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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110화 (111/226)

10화

‘문이 두 개라……. 공략대가 도착했나 보군.’

블라드 유진이 운명의 방으로 되돌아왔을 때, 공략대는 한창 아비규환의 전장에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차원문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운명의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앉아서 피의 권능을 운용해 보았다.

츠츠츠츠츠!

최전성기의 자신과 전투를 벌인 것 치고는 몸 상태가 꽤 좋은 편이었다.

카이넬의 신전은 휴식 장소로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기묘한 신성력이 전신을 계속 압박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방에는 그런 간섭이 전혀 없어서, 마음 놓고 쉴 수 있었다.

"혈액이 좀 있었다면, 회복이 빨랐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신전에서 흘린 혈액은 신성력에 의하여 오염된 상태라, 다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장은 손실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지만, 시련을 계속 이어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유진이 보유한 피의 권능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했으니까.

단지 시련 결정체의 강력한 의지가 내포된 권능을 밀어낼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츠츠츠츠츠!

잠시 시간이 지나자, 그의 전신에 그득하던 상처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피의 권능으로 막아 두었기에, 피부가 찢어졌어도 출혈은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고 그런 임시방편으로 육신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

피의 권능을 일으킨 블라드 유진은 시련의 결정체가 남긴 자취를 차근차근 지워 나갔다.

같은 작업을 한참 반복하자, 그는 원래의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카이넬의 성검을 들고 싸움으로서 손아귀에 생긴 심각한 화상은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초월적인 신성력을 뿜어내는 물건에 마기를 다루는 자가 직접 손을 댔으니,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아무래도 오른손은 꽤 오랫동안 치유해야 할 것 같았다.

‘과거의 나와 싸우게 될 줄이야. 역시 쉽지 않았어. 피의 권능이 남긴 영향력이 이토록 강하다니…….’

유진은 새삼 이제껏 자신과 전투를 벌였던 모든 이들에게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EX급인 뱀파이어 로드와 맞붙었을 때의 절망감을 직접 느끼고 왔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시련이었다.

"하나만 더 하면, 얼추 끝날 것 같은데."

그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두 개의 문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상 세 번째 시련을 끝내고 돌아오면, 남은 하나는 공략대가 처리할 확률이 높았다.

문고리를 잡아당긴 블라드 유진은 차원문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집어넣었다.

스팟! 척!

차원문을 통과하자,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휘이이이잉!

그가 발 디딘 암석 지대를 향해서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불어왔다.

매캐한 탄내와 함께 화산재가 날아들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유진은 온통 검붉은색으로 가득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왠지 익숙한 느낌인데……."

공기 중에 만연한 유황 냄새와 열기는 안테리오르 타워의 최종 보스, 게일드 백작을 상대할 때 확실히 느껴 보았다.

그자가 악염도를 휘두를 때마다 사방천지가 용암이 넘칠 듯이 찼으니까.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환경이었다.

안테리오르 타워의 최상층은 짙은 마기로 가득한 평지였지만, 이곳은 높은 화산이라는 게 다른 점이었다.

척! 척! 파삭!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뭉친 화산재가 그의 발걸음에 걸려 부스러졌다.

스윽!

그러다 어느 지점을 통과하는 순간, 기이한 느낌과 함께 문득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화룡왕의 권역에 진입했습니다.]

[드래곤 피어가 화산 전체에 드리워, 모든 생명체의 정신을 굴복시킵니다.]

[‘화룡왕 엔세데스’를 처치하여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드래곤?’

블라드 유진은 양산에 있었던 대규모 미궁 드라코 도무스를 떠올렸다.

그곳에서도 중간 보스 카제르시안이나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 등, 마기에 잠식된 드래곤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번에는 뭔가 남의 집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뱀파이어 로드의 지고한 정신력이 드래곤 피어에 저항합니다.]

[디버프의 일부가 해제되고 지속 시간이 대폭 줄어듭니다.]

[현재 능력치 감소율 : 20%]

[드래곤 피어 지속 시간 : 30분]

[드래곤의 레어 근방에서는 정신 관련 능력이 발동되지 않습니다.]

"DK가 보면 통곡할 법한 효과로군."

홀로그램 문구를 읽은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현혹술을 빼면, DK의 능력을 절반 이상 덜어 내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잠깐 들었던 상념을 지운 유진은 화산재가 떨어지지 않은 곳을 따라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놀랍게도 이 암석 지대에는 누군가가 열심히 오간 듯한 흔적이 있었다.

길을 따라 걷던 중 그는 홀로그램 글귀를 차분하게 분석해 보았다.

‘저항했음에도 20%의 능력치 감소가 남아 있는 건가.’

드래곤 피어는 대군주의 역병과 마찬가지로 광범위 디버프를 발휘했다.

대군주의 역병이 스킬 효과와 체력을 감소시킨다면, 드래곤 피어는 아예 능력치 자체를 깎아 버렸다.

능력치 정보를 불러오자 블라드 유진의 레벨이 1,420에서 1,136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무려 레벨의 20%인 284에 해당하는 페널티를 받은 것이다.

뱀파이어 로드의 정신력 덕분에 지속 시간은 30분밖에 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앞으로 30분이 지날 때까지 전투를 벌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블라드 유진은 느긋하게 둘레길을 걸으며 화산의 전경을 감상했다.

화산의 꼭대기에는 선명한 붉은색의 암석이 삐죽 솟아 있었다.

일반적인 화산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구경하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드래곤이 사는 곳답게 화산은 간헐적으로 시뻘건 용암과 마그마를 토해 내는 중이었다.

마치 악염도의 화신 스킬을 무수히 시전하기라도 한 듯, 맹렬한 열기와 화염을 연신 뿜어냈다.

콰아아아앙!

그런데 문득 굉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런 그의 앞으로 검붉은 무언가가 뚝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쿠우웅! 푸확!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지켜보았지만, 화산에서 날아온 거대한 덩어리의 정체를 알아보긴 어려웠다.

두꺼운 화산재에 콕 박혀서 형체를 식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 낙하물을 쳐다보던 유진은 흥미를 잃은 듯,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떠오르며 무시무시한 진동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드래곤의 가디언 라바 골렘(Lava Golem)이 침입자를 감지했습니다.]

[강력한 열기가 엄습해 옵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

푸쉬이이!

정체불명의 낙하물에서 시뻘건 무언가가 솟아오르더니, 주변의 화산재를 빠르게 녹였다.

이윽고 검붉은 덩어리에서 팔다리로 보이는 형체가 불쑥 튀어나옴과 동시에, 굉장한 열기가 블라드 유진을 덮쳤다.

쿠후우우웅! 스이잉!

피의 권능을 가득 끌어 올린 블라드 유진은 가볍게 열기를 밀어내면서 소수혈인을 전개했다.

그러고는 마치 부채처럼 널찍하게 칼날을 이어붙인 다음, 옆으로 강하게 휘두르자 강력한 풍압이 발생했다.

다행히 그를 향해서 쏘아지던 열기는 단 한 번의 부채질에 저 멀리 흩어지고 말았다.

물론 소수혈인을 독특하게 전개했던 유진은 살짝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시커멓게 탄 손아귀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신경 쓰이는군.’

조금 불편하겠지만, 당분간은 왼손을 위주로 싸워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큰 무리는 없을 듯했다.

쿠웅! 쿵!

블라드 유진이 하나로 합친 시뻘건 칼날을 왼손에 옮겨 쥐는 동안, 라바 골렘은 변신을 완전히 마친 상태였다.

마치 사람을 닮은 듯한 형상이었지만, 녀석은 몸통과 팔다리가 엄청나게 두꺼웠다.

더불어 머리통도 바위를 아무렇게나 깎은 다음, 크기가 다른 둥그런 눈 두 개를 박아 넣은 듯했다.

그야말로 대충 만든 듯한 모양새였지만, 라바 골렘이 발하는 기운은 사뭇 묵직하게 느껴졌다.

‘드래곤 피어의 일부가 저 녀석의 육신에서 발산되고 있군.’

그는 주변을 가득 채운 기묘한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용암으로 이루어진 놈의 몸체에서는 연신 푸른빛 화염이 넘실거리는 중이었다.

라바 골렘의 체내에서 분출되는 유황 기체가 타오르면서 저렇듯 시퍼런 불꽃으로 변한 모양이었다.

선명한 청색 화염은 마치 연옥의 ‘정화하는 불’을 보는 듯했다.

"그우우! □□□. □□□."

녀석은 어눌한 발음으로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더니, 가만히 서 있던 유진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쿠웅! 치이익! 쿠웅! 치이익!

신장 6m짜리 괴물이 움직이자, 굉음과 함께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넓적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사방으로 용암이 튀어 암석을 녹이는 것은 덤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용암에 의해 서서히 형체를 잃어 가는 바위산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발 딛고 설 공간도 없겠군. 아무래도 빨리 끝내는 게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전투라는 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다반사였다.

게다가 온몸이 용암으로 이루어진 녀석을 상대하는 건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블라드 유진은 탐색전 조로 원거리 공격을 가해 보기로 했다.

‘폭사.’

투두두두둥!

권능 폭발 없이 A급인 상태로 폭사 스킬을 사용했더니, 다섯 개의 시커먼 송곳이 발출되었다.

크기와 위력 또한, S급일 때보다 상당히 줄어든 모습이었다.

물론 물렁물렁한 용암 외피를 뚫는 것 정도야, 강력한 피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폭사로도 충분할 터였다.

태대대대댕!

"음?"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던 다섯 개의 송곳은 라바 골렘의 몸체에 적중하자마자 튕겨 나갔다.

겉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피해는 살짝 흠집이 난 수준에 불과했다.

다섯 개의 작은 상처는 안에서 용암이 흘러나와 순식간에 메꿔져 버렸다.

그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녀석의 행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 □□□□."

라바 골렘은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은 것처럼, 알 수 없는 언어를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

마치 감정 없는 경비 로봇 같은 느낌이었다.

‘용암으로 이루어졌지만, 의외로 외피는 단단하군. 그럼 내부는 어떨까?’

유진은 오른손 검지를 펼친 뒤 빙글빙글 돌리며 피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매끈한 노란색 구체가 불쑥 솟아나더니, 기묘한 고주파 음을 내기 시작했다.

삐이이―!

현재까지 그가 보유한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장거리 타격 스킬이었다.

물론 스킬을 복사당한 전시영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초열지옥 역풍(逆風)."

손끝으로 상대를 가리키며 나직이 중얼거리자, 고주파 음을 토해 내던 노란색 구체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역풍이 폭발한 듯 라바 골렘의 몸체가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꾸르륵!

블라드 유진은 사방팔방으로 용암이 튈 것을 예상하고, 암석 지대 뒤편으로 슬쩍 몸을 날렸다.

움푹 들어간 지형을 이용하여 비산하는 용암 조각을 손쉽게 피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상대에게서 들려온 소리는 그가 예상했던 폭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였다.

"끄어어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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