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분신이 단상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페널티는 발동되지 않았다.
블라드 유진의 분신은 소수혈인을 높이 쳐들었다.
스각! 푸확!
그러자 성직자들의 머리가 한순간에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방어구를 걸치고 있었기에, 소수혈인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거침도 없었다.
사람 머리 열 개가 피를 뿌리며 튀어 오르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투두두두둑! 철퍽!
머리통이 바닥에 처박힘과 동시에 휘청이던 몸뚱이들도 우수수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열 구의 시체 사이를 유유히 거닐며 핏빛 칼날을 우아하게 휘돌렸다.
뚝! 뚜둑!
그러자 미처 소수혈인의 위력에 증발하지 못한 혈액 몇 방울이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열 명의 인간을 무참히 도륙하고도 유진의 표정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그저 성기사들의 포위망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저, 저런! 빌어먹을 자식이!"
권좌 근처에서 분신들과 싸우던 파르델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성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신에서 백색 신성력이 5m가 넘게 뻗어 나와 분신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했다.
콰칭!
하지만 놈의 검격은 불쑥 튀어나온 시뻘건 칼날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네, 네놈은……!"
파르델은 눈을 부릅뜨며 눈앞의 유진과 저 멀리서 다가오는 분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제껏 자신과 성기사들을 압박하던 것이 전부 분신이라 생각했는데, 그중에 실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성직자들은 고작 분신 하나에 모조리 도륙되고 말았다.
그들 또한 근접 전투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신이 너무 강했을 뿐이었다.
겨우 20%의 능력치만 지녔더라도 성직자 몇 정도야 일수에 쓸어버릴 만큼.
파르델은 스산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마치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었다.
"신성 제국 3대 세인트 마스터인 내 앞에서 그딴 짓을 할 수 있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성직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 파르델은 닭 쫓던 개의 심정으로 허무하게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었고, 두 눈은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눈앞에서 성직자들을 잃자, 분노로 인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모양이었다.
상대가 신성 제국의 뭐든 간에 유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 나라고, 인간들의 지위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는 그저 시련의 남은 시간만 확인할 뿐이었다.
‘아직 40분이나 남았나. 버티는 게 아니라, 그냥 다 죽이라는 소리로군.’
블라드 유진은 이제 결전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성직자들을 잃었으니 후방 지원은 기대할 수 없고, 성기사들에게 남은 건 속전속결밖에 없었다.
이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해지지 않았으니까.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포위한 채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작전을 포기한 듯, 파르델을 비롯한 성기사들은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척! 척! 척!
놈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는 양손에 소수혈인을 나눠 쥐었다.
그러자 핏빛 칼날의 길이가 4m로 줄어들었지만, 여럿을 상대할 때는 양손을 다 쓰는 게 훨씬 편했다.
"쳐라!"
"츠아아앗!"
타다다닥!
파르델의 명령에 성기사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무차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일 대 다수의 싸움은 보통 일방적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다가온 예닐곱 명의 성기사들이 동시에 내려치기만 해도 승패는 갈려 버릴 테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과 같은 초강자를 상대로 그런 단순한 시도는 먹히지 않았다.
터더덩! 쩌정!
"크헉!"
그는 신성력을 가득 머금은 검격을 모조리 쳐 내면서도 빈틈을 찌르는 정교한 반격을 해냈다.
소수혈인이 폴드론(pauldron, 견갑)에 붙은 스탑 립(Stop rib)을 잘랐으나, 목까지 베어 내지는 못했다.
물론 신성한 기운이 가득한 갑옷을 잘랐다는 사실에 성기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지만.
"겁먹지 말고 들어가라! 몰아치면 그대로 끝장낼 수 있다!"
파르델의 외침에 분분히 물러서던 성기사들이 용기를 얻고 전진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놈들이 한꺼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유진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지금이로군.’
[EX급 스킬 ‘마신강림(魔神降臨)’이 시전되었습니다.]
[10초간 모든 능력치와 이로운 효과가 두 배로 적용됩니다.]
[현재 적용된 레벨 1,952(EX).]
번―쩍!
정육면체 형태의 보스 방 전체에 일순간 시뻘건 섬광이 번쩍였다.
붉은 빛줄기는 그가 양손에 쥔 소수혈인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두 자루였던 핏빛 칼날은 거의 수천 개로 나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찰나의 순간에 블라드 유진의 신형이 수백 개로 갈라지며 그보다 더 많은 잔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푸화아악―!
보스 방 내부는 마치 잠깐 시간이 멈춘 듯했다.
투구 덮개 사이로 눈을 부릅뜨고 있던 성기사들은 고개를 숙여 흉갑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가슴팍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본 것은 수십 개의 일자(一字) 구멍이 뚫린 갑옷의 표면이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방금 보스 방 전체에 번득였던 섬광과 같은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허어어!"
털썩! 쿠당탕!
검을 놓친 30명의 성기사들은 마치 실이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거의 동시에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파르델은 심각한 상처만 입었을 뿐, 명줄이 끊어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철컥!
"크윽! 우웩!"
투구 덮개를 올린 그자는 피 섞인 토사물을 쏟아 내더니, 악에 받친 눈빛으로 블라드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는 그런 녀석의 앞으로 유유자적 걸어갔다.
"악마, 사악한 마족이여…….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신성 제국은 네놈들을 반드시 처단하고 말 것이니."
"네놈들? 마족과 전쟁 중이었던 건가."
"그래. 비열한 마족 놈들은 항상 그래 왔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접근했다가, 기습적으로 들이친 게 한두 번이더냐?"
"재미있는 배경이로군."
유진은 파르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무심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츠츠츠츠츠!
"흥미롭긴 한데, 굳이 감정 가득한 비난을 들을 필요는 없지."
그는 투구 덮개 사이로 드러난 상대의 얼굴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텁!
그러자 투명하게 변한 손을 통해서 시뻘건 혈액이 쭉쭉 빨려 나왔다.
고통에 신음하던 녀석의 음성은 이내 극도로 잦아들더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혈액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 그대로 절명한 모양이었다.
털썩!
블라드 유진은 시체가 된 파르델을 옆으로 가볍게 밀어 버린 뒤, 눈을 감고 무수히 빨려 들어오는 정보를 음미했다.
"음……."
아까 했던 말대로 이놈은 크로노렌 신성 제국의 3대 세인트 마스터였다.
더불어 성기사단을 이끄는 세 명뿐인 단장 중 하나로, 신성 제국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카이넬이라는 주신(主神)이 직접 성검을 내릴 정도로 신앙심과 실력이 뛰어났다.
아쉽게도 단 한 번의 흡혈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만약 대상의 모든 기억을 빼앗으려면, 기간을 두고 야금야금 혈액을 흡수해야 했다.
그래도 이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이곳이 어디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여기는 아예 다른 차원이로군.’
권좌는 신성 제국 북쪽 동토에 숨겨진 고대 던전이었다.
마족들이 이곳에서 마기를 퍼뜨리며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감지한 신성 제국은 토벌대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 이곳에 도착한 자들이 바로 파르델을 비롯한 성기사단이었다.
"이이제이를 노리는 건가. 귀여운 짓거리를 하는구나."
놀랍게도 마계의 통치자들은 지구뿐만 아니라, 크로노렌 신성 제국과의 전쟁도 동시에 벌이고 있었다.
이곳은 마계와 거의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운 차원이기 때문이었다.
차원의 벽을 허무는 건 어느 정도 실력만 갖추면 다 할 수 있었으니, 사실상 같은 대륙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쨌든 방어 체계가 잡히지 않은 지구는 미궁이 넘쳐나는 상황인데, 신성 제국은 마족의 침공을 잘 막아 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주신이 보유한 권능의 양 자체가 차이 나거나,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아무튼 이 성기사들은 헌터처럼 마계에 대항하는 세력이었다.
‘아직 30분이나 남았구나. 너무 빨리 처리했나?’
물론 블라드 유진은 저들이 어느 편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악신황 크락시스의 사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공략 방법을 달리했어도 괜찮았겠군."
만약 전투를 천천히 끝냈다면, 중간에 성기사단이 난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크락시스를 끝장내기 전에 시련이 어떤 것인지 알아냈을 터.
악신황 녀석을 이용하여 성기사들을 좀 더 수월하게 상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런 방법을 쓰는 걸 의도하고 이런 시련을 만들어 둔 듯했다.
물론 그가 너무도 강했기에, 최종 보스고 성기사단이고 순서대로 모조리 도륙해 버렸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완벽한 결과를 얻지 않았던가.
파르델의 혈액을 음미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홀로그램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마신강림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7일 남았다는 내용이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힘이었다.’
봉인되기 전 블라드 유진의 레벨은 1,775.
마신강림을 시전하자, 순간적으로 그는 과거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고작 10초간일 뿐이지만, 그 짜릿한 감각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초월적인 기운을 제대로 느껴 보려면, 봉인을 풀고 과거의 경지를 되찾아야만 했다.
하루빨리 봉인율을 낮춰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온전한 힘을 되찾은 상태에서 마신강림을 쓰면 어떨지 궁금하군."
언젠가 도래할 미래를 그리며 유진은 기대감 섞인 미소를 희미하게 지었다.
손을 휘저어 홀로그램 화면을 끄자, 파르델의 시체 옆에 떨어진 성검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엘―칼릭스의 성배와는 달리, 무지막지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카이넬의 성검.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는 세 손가락으로 폼멜을 붙잡고 성검을 들어 올렸다.
<아이템 정보>
명칭 : 카이넬의 성검(聖劍)
등급 : EX 공격력 : EX+
내구도 : 무한
효과 : 마기 축출, 주신의 응징
특징 : 세트 아이템
카이넬이 직접 내린 성검. 기본적으로 엄청난 신성력이 내장되어 있고, 주신의 응징이라는 특별한 성법 사용 가능.
홀로그램을 통해 힐끗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치우듯, 성검을 복주머니에 넣었다.
"으."
치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