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시공투절(時空透切)’ 스킬이 해방됩니다.]
라바 골렘을 처치함으로써 봉인율이 5%가 내려간 결과, 블라드 유진은 EX급에 오르게 되었다.
그저 한 단계 등급이 상승했을 뿐이지만, 사실상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드디어 최전성기의 자신이 사용하던 스킬이 대부분 해방되었으니까.
그는 스킬 정보창을 열어, EX급이 되면서 변경된 모든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공투절이 추가된 것 외에 아직 변한 것은 없었다.
이제 막 EX급에 오른 터라, 스킬에는 미처 영향을 미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EX급이 되면서 6일이나 남았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었다.
이러면 앞으로 EX급 스킬들을 한 번씩 쓸 수 있었다.
아마 천공의 성 공략이 좀 더 수월해질 터였다.
‘페널티가 없는 건 마음에 든다.’
홀로그램을 켜 보니, 반가운 글귀가 떠올라 있었다.
시공투절의 스킬 정보창이었다.
유진은 희미한 미소를 유지한 채, 설명을 쭉 읽어 보았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한번 제대로 살펴보고 싶었다.
<스킬 정보>
명칭 : 시공투절(時空透切)
등급 : EX 위력 : EX+
사거리 : 시야 거리
지속 시간 : 30분
재사용 대기 시간 : 3시간
소모 자원 : 피의 권능
효과 : 도약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웜 홀을 뚫을 수 있음.
시공투절은 그야말로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이 스킬은 무려 30분간 마음껏 웜 홀을 만들면서 싸우는 괴물이 되게 해 주었다.
최전성기의 블라드 유진, 시련의 결정체가 바로 그런 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카이넬의 성검을 웜 홀로 찔러 넣는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난도질당해 쓰러지는 건 아마 그였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기분이로군."
미소를 지은 채 홀로그램을 확인하던 유진은 문득 고개를 들어 화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화산 활동은 잠잠해진 상태였다.
그는 라바 골렘이 있던 곳으로 천천히 접근해 보았다.
역시나 움푹 파인 구덩이만 존재할 뿐, 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뒤였다.
‘까다로운 녀석이다. 이런 게 우르르 몰려나온다면, 좀 곤란하겠는데.’
블라드 유진은 감각의 범위를 확장해 가며 화산 주변을 세밀히 탐색해 보았다.
방금의 폭발에 휘말려서 저 멀리 쓸려 내려간 모양인지, 보스 라바 골렘 주변에 우글거리던 다른 놈들은 화산 아래쪽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운 좋게도 그는 라바 골렘들과 더 싸우지 않고 화산 위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드래곤의 레어답게 유진의 행보를 방해하는 존재는 무수히 많았다.
파지지직! 쿠화아아아! 콰앙!
특히 화산의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는 온갖 종류의 속성 공격이 이어졌다.
뇌전이 쏟아짐과 동시에 화염 방사와 폭발이 연속으로 터지자, 그는 뒤로 슬쩍 물러나 계단을 살폈다.
"압력판인가. 고전적이네."
이런 함정은 어디서나 볼 법한 종류였다.
지뢰가 딱 이렇게 발동되는 현대 무기니까.
블라드 유진은 화산 꼭대기까지 쭉 이어진 계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굳이 걸어갈 필요는 없지. 녹턴."
"푸르르! 푸륵!"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녹턴은 반갑다는 듯이 투레질했다.
두두두두두!
녀석의 등에 올라탄 그는 허공을 질주하여 계단 끄트머리의 평평한 지형까지 그대로 질러 버렸다.
그야말로 함정을 깡그리 무시하며 지나친 것이다.
원래라면 이곳을 통과할 때 라바 골렘들이 용암 덩어리를 마구 투척해야 정상이었다.
첫 번째 녀석의 대폭발로 녀석들이 쓸려나간 덕분에, 유진은 아무런 방해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화룡왕이라는 존재의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왜 아무것도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그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려 온 것이다.
불현듯 블라드 유진은 화산 꼭대기의 거대한 붉은 암석에 시커먼 세로줄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설마 이거……."
쿠구구구구구!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화산 꼭대기의 커다란 붉은 암석이 느닷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발견했던 시커먼 세로줄은 무지막지한 덩치를 지닌 괴물의 동공이었다.
"그우우우우우!"
놈은 광활한 울림통을 거세게 진동시키며 천둥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붉은 비늘에 뒤덮인 날개를 활짝 펼치자, 순간적으로 화산의 꼭대기가 서너 배는 커진 것처럼 보였다.
마룡 카제르시안은 가볍게 넘어설 정도였고,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보다는 날렵한 모습이었다.
거센 풍압을 버티며 주춤주춤 물러서려는데, 홀로그램 글귀가 우르르 떠올라 눈 앞을 가렸다.
[‘화룡왕 엔세데스’의 드래곤 피어와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지고한 정신력이 드래곤 피어에 저항합니다.]
[한 번 저항했던 정신 공격이라, 드래곤 피어의 영향력이 극도로 줄어듭니다.]
[현재 능력치 감소율 : 10%]
[드래곤 피어 지속 시간 : 10분]
마지막 시련으로 넘어오면서 겪어 보았던 능력이라서 그런지, 두 번째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능력치 감소 10%에 지속 시간 10분이면, 그럭저럭 큰 피해는 아니었다.
적어도 라바 골렘과 싸울 때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그 라바 골렘을 창조한 드래곤이라는 사실이었지만.
―내 단잠을 방해하다니, 뒈지고 싶어서 환장한 놈이로구나.
한 차례 풍압이 지나간 뒤에 고개를 들어 엔세데스를 바라보자, 강력한 의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레니가 하는 것처럼 의지를 직접 전달하는 의사소통 방식이었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된 드래곤의 의지는 뇌리를 가득 장악한 상태로 윽박지르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번―쩍! 쿠구구구구구!
이윽고 화룡왕이 안광을 번득이는 순간, 무시무시한 살기의 파동이 화산 꼭대기에 작렬했다.
마치 기압이 수십 단계는 더 올라간 듯한 느낌에 도무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엔세데스는 거대한 앞발을 들더니, 화산 꼭대기의 평지를 후려갈겼다.
흡사 모기를 때려잡는 듯한 움직임이었으나,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콰아아앙! 쿠콰콰콰콰!
거대한 암석이 진흙처럼 뭉그러지면서 용암과 함께 산비탈을 타고 튕겨 나갔다.
그 어떤 생명체라도 방금의 일격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했을 터였다.
화룡왕 엔세데스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아가리와 코에서 불길을 내뱉으며 강력한 의지를 발산했다.
―호오? 이걸 피해? 그럼 어디 이것도 회피해 보거라.
녀석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쳐다보더니, 대뜸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러자 방금 느껴졌던 어마어마한 압력이 다시 한번 주변을 덮치는 게 아닌가.
그다음 순간, 엔세데스의 아가리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화룡왕 엔세데스’의 드래곤 브레스가 전개됩니다.]
[드래곤 브레스는 주변의 마나는 물론이고, 모든 에너지를 일순간 동결합니다.]
[이 일대에서의 스킬 사용이 30초간 차단됩니다.]
마치 분출하는 활화산과 같은 형상의 에너지 집약체는 높다란 산으로 날아가 중턱에 그대로 작렬했다.
쿠화아아아아!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엄청난 양의 기체가 사방으로 쫙 밀려 나가며, 폭음과 진동이 대지를 관통했다.
마치 땅속 깊숙이 있어야 할 지진의 진원지가 지표면으로 올라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콰과광! 드드드드드드!
시뻘겋게 변한 중턱이 녹아내리면서 산꼭대기가 폭삭 주저앉았다.
놀랍게도 푸르른 녹음이 펼쳐져 있던 그곳은 이제 유황 기체와 열기로 가득 들어찼다.
그 무시무시한 광경과 주르륵 떠오른 홀로그램 글귀를 바라보던 블라드 유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도 강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두두두두!
그는 녹턴을 타고 화산의 상공을 비행하는 중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유령 군마의 비행 능력 덕분이었다.
물론 화룡왕의 앞발 공격 정도야 유진의 속도로도 충분히 피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꼭대기의 평지를 벗어나면, 도무지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화산의 중턱 위쪽으로는 온통 용암에 뒤덮여 있고, 그나마 멀쩡한 곳이라고는 길게 이어진 계단뿐이었다.
온갖 함정이 설치된 그곳으로 몸을 날리느니, 용암 위에서 악염도로 보드를 타는 게 차라리 나을 터였다.
게다가 저 무지막지한 브레스 공격은 도저히 도보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방금도 녹턴의 고속 비행이 아니었다면, 시뻘건 에너지의 집약체에 적중당해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유유히 화산 상공을 날아다니며 화룡왕을 관찰할 수 있었다.
‘트리 페 디타스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다.’
녀석은 삼두마룡보다 다소 작았지만, 움직임이 훨씬 빨랐고 비행까지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트리 페 디타스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존재했다.
엔세데스는 마기에 오염되지 않아, 또렷한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드라코 도무스에서 블라드 유진은 마룡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화룡왕 엔세데스는 어떠한가.
의지를 직접 발현하여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았나.
아마 삼두마룡보다 더욱더 영리하게 전투에 임할 터였다.
‘일단은 어떤 놈인지 좀 알아봐야겠구나. 관조.’
[EX급 관조 스킬로 EX급 화룡왕 엔세데스를 파악합니다.]
유진의 흑요석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순간 황금빛으로 번득였다.
그러자 엔세데스에 관한 정보가 그의 눈앞에 쫙 펼쳐졌다.
<능력치 정보>
이름 : 화룡왕 엔세데스
레벨 : 2,412
등급 : EX
종족 : 레드 드래곤(고대룡)
종족 효과 : 초월적인 지능, 득도한 자의 지혜, 불로불사, 철혈의 신체, 진실의 판별자, 놀랍게도 다혈질, 자존심 강한 승부사, 지독한 게으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능력치지?"
유진과 같은 EX급이지만, 화룡왕의 레벨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그는 2천이 넘는 수치를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자신의 능력치 정보창이 아닌 곳에서 말이다.
자못 당황한 표정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뜨끔한 무언가가 심장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아래쪽을 쳐다보자, 어느새 엔세데스가 블라드 유진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새 내 감각을 속이고 도망쳐?
이글거리는 녀석의 안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험난한 싸움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힘들다고 물러설 생각 따윈 애초부터 하지도 않았다.
"네놈이 느린 탓이지. 덤벼라. 빨간 도마뱀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