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스핏!
마침 그의 주변으로 웜홀 세 개가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엄청난 속도로 유진이 있던 공간을 찌르고,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그대로 빠져나간 것이다.
‘답은 이것뿐이다. 해 보자.’
그는 복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시련의 결정체가 시공투절을 시전하길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수백 미터 거리를 꿰뚫고 기어이 블라드 유진의 몸에 소수혈인을 쑤셔 박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그가 피하는 척하면서 일부러 대줬기에, 왼쪽 어깨에 칼날이 제대로 꽂혔다.
푸확! 꽈악!
하지만 이전과는 달리, 상대는 소수혈인을 바로 회수하지 못했다.
유진이 잽싸게 왼손을 놀려 핏빛 칼날의 중심부를 덥석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피의 권능에 손바닥이 잘려 나가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그는 새하얀 무언가를 꺼내 허공에 발생한 웜홀을 통해서 강하게 찔러 넣었다.
언제나 우아한 검술을 펼치는 평소와는 달리, 지금은 거친 날것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츠아아앗!"
치이이익! 푸쉬이익―!
이례적으로 기합까지 지르며 백광이 충만한 손잡이를 우악스럽게 쑤셔 박았다.
콰각! 콰가가각!
그러자 소름 돋는 소음과 함께, 수백 미터 밖에서 여유롭게 공격하던 상대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웜홀을 통과한 카이넬의 성검이 가슴팍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이이이익!
블라드 유진의 손과 마찬가지로 시련 결정체의 몸에서도 고기 굽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뱀파이어의 육신이 막강한 신성력에 의하여 붕괴하는 소음이었다.
"……!"
눈을 부릅뜬 상대는 가슴팍에서부터 빠르게 가루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소수혈인을 놓아주며 성검을 그대로 내리그었다.
촤하악! 파스스스스!
그러자 검신의 움직임에 따라 놈의 붕괴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이윽고 시퍼런 화염이 타오르자, 시련의 결정체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철컹!
"후욱! 후우……."
카이넬의 성검을 바닥에 떨어뜨린 유진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투두두둑! 주르륵!
그러자 그의 전신에 가득하던 상처에서 혈액이 빠져나와 바닥을 뭉근하게 적셨다.
체내에 신성력이 침투한 탓에 간신히 막아 두었던 상처가 크게 도진 것이었다.
이윽고 블라드 유진은 비칠거리며 몸을 일으켜, 가루로 변한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존재를 소멸시켜 버리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마치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의 권능을 운용하며 시커멓게 변한 자신의 오른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신성력이 충만한 검을 강하게 쥐었더니, 피부가 검게 그을리며 깊은 상흔을 남겼다.
아마 한참 더 오래 붙잡고 있었다면, 재가 된 시련의 결정체처럼 오른팔을 아예 잘라 버려야 했을 것이다.
‘회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안타깝게도 상대의 혈액을 빼앗아 오지는 못했다.
비록 카이넬의 신전이 만들어 낸 가짜에 불과하지만, 진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막대한 피의 권능을 얻거나, 시공투절 스킬을 복제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블라드 유진은 희미하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전성기의 자신을 이김으로써 신변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걸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능력치 정보>
이름 : 블라드 유진(Vlad Eugene)
레벨 : 1,420(봉인율 20%)
등급 : SS(Lv. 901~1,500)
종족 : 피의 군주
종족 효과 : 강체, 불로불사, 반신
놀랍게도 정체되어 있던 그의 봉인율은 무려 25%나 낮아졌고, 레벨이 444단계가 복구된 것이다.
아직 등급은 같은 SS급이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성장세였다.
역시 EX급을 상대로 이긴 결과다웠다.
한데, 능력치 정보를 살피던 유진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나타났다.
[신전의 시련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여 운명의 방으로 이동하는 차원문이 열립니다.]
반가운 클리어 알림이었지만, 능력치 정보를 살펴보는 지금만큼은 그리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까맣게 탄 손아귀와 온몸에 아로새겨진 자상(刺傷)을 내려다보던 그는 고개를 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수투가……."
카이넬의 성검과 피의 권능이 반응하자, 그사이에 끼어 있던 이무기의 수투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반발력에 의하여 내구도가 빠르게 하락한 결과, A급 아이템이 그대로 분쇄되어 버린 것이다.
성체 미궁을 처음으로 정화하며 얻었던 것이기에 조금 아까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제 역할은 다하고 파괴된 거였다.
"휴식이 좀 필요하겠군."
운명의 방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이 생겼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직 카이넬의 신전에서 얻을 게 남은 데다가, 웬만하면 피의 권능을 회복한 뒤에 이동하고 싶었으니까.
물론 이 신전은 뱀파이어인 유진이 피의 권능을 보충하기에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니었지만.
"일단 이게 뭔지 좀 알아볼까?"
츠츠츠츠!
그는 피의 권능으로 시련의 결정체가 남긴 상처 주변의 의지를 날려 보내며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회복을 방해하고 있던 마기가 사라지자, 전신에 아로새겨졌던 자상은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스으윽!
마치 지퍼를 잠그는 것처럼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카이넬의 성검을 움켜쥐면서 생긴 손바닥의 화상은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성력에 의한 상처다 보니, 피의 권능을 집중해도 복구가 더딘 모양이었다.
당장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기에, 블라드 유진은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손아귀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반짝이는 협탁에 올려져 있던 황금빛 구슬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성력과는 별 상관없는 모양이로군."
굳이 건드려 보지 않아도 이 구슬에 신성력이 깃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물론 이 물건이 엘―칼릭스의 성배처럼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지 않는 유형일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나 손끝으로 피의 권능을 주입해도 구슬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확인을 마친 유진은 황금빛 구슬을 손에 쥐고, 곧장 홀로그램에 비추어 보았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카이넬의 신안(神眼)
등급 : EX
내구도 : 파괴 불가
효과 : 관조(觀照)
특징 : 세트 아이템
눈에 직접 착용하는 형식의 특수 아이템. 신과 관련된 세트 아이템이지만, 신성력을 발하지는 않음.
‘의외로 신성력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었구나. 그런데 세트 아이템?’
이름이 카이넬의 신안인 걸 보아하니, 성검과 같은 세트인 것 같았다.
세트 옵션을 발동시키면 좋겠지만,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카이넬의 성검을 오랫동안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건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인가."
블라드 유진은 황금빛 구슬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자신의 오른쪽 눈으로 천천히 가져갔다.
그러자 신안이 꿈틀거리며 그의 눈으로 빨려들 듯, 쏙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카이넬의 신안을 착용했습니다.]
[기묘한 서기(瑞氣)가 당신의 눈에 깃듭니다.]
[지금부터 관조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킬 정보>
명칭 : 관조(觀照)
등급 : EX 위력 : EX+
재사용 대기 시간 : 30일
소모 자원 : 없음
효과 : 아이템, 인물, 현상 등의 상세한 정보를 꿰뚫어 볼 수 있음.
‘꿰뚫어 볼 수 있다?’
관조의 정보를 확인한 유진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스킬 설명이 뜻하는 바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효과에 기재된 꿰뚫어 본다는 말은 대상의 정보창을 그대로 불러온다는 의미였다.
만약에 대상이 헌터라면, 능력치와 스킬 정보를 낱낱이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아이템은 홀로그램을 통해 자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조 스킬을 쓰면 숨겨진 옵션을 찾아냄은 물론이고, 타인이 보유한 아이템의 정보를 훔쳐보는 것도 가능했다.
재사용 대기가 꽤 길었으나,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만한 기간이었다.
"괜찮은 걸 얻었군."
신안을 획득한 다음 주변을 쭉 둘러보았으나, 신전 내부에 특이점은 없는 것 같았다.
뭔가 캐낼 만한 숨겨진 요소가 존재한다면, 이미 카이넬의 신안이 알려 주었을 테니까.
그는 곧장 단상을 내려가 이글거리는 붉은 차원문을 통과했다.
스팟!
* * *
블라드 유진이 한창 두 번째 시련을 극복하고 있을 때쯤, 공략대는 세 번째 문을 통과한 직후였다.
스파바바바밧! 척!
"음?"
차원문을 통과한 전시영은 눈앞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영문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거구의 인물이 그녀의 정면으로 달려들며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 □□ □!"
후우우우웅!
전시영은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등 4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하는 말은 이제껏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언어였다.
물론 지금은 언어 따위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젠장! 연옥의 숨결!"
쿠화아아아!
그녀는 양손에서 시퍼런 불길을 쏟아 내 달려들던 자를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의 갑옷에서 은빛 기운이 불쑥 솟구쳐 나오더니, 초고온의 화염을 밀어내는 게 아닌가.
화르르르! 번―쩍!
"어?"
단번에 불길을 뚫은 그자는 전시영을 쪼개 버릴 듯, 대검을 세로로 내리그었다.
"에라이!"
콰칭!
그녀는 연옥의 숨결을 멈추고, 상대의 옆구리에 오른발 돌려차기를 먹였다.
그러자 고온의 불길까지 뚫고 들어왔던 괴물 같은 자가 옆으로 빠르게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전시영의 발차기에 담긴 물리력을 이기지 못한 모양인지, 플레이트 아머가 움푹 찌그러져 있었다.
"내 스킬은 견디는데, 대충 내지른 발차기는 못 버틴다고? 허! 이거 정체가 뭐야?"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으와아아!"
"□□□! □□□□!"
"□□!"
놀랍게도 전시영은 전장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근방에는 은빛 갑옷을 걸친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커먼 옷을 입은 상대편 진영을 향해서 돌격하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뜸 그녀가 튀어나왔으니, 적이라고 인식할 만도 한 일이었다.
"아니, 근데 시련에 사람도 나오는 건가? 저건 누가 봐도 몬스터나 마족이 아니잖아."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검을 휘두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해 보였다.
대략 190cm 정도로 키가 매우 컸고, 덩치도 당당한 것이 탱커를 연상케 했다.
투구 덮개 안쪽에서 움직이는 눈, 거친 숨소리와 전장을 울리는 장엄한 외침.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으나, 저들이 사람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적이 아니라는 걸 알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자들은 애초부터 같은 인간과 싸우는 중이 아니었던가.
검은 갑옷을 걸친 이들과는 완전히 반대편 진영인 듯했다.
"와! 이거 골때리는 상황이네. 엇?"
황당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물러나던 전시영의 눈앞에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크로노렌 신성 제국과 악시움 암흑 제국의 전쟁에 난입했습니다.]
[전장 참여 인원이 52,345명이 되면, 운명의 방으로 가는 차원문이 열립니다.]
[현재 참가자 수 : 125,551]
[클리어 조건이 추가되었습니다.]
[전장에서 72시간을 버텼을 때도 시련이 종료됩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십시오.]
"갑자기 전쟁터에 던져놓고 알아서 살라니……. 그리고 뭐? 5만 명?"
크로노렌과 악시움의 전투는 무려 12만 5천 명이 동원된 엄청난 규모였다.
수효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려면, 그야말로 미친 듯한 대학살극이 벌어져야만 했다.
"어찌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
양 진영의 치열한 전투를 보아하니, 인원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양측 전부가 공략대원들을 적이라 여기고 공격한다는 거였다.
뿔뿔이 흩어진 헌터들이 온갖 스킬을 발동하며 주변의 제국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으니까.
300명에 가까운 초강자들이 전장의 한복판에 난입한 순간부터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당연히 크로노렌과 악시움 제국군들은 헌터들이 적인 줄 알고 공격했다가 역풍을 제대로 맞았다.
말도 안 통하는 상대에게 큰 피해를 받은 순간부터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신성 제국과 암흑 제국 그리고 천공의 성 공략대의 삼파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나저나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
전시영은 연옥의 숨결로 불의 장벽을 만든 다음, 공략대원들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가까이 떨어진 사람끼리 순식간에 뭉치더니, 견고한 진형을 형성하고 빠르게 동료들을 구해 냈다.
하지만 몇몇 인원은 너무 멀리 떨어지는 바람에, 제국군의 파상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전시영도 낙오자들을 도울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화르륵! 번―쩍!
"이 미친놈들이? 대체 연옥의 숨결을 어떻게 버티는 거냐고! 안 뜨거워?"
사람이 1,400℃가 넘는 온도를 어찌 견딜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은빛 철제 갑옷을 걸치고 있다면, 근처에만 있어도 열사병에 걸려서 쓰러져 버릴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저들의 갑옷과 무기에서 빛나는 백색 서기가 육신을 보호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우웅!
"이크!"
전시영은 3미터 길이의 대검을 피해서 뒤로 잽싸게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다섯 개의 노란 구체를 생성시켰다.
삐이이―! 삐이이―!
"이제 나도 몰라. 당신들이 사람이든 뭐든 시련만 신경 쓸 거야. 다 날려버릴 거라고. 초열지옥(焦熱地獄) 연쇄역풍(連鎖逆風)!"
그렇게 외치며 손가락을 동시에 튕기자,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폭발이 발생했다.
순간적으로 수축했던 공기가 급속도로 팽창하며 엄청난 열을 쏟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쿠콰콰콰쾅!
다섯 번의 연쇄 폭발이 일어나자, 크로노렌 신성 제국군들이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마치 좀비처럼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뒤에서 뻗어 나온 백색 광채가 신체를 감싸자, 그들은 순식간에 멀쩡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연쇄역풍에 당해서 갑옷이 찌그러지고 그슬린 자국이 남은 건 그대로였지만.
"미친……."
그 광경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전시영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무래도 연옥의 숨결이나 역풍처럼 열기에 치중된 스킬은 저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녀의 발차기에 얻어맞은 녀석이 훨씬 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자는 움푹 들어간 흉갑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차라리 쥐어패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거지?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전시영은 근접 박투를 즐기진 않았으나, 그래도 필요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제국군처럼 전신을 감싼 플레이트 아머는 아니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방어구를 입었다.
방어구는 생산직 헌터들이 만든 거였고, 건틀릿과 신발은 미궁에서 얻은 아이템이었다.
특히 신발은 초열지옥 역풍 스킬을 복제해 간 대가로 블라드 유진이 준 ‘거인의 발걸음’.
무려 SS급 아이템이라, 지금까지도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후우! 드디어 이걸 쓸 때가 온 건가."
텅! 텅!
건틀릿을 맞부딪쳐 묵직한 쇳소리를 낸 그녀는 파이팅 포즈를 잡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뭔가 주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진짜 싫은데, 레니가 준 거라서 쓰는 거야."
뭔지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린 전시영은 눈에 힘을 주며 모종의 스킬을 발동했다.
곧이어 그녀의 눈앞에는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올랐다.
[불굴의 광기를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죽음을 몰고 다니는 괴인 투르피스’의 영혼이 당신의 몸에 빙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