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대군주의 역병이 범위 내의 모든 생명체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각각 30%의 스킬 효과 감소와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SS급이 된 대군주의 역병은 무려 30%의 디버프를 발휘할 수 있었다.
범위 내의 모든 적에게 약화를 걸기 때문에, 인원이 많을수록 효과는 증대되었다.
41명으로 구성된 성기사단이라면, 대군주의 역병을 사용하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규모였다.
"이, 이것은 마기? 역시나 네놈은 마족이었구나!"
시커먼 박쥐들에게서 짙은 마기를 느낀 모양인지, 파르델은 눈을 부릅뜨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검신에서 눈부신 백광이 터져 나오더니, 보스 방을 가득 메우던 마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곧이어 블라드 유진의 눈앞에 영 좋지 않은 내용의 홀로그램 글귀가 떠올랐다.
[카이넬의 성검이 마기를 축출합니다.]
[대군주의 역병 효과가 절반으로 감소합니다.]
[각각 15%의 스킬 효과 감소와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성검의 힘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마기가 완전히 축출될 수도 있습니다.]
성검의 기운이 디버프 효과를 감소시키고, 자칫 대군주의 역병을 해제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거 안 좋은데.’
1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파르델이 든 것이 신의 권능을 가득 담은 성검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칼릭스의 성배처럼 차원문을 열거나 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어쨌거나 홀로그램이 뜻하는 바는 디버프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적들을 쓰러뜨리라는 거였다.
물론 권좌에서 벗어나지 않고 말이다.
"차핫!"
파르델은 기합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곧이어 30명의 성기사가 그 뒤를 따르고, 나머지 10명은 멀찍이 떨어진 상태에서 메이스를 치켜세웠다.
거리를 두고 있는 자들은 성기사가 아니라, 성법을 펼쳐 전투를 보조하는 성직자인 듯했다.
아마도 저들이 지구에서는 힐러 포지션인 것 같았다.
번―쩍! 콰칭!
파르델이 휘두른 검과 소수혈인이 부딪치자, 사방으로 묵직한 충격파가 번져 나갔다.
신성력과 마기는 정반대되는 기운이라 그런지, 반발력이 엄청나게 강했다.
뒤따르던 성기사들이 일순간 휘청거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문득 검을 맞대고 있던 유진의 머리 위에 샛노란 빛무리가 생성되는 게 아닌가.
콰르르르릉!
이윽고 거기서는 강렬한 뇌전이 터져 나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스스슥!
암흑화를 시전하여 안개로 변한 그는 유유히 낙뢰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권좌 단상 밖으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1초에 시련 시간이 두 배씩 늘어나는 페널티를 받게 될 테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며칠씩 증가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귀찮은 족쇄로군.’
아슬아슬하게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않은 블라드 유진은 가볍게 발을 놀려 단상 중심으로 되돌아왔다.
샛노란 빛무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며 그를 따라왔기 때문에, 이제는 중심이 안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권좌의 중앙으로 가자마자 파르델의 공격과 마주해야만 했다.
쩌어어엉!
재차 성검과 소수혈인이 충돌하자,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와 전신을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심신을 뒤흔드는 진동에 유진은 순간적으로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카이넬의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이 불쾌한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파르델은 이제껏 보아 왔던 여타의 성기사와 궤를 달리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크락시스처럼 순수하게 완력이 강하다는 게 아니라, 외부로 발현되는 신성력이 손을 대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놈은 지구의 성기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법과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검술이야 수도 없는 전투를 거쳐 왔던 블라드 유진 또한 지고한 경지에 오른 상태였다.
적어도 기술에서 저 퍼런 눈의 중년 성기사에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신성력과 마기의 상성이었다.
‘소수혈인이 깎여 나가고 있다.’
빛이 존재하면 어둠은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
카이넬의 성검과 충돌할 때마다 소수혈인의 크기는 뭉텅이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피의 권능을 다량 주입하여 박살 난 부분을 복구해 줘야만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깎여 나간 곳에 남은 신성력이 핏빛 칼날을 뿌리까지 갉아 먹을 테니까.
그 사실을 첫 격돌부터 파악하고 있던 그는 어마어마한 양의 피의 권능을 소모하고 있었다.
1천 년 만에 깨어나서 마기를 왕창 받아들이는 일은 빈번했지만, 이토록 과하게 소모한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간 쌓아 둔 피의 권능이 워낙 방대했기에, 유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소수혈인을 뽑아냈다.
콰칭! 쩌저저정! 콰르르르릉!
한창 파르델과 검격을 나누며 백중세를 유지하던 중, 머리 위에서 재차 샛노란 빛이 번득였다.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온 뇌전이 그와 파르델에게 정확히 떨어져 내렸다.
아니, 원래는 블라드 유진을 노리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낌새를 눈치챈 그가 암흑화로 몸을 빼냈기에, 파르델이 번개에 대신 적중된 것이다.
"크흐으으!"
강력한 번개에 직격당했음에도 녀석은 괴상한 신음을 흘리며 씩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성법이다 보니, 신성력을 직접 다루는 성기사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동안, 유진의 눈앞에는 불길한 홀로그램 글귀가 불쑥 떠오르고 있었다.
[카이넬의 성검이 마기를 축출하여, 대군주의 역병 효과가 감소합니다.]
[각각 10%의 스킬 효과 감소와 체력 감소의 저주가 적용됩니다.]
‘5%가 줄었군.’
그와 파르델의 전투가 시작된 지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몇 합 겨루고 뇌전 성법에 의하여 잠시 떨어졌다가, 재차 격돌하는 상황이었다.
그새 마기 축출 효과가 이만큼 커지다니, 대군주의 역병은 지속 시간을 절반도 채우지 못할 것 같았다.
"어딜 도망치느냐!"
슈화아악!
암흑화한 블라드 유진이 권좌 뒤편에 불쑥 나타나자, 파르델은 서너 개의 새하얀 빛줄기를 날려 보냈다.
소수혈인을 양손에 나눠 쥔 그는 백색 섬광을 빠르게 쳐냈다.
한데, 그런 유진의 뒤편에서 묵직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후우우웅! 쩌어엉!
반사적으로 소수혈인을 돌려서 막고 보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성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놈들도 있었지.’
어느새 놈들은 단상 근처까지 포위망을 좁혀 온 상태였다.
그와 파르델의 싸움이 워낙 격해서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흘려보내지는 않았다.
카가강!
블라드 유진이 왼손에 든 소수혈인을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근처에 있던 성기사들이 검을 들이밀었다.
그는 신성력이 충만한 검격을 쳐 내며 슬쩍 거리를 벌렸다.
확실히 손아귀에 전해지는 충격이 약했으나, 그래도 만만하게 볼 만한 자들은 아니었다.
‘지구에서 봤던 바티칸의 성기사보다 수준이 적어도 몇 배는 높아.’
잠깐 성기사들에게 시선이 팔린 동안, 파르델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놈은 놀랍도록 빠르고 간결하게 백광이 가득한 성검을 휘둘러 오는 중이었다.
그뿐이랴, 보스 방의 천장 근처에서는 샛노란 빛무리가 뇌전을 뿜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숨 쉴 틈조차 없는 파상공세라, 누구든 이 상황에서는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은 입꼬리를 슬며시 말아 올렸다.
"이 정도는 돼야 역경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순수하게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었다.
이제껏 블라드 유진이라는 초강자를 극심한 위험에 빠뜨렸던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안테리오르 타워에서 맞붙었던 게일드 백작 또한 그저 조금 곤란하게 했을 뿐이었다.
삼두마룡 트리 페 디타스 또한 천계도살검을 쓸 수밖에 없도록 하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봉인율이 너무 높은 상태였다.
‘어쨌거나 둘 중 하나는 써야 하는데…….’
블라드 유진은 천계도살검이나 마신강림을 사용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둘 다 재사용 대기 시간이 7일이나 되는 스킬이라, 아마 이번 공략 중에 두 번 이상은 쓰지 못할 터.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건 좀 아깝군."
만약 천계도살검과 카이넬의 성검이 격돌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극강의 신성력을 뿜어내는 성물과 닿는 모든 물체를 타락시키는 극악의 검.
만약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고 치면, 그의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천계도살검은 그저 극악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스킬일 뿐이니까.
‘일단 그러기 전에, 이 성가신 것부터 처리해야겠다.’
문득 머리 위에 딱 멈춰서 뇌전을 뿜어내려 하는 샛노란 빛무리로 유진의 시선이 돌아갔다.
저건 뒤편의 성직자들이 만들어 낸 성법이리라.
번―쩍! 콰르르르릉!
뇌전이 쏟아지자, 그는 암흑화를 시전하여 순식간에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자 번개와 함께 달려들던 파르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성검을 휘둘렀다.
"역시 마족답게 긍지도 없군. 그렇게 계속 도망만 다닐 건가."
권좌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블라드 유진은 뭐라고 외치는 파르델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지면을 가볍게 박차며 마침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온 스킬을 발동했다.
[천군압쇄로 20% 능력치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최대 생성량 5/5]
빛나는 동심원이 터져 나오자, 유진의 신형이 다섯 개로 나뉘어 한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검은 연기가 어디론가 날아갔지만,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다섯 명으로 변한 그가 포위망을 형성하는 걸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헉!"
갑자기 다섯 명의 블라드 유진이 사방에서 소수혈인을 휘둘러 오자, 파르델의 손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기세등등하던 외침은 어디 가고, 파르델은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살짝 당황한 탓에 여기저기에서 날아드는 핏빛 칼날을 쳐 내기 바빴다.
성기사들도 이 상황에 놀란 모양인지, 파르델을 돕기 위해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점점 다섯 명의 유진이 파르델의 검격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차핫!"
푸캉! 파스스스!
빛나는 성검과 격돌하자, 가짜 소수혈인은 신성력을 이기지 못하고 박살 나 버렸다.
당연히 칼날을 쥐고 있던 그의 분신 또한 큰 충격을 받아 먼지로 변했다.
피의 권능이 계속 투입되지 않았기에, 소수혈인은 금방 부서질 수밖에 없었다.
파훼법을 알아낸 파르델은 신이 난 듯 성검을 종횡무진 휘두르며 분신들을 쫓았다.
그런데 문득 성직자들의 뒤편에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지켜보며 샛노란 빛무리의 위치를 조정하던 성직자들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힐러부터 자르는 건 국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