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부에서 초열지옥 역풍이 터졌음에도 라바 골렘의 몸은 폭발하지 않았다.
"음냠! 쩝! 쩝!"
대신에 녀석은 괴성에 가까운 용트림을 하더니, 그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만약 저 녀석에게 제대로 된 머리가 달려 있었다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이다.
"이거 재미있는 놈이로군."
스킬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으나, 블라드 유진은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되레 흥미로운 눈빛으로 라바 골렘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차피 초열지옥 역풍은 간단한 견제에 불과했으니까.
이걸로 큰 이득을 보겠다는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반응을 보니, 화염 계열에는 거의 면역이겠구나. 악염도도 그다지 쓸모없겠는데.’
30분일 뿐이지만, 그의 몸에는 드래곤 피어에 의한 20%의 레벨 감소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게다가 뱀파이어 로드의 극강 스킬이라고 할 수 있는 천계도살검과 마신강림 또한 써 버린 상태.
사실상 팔다리에 커다란 모래주머니를 차고 싸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못 이길 수준은 아니지."
스이잉! 챠앙!
블라드 유진은 부채 모양으로 펼쳐 두었던 소수혈인의 칼날을 하나로 합치며 왼손에 쥐었다.
그러자 무지막지하게 큰 핏빛 칼날이 전방을 향해서 쭉 뻗어 나왔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 길이의 물체를 들고 있으면, 한쪽이 축 처지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게 중심이 멀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수혈인은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에너지의 결정체.
그저 닿는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뿐, 무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상황에 따라 길이와 두께는 그의 의지대로 신속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아무리 길어도 초고속으로 휘두르고 회수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후웅! 스캉!
"그우욱?"
허공에 시뻘건 빛무리를 수놓은 칼날이 가슴팍으로 쇄도했지만, 라바 골렘은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굼뜨고 멍청한 듯한 소리를 내뱉으며 피격당한 부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자 놈의 외피가 쩍 갈라지며 검붉은 용암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치이이이!
하지만 흐르던 용암은 금방 굳어 버렸고, 붉은 기가 돌던 상처 부위는 이내 원상태로 복구되었다.
폭사에 당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 위력으로도 회복을 막을 순 없는 건가. 소수혈인에 의지를 불어 넣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뱀파이어가 EX급이 되면 피의 권능에 의지를 부여하는 게 가능해졌다.
마치 얼마 전에 상대했던 최전성기의 자기 자신처럼 말이다.
대상을 타락시키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상처 부위의 회복을 저지하는 효과 정도는 기대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소수혈인이 천계도살검의 하위 호환 격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SS급인 상태에서 당장 그런 능력을 바라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저런 녀석에게 카이넬의 신안을 사용하는 건 아까운데."
카이넬의 신안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려 한 달에 달하는 아이템이었다.
손쉽게 상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고작 중간 보스급에 불과한 라바 골렘에게 쓸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이 화산의 주인인 화룡왕 엔세데스 정도는 되어야 수지타산이 맞으리라.
‘그렇다면 결국에 이놈은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건데…….’
그가 고뇌에 잠긴 동안, 가만히 서 있던 라바 골렘이 드디어 뭔가 활동을 개시했다.
마치 지금까지는 탐색전에 불과했다는 듯이 녀석은 상당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우욱?"
멍청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는 달리, 놈의 몸놀림은 엄청나게 빨랐다.
쿠구구궁!
라바 골렘이 허공을 향해서 팔을 크게 휘둘렀지만, 유진은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소수혈인을 놀리는 데 집중했다.
녀석의 공격이 헛방을 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멀찍한 거리에서 주먹을 붕붕 휘두르고 있으니, 초월적인 신체 능력을 자랑하는 그에게 닿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블라드 유진은 눈에 이채를 띠며 잽싸게 몸을 날려야만 했다.
쭈화아아악!
눈 깜짝할 새 놈의 주먹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타닷! 쉬이이익!
내심 살짝 놀랐던 그는 신속하게 측면으로 빠져나오며 라바 골렘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유진은 녀석의 공격이 어째서 그토록 빨랐는지 알 수 있었다.
"팔을 늘렸군."
놀랍게도 놈은 주먹을 휘두르면서 팔을 신장의 다섯 배가 넘을 정도로 늘려 버렸다.
그러니 무려 30m에 달하는 거리를 단축하며 펀치가 날아들었던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감탄했지만, 그의 대응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반격은 반격이었으니까.
스캉―!
소수혈인을 강하게 올려 치자, 길게 늘어났던 라바 골렘의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갔다.
원래라면 엄청난 두께 때문에 제대로 잘리지 않고, 아까와 같은 결과만 낳았을 터였다.
그러나 길이를 연장하느라 팔이 가늘어진 탓에 소수혈인의 위력을 오롯이 다 감내해 낼 수가 없었다.
쿠웅! 치이이익!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지만, 라바 골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용암에 팔을 박아 넣더니, 금방 신체를 복구해 버렸다.
"허!"
그 황당한 장면을 보고 있자니, 블라드 유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멍청한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한히 회복한다고 해서 기가 꺾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회복이라……. 그럼 계속 잘라 보면 되겠네. 언젠가는 원상 복구가 불가능한 단위로 쪼개질 테지.’
그가 도출한 해법은 매우 간단했다.
소수혈인을 끝없이 휘둘러서 라바 골렘을 아주 다져 버리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강한 회복력을 지녔더라도 한계는 명확할 테니까.
스이잉! 꽈아악!
"큭!"
오른손에 7m짜리 소수혈인을 생성한 유진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신성력에 의한 화상으로 손아귀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그는 고통을 무시한 채 핏빛 칼날을 휘둘렀다.
"아예 가루로 만들어 주마. 어디 그러고도 회복하는지 보자."
타닷! 촤좌좌좌좌좍!
양손에 든 소수혈인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허공에 시뻘건 파도가 생성되었다.
블라드 유진의 검격이 너무 빨라서 잔상만으로도 환영(幻影)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우욱!"
소수혈인의 파도가 덮쳐 오자, 라바 골렘은 몸을 잔뜩 웅크리며 충격에 대비했다.
제아무리 빠르게 움직일 수 있더라도 이 무지막지한 검격의 물결 앞에서는 회피가 불가했기 때문이었다.
쩌저저저저정!
붉은 칼날이 전신을 난자(亂刺)하자, 녀석의 외피가 빠른 속도로 깎여 나갔다.
원래라면 내부에서 마그마가 쏟아져 나오며 금방 상처를 회복할 테지만, 이번에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잘려 나간 부분이 복구되기도 전에 또 다른 검격이 작렬하여 라바 골렘의 육신을 분쇄해 버렸으니까.
그렇게 핏빛 파도는 놈의 전신에 수도 없이 쑤셔 박히며 사방으로 작은 용암 덩이를 날려 보냈다.
그러다 소수혈인이 어느 지점을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카아앙!
"음?"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저항감과 함께 그의 공격이 딱 멈췄다.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칼날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정된 것이다.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소수혈인을 우악스럽게 잡아 뽑았다.
콰직! 푸화악!
그러자 문득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튀어나와 시야를 어지럽혔다.
[라바 골렘의 핵을 공격했습니다.]
[일정량 이상의 충격이 가해져 골렘의 중추가 과부하됩니다.]
[라바 골렘이 화산 곳곳에 숨겨져 있던 파츠를 불러들입니다.]
[가디언 합체 최종 단계 돌입.]
‘이게 뭔…….’
홀로그램 문구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어디선가 검붉은 덩어리들이 휙휙 날아오기 시작했다.
슈우우웅! 쿵! 쿠구궁! 쿵!
화산 이곳저곳에서 쇄도한 다섯 개의 덩어리는 라바 골렘이 처음 등장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꿈틀거리며 빠르게 집결하더니, 파손된 라바 골렘의 전신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척! 처적!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방금 공격을 가했던 곳에 소수혈인을 재차 깊숙이 찔러 넣었다.
‘요즘 누가 합체하는 걸 다 기다려 주나.’
카아앙!
그러자 좀전의 단단한 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짧게 호흡을 내뱉으며 칼날을 밀어 넣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흡!"
뚜드득!
[라바 골렘의 핵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골렘의 중추에 가해졌던 과부하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가디언 경비 프로토콜 최종 시퀀스 돌입.]
[살고 싶다면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마지막 문구를 읽은 블라드 유진은 기묘한 위기감을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얼른 피하지 않는다면, 극도의 위험에 처할 것 같은 감각이 엄습해 온 것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암흑화를 시전했다.
스윽!
한데,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다섯 개의 용암 덩어리와 합쳐져 수십 미터 크기로 자라났던 라바 골렘이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게 아닌가.
쿠화아아아앙!
한점에 수축했던 공기가 초고온의 열기를 머금고 팽창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단단한 암석 지대는 찢어지고 녹아 초토화되었고, 화산 전체가 울릴 만큼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쿠르르르르르!
방금의 폭발로 인해 화산 활동이 순간적으로 재개될 정도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뼈도 못 추렸겠군."
일찌감치 저 멀리 거리를 벌렸던 유진은 대폭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 위력은 전시영의 초열지옥 십지폭쇄를 수십 번 정도 반복 사용한 수준이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육신을 지닌 그라고 해도 무사하진 못했으리라.
폭발의 여파가 끝날 때까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진은 문득 반가운 홀로그램 글귀를 발견했다.
[중간 보스 ‘화룡왕 엔세데스의 가디언 라바 골렘’ 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툭! 투둑!
그의 발치에 주먹만 한 붉은 덩어리가 떨어졌다.
블라드 유진은 그것을 발끝으로 톡 차서 가볍게 손바닥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홀로그램을 켜서 아이템과 능력치 정보를 차례로 살펴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골렘의 중추
등급 : SS
내구도 : SS(파괴 직전)
효과 : 골렘 구동, 열원(熱源)
화룡왕 엔세데스가 만든 골렘의 중추.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골렘을 구동할 수 있음. 당장은 수리가 필요해 보임.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1,509(봉인율 15%)
등급 : EX(Lv. 1,501~3,0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신성력에 당했던 상처가 원상 복구됩니다.]
[EX등급에 진입함으로써 봉인된 스킬이 해제됩니다.]
홀로그램 글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걸 쓸 수 있으니, 이제 최전성기에 근접하게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