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끼이이하하하!"
콰직! 쩌저저저정!
전쟁터란 온갖 욕설과 신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난무하는 소음의 온상이었다.
하지만 전시영이 질러 대는 괴성은 일반적인 기준을 한참이나 벗어난 수준이었다.
한창 적과 전투를 벌이던 사람들이 공격을 멈추고 한 번씩 돌아볼 정도였으니까.
루시아는 멀찍이 떨어져서 그런 전시영의 모습을 확인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레니가 준 그 괴상한 스킬을 쓴 건가."
불굴의 광기는 단신으로 대학살극을 벌였던 투르피스에 빙의되어 전투를 이어 가는 스킬이었다.
지속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였는데, 그간의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엉킨다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성능만은 그야말로 확실했다.
근접전에서 강한 면모를 보이는 루시아조차 불굴의 광기를 시전한 전시영을 이길 수가 없었으니까.
일시적으로 투르피스가 된 그녀는 그야말로 광인이 되어 날뛰었다.
원래 전시영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시무시한 흉기가 되고 있었다.
"나도 슬슬 합류해야겠군."
루시아 또한 전시영과 마찬가지로 공략대와 한참 떨어진 곳에 공간 이동 되었다.
하지만 뇌신의 흉장이 크로노렌 제국군의 갑옷과 비슷한 색상이다 보니, 처음에는 전혀 공격받지 않았다.
물론 이내 아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적들이 공격을 가해 오긴 했지만.
그래도 전시영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루시아는 일대 다수와의 근접전에 특화된 장비와 스킬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풀고르 글로부스(fulgor globus)!"
후우웅! 쿠콰콰콰콰!
방전하는 번개 구체를 날려 보내자, 시커멓게 그을린 제국군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그들은 신성력 덕분에 대부분의 속성 내성이 어마어마하게 상승했지만, 뇌전에는 다소 약한 면모를 보였다.
철제 갑옷과 무기를 타고 흐른 번개가 신성력을 끌어 올리기도 전에 전신을 강타했으니까.
휘리릭! 척!
루시아는 나가떨어지는 제국군을 바라보며, 창대를 한 바퀴 휘돌리더니 옆구리에 딱 끼웠다.
그 상태로 천천히 걸어가자, 바람이 불어와 하늘거리는 백색 깃발을 흔들었다.
치직! 치지직!
간헐적으로 번득이는 뇌전에 휩싸인 루시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뇌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만 같았다.
루시아는 고군분투하는 전시영을 향해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크로노렌 진영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쿠웅! 쿠구궁!
"저건……."
눈을 가늘게 뜬 루시아는 제국군 사이를 걷는 거구의 인형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은빛 플레이트 아머를 빈틈없이 걸치고 있었지만, 그자의 덩치는 결단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성 제국군이라는 자들의 틈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장만 대략 4m 정도 되는 거인이 나타나자, 암흑 제국 측에서도 뭔가 반응이 있었다.
"쿠우우우!"
악시움 제국군의 틈에서도 시커먼 갑옷을 걸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뭐가 저렇게 큰 거지? 몬스터에게 갑옷을 입혀 놓은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루시아는 전시영이 있던 곳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두 철갑 거인은 전시영이 미쳐 날뛰는 곳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도착하여 앞뒤로 압박을 넣기 전에, 얼른 가서 구해야 할 것 같았다.
루시아는 방전하는 깃발을 천천히 휘두르며 달려가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타닷! 파치지지직!
백색 뇌전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잠식하자, 크로노렌 제국군이 움찔하며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풀고르 글로부스에 큰 피해를 본 이후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전시영에게 접근해야 하는 루시아의 입장에서 그리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저들이 주춤하는 동안, 빠르게 다가갈 수 있을 테니까.
타다다다닷! 후우웅!
깃발 창을 휘두르며 치고 나가자, 루시아는 금방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거인의 보폭이 워낙 넓었기에, 도착 시점은 거의 비슷했다.
"□□□!"
"□□!"
콰앙! 콰광!
거인들은 서로를 향해서 큼지막한 플레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려 6m는 가뿐히 넘을 듯한 길이의 거대 도리깨를 후려치자,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웅! 부웅! 쩌어엉!
거대한 플레일의 짧은 쇠막대가 이리저리 회전하며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괴물들의 전투에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크히히히히!"
터어엉! 터덩!
무모하게 달려들어 거인들의 다리에 로우킥을 후려갈긴 사람은 바로 전시영이었다.
이제껏 그녀의 육탄 돌격은 제국군을 상대로 잘 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철갑 거인들은 전시영의 공격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조금의 휘청거림도 없었다.
그저 처음과 마찬가지로 다소 부자연스럽게 움직일 뿐이었다.
기이이잉! 쿵!
"어?"
게다가 때마침 불굴의 광기 스킬도 딱 끝나 버렸다.
순간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온 전시영은 가만히 서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왜 이곳에 들어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거인들의 플레일이 기계적으로 날아들었다.
후우우웅!
"으아아아!"
전시영은 비명을 지르며 잽싸게 도망칠 공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쪽에서 휘둘러지는 무지막지한 위력의 쇠도리깨를 피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피할 시기를 놓쳐 버린 게 가장 큰 패착이었다.
그런데 문득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쇄도하던 플레일이 딱 멈추는 게 아닌가.
콰칭!
"아니! 암만 미쳤다지만, 거길 들어가면 어떡합니까?"
전장에 난입한 루시아가 창날로 플레일의 고리를 단번에 걸어서 바닥에 찍어 버린 것이다.
"하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한 녀석을 봉쇄해 두었는데, 크로노렌 측의 거인이 연이어 도리깨를 휘둘렀다.
놀랍게도 놈의 공격은 상대측 거인이 아니라, 두 사람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
루시아가 어울리지 않게 욕지거리를 내뱉는 순간, 어디선가 미약한 충격파와 함께 주황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여인의 희미한 미성이 들려왔다.
번―쩍!
"고취의 물결!"
빛에 휩싸인 루시아는 창날에 걸린 플레일을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뒤편으로 날아들던 공격을 방어했다.
쩌어엉!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거인의 엄청난 완력을 다소나마 밀어내는 모습이었다.
아주 잠깐 발생한 기회를 포착한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철갑 거인들의 틈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전시영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전장의 한복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규모 버프 능력……. 다이애나 로즈로군."
"덕분에 살았어요. 방금의 지원이 없었다면, 틈을 만들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쳇!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나? 아, 뭔가 자존심 상하는데."
"이 상황에서 자존심을 왜 찾아요? 잔말 말고 빠져나갈 준비나 하세요."
"아, 알았다고."
루시아의 잔소리에 전시영은 투덜거리면서 벌떡 일어났다.
* * *
"허억! 헉!"
불굴의 광기가 끝난 직후에도 전시영은 무수히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애초에 이번 시련은 12만 5천이나 되는 인원이 5만 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버티는 거였다.
고작 15분을 날뛰었다고 7만 명이 넘는 수효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략대는 끝끝내 시련을 완수할 수 있었다.
서로를 찾아 똘똘 뭉친 상태로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 결과였다.
[참여 인원이 52,345명 이하로 줄었습니다.]
[전장의 시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여 운명의 방으로 이동하는 차원문이 열립니다.]
"드, 드디어 끝인가."
눈앞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확인하며 전시영은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털썩!
루시아도 탈진한 모양인지, 수척해진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마 창대에 의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전시영처럼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을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 저 여자의 대규모 버프 스킬이 없었다면, 몰살이었어."
"맞아요. 그게 아니었다면, 저 아수라장에서 버틸 수 없었겠죠."
두 사람은 공략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고하게 서 있는 다이애나 로즈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취의 물결은 대규모 전쟁에서 사기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신체 능력 강화와 체력 회복 증가, 미약한 상처 치유 효과뿐인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게 수백 명 단위로 발현되자, 그야말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다이애나가 지닌 광범위 버프 능력은 고취의 물결 말고도 더 있었다.
"이미 시련이 끝났는데도 저놈들은 계속 싸우는군."
"그러게요. 무슨 원수라도 진 것처럼 끝도 없이 달려들던데요. 저런 사생결단 같은 전쟁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저렇게 많이 죽었는데, 사기가 꺾이지도 않고 말이야. 진짜 이상해."
전장의 외곽으로 벗어나자, 공략대는 그제야 전황 전체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저 안에 갇혀 있을 때도 느꼈지만, 이건 엄청난 규모의 진짜 전쟁이었다.
서로 상극인 신성력과 마기가 인간을 통해 발현되어 충돌하는 치열한 혈전.
놀랍게도 그 많던 인원이 하루가 가기도 전에 5만까지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도 공략대가 성가셨던 모양인지, 양측은 정말이지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 왔다.
그래서 이토록 빠르게 5만 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거였다.
"미쳤어. 이건 악마의 계략일 거야."
"뭔가 우리와 미묘하게 다른 것 같지만, 그래도 저들은 사람이었어. 몬스터나 마족이 아니라고."
"7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꼴을 봐야 한다니……."
산전수전을 다 겪은 헌터들도 이렇게 많은 시체를 한꺼번에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시련은 끝났지만, 아직도 눈앞에 선혈이 튀고 코끝에는 피비린내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바로 차원문으로 들어가시죠. 가서 쉽시다."
안지홍은 얼른 공략대원들을 다독이며, 전장의 한쪽 구석에 생긴 차원문으로 이동할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운명의 방으로 되돌아가는 거도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신성 제국과 암흑 제국의 병사들이 공략대를 향해서 진군을 개시했기 때문이었다.
쉬이이익! 터더더덕!
각각 새하얗고 시커먼 기운에 휩싸인 화살이 날아와 지면에 깊숙이 꽂히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위력의 화살에 수도 없이 당했던 공략대원들은 진저리를 치며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지친 상태였으나, 저 빌어먹을 놈들과 싸우느니 당장 고통을 겪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차원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팟!
"다들 좀 쉬고 계세요. 인원 점검은 조금 있다가 하겠습니다."
차원문을 통과한 공략대는 안지홍의 말을 듣자마자, 방어구를 해제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온몸이 땀과 혈액 등으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그런 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휴식만 취하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마치 간신히 적진을 빠져나온 패잔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공략은 어떻게 되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전시영은 고개를 들어 운명의 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단 한 개의 문만이 남은 상태였다.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이 시련을 클리어하러 차원문을 열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와……. 우리가 달랑 한 개 할 동안, 벌써 세 개째 하는 거야?"
"정말 엄청난 속도네요. 어쩌면 공략대 전체와 싸워도 유진 님이 이길 수도 있겠어요."
"물론 시련이 강함의 잣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이라면 진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
전시영과 루시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안지홍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으니, 이제 미뤄 두었던 인원 점검을 할 때였다.
"피해가 그래도 그리 크진 않군요. 전사자 32명이 전부입니다."
공략대는 전쟁의 틈바구니에서도 잘 버티고 살아남았다.
다이애나 로즈의 광역 버프와 성기사단의 활약 덕분이었다.
사실상 초반에 영문도 모르고 당한 32명을 제외하면, 똘똘 뭉친 이후로는 피해가 아예 없었다.
공략대원들은 잠시 전사한 인원들을 향해서 묵념한 뒤, 다음 시련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마지막 문 앞에 모였다.
"갑시다."
안지홍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덜컥! 스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