피가 단단하다고 해서 속살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몸속에 고농축 에너지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이물질이 발생한다면, 제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먹힌다. 활로를 찾았어.’

시공투절과 소수혈인을 시전할 때마다 어마어마한 피의 권능이 소진되었지만, 그는 결단코 멈추려 하지 않았다.

승기를 잡았을 때 놈을 끝장내지 못하면, 되레 역습당해 패할 확률이 너무도 높았으니까.

그만큼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한데, 무수한 공격을 얻어맞던 화룡왕 엔세데스가 큰 무리 없이 앞발을 까딱거리는 게 아닌가.

그러자 하늘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백 발의 마그마 스피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엉뚱한 곳에 처박혔지만, 발사하지 않은 마법들이 꽤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쏴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통증이 전신을 관통하고 있을 텐데도, 무리 없이 마법을 제어하는 모습에 유진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정신력이로군."

쿠콰콰콰콰쾅!

지면에 떨어진 건 고작 수십 발에 불과했지만, 마법의 위력은 사뭇 대단했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뜨거운 마그마를 쏟아 내는 마법이라니.

그게 수백 발이나 된다면, 그가 서 있던 암석 지대는 순식간에 용암 천지로 변할 터였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이미 유도 마법의 파훼법을 완벽하게 체득한 상태였다.

상대의 정신 집중을 깨뜨려 마법을 엉뚱한 곳으로 보낸 다음, 유유히 몸을 피할 작정이었다.

스이잉! 스슥―!

그는 곧장 소수혈인을 엔세데스의 몸속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한데, 화산 꼭대기에 있어야 할 화룡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음?"

육중한 몸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조차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블라드 유진의 감각에 뭔가가 딱 걸려들었다.

쉬이이이익! 스슥―!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물체를 인지하자마자, 그는 시공투절을 시전하며 잽싸게 몸을 빼냈다.

푸부부부북!

방금까지 유진이 있던 자리에 작렬한 것은 놀랍게도 6m 길이의 핏빛 칼날, 소수혈인이었다.

수백 자루의 칼날이 지면에 거꾸로 박힌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레드 드래곤의 체내에서 지속 피해를 주고 있어야 할 소수혈인들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블라드 유진은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려 감각을 확장하면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화룡왕 엔세데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엉뚱한 장소에서 유창한 마족어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전투 방식이 그자를 많이 닮았군."

그는 흠칫 놀라며 허공에 불쑥 모습을 드러낸 붉은 머리의 미남자를 주시했다.

마치 투명한 장막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걷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유진은 상대가 엔세데스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보았다.

상식적으로 이 지옥 같은 화산에서 유유히 돌아다닐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공투절을 시전하며 소수혈인을 쑤셔 박았다.

스슥―! 스캉!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공격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마치 상대와 자신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도 존재하는 듯했다.

"정적의 결계다. 그걸 간단히 넘을 수는 없을 테지."

딱!

화룡왕 엔세데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유진은 그제야 결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화산 전체에 퍼져 있었던 정적의 결계는 그의 주변 5m 거리까지 극단적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뚫지 못할 수준은 아니야. 천계도살검이라면, 일격에 부술 수도 있다.’

블라드 유진은 핏빛 칼날이 정적의 결계를 살짝 관통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따위 장벽 정도야 금방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러는 동안, 저 무시무시한 레드 드래곤이 잠자코 있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는 소수혈인을 늘어뜨린 채, 화룡왕 엔세데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녀석이 뭔가를 말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네놈……. 마왕 키에리와는 무슨 관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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