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103화 (104/226)

3화

암청색 혈액을 확인하고 잠깐 물러선 블라드 유진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크락시스를 바라보았다.

"이놈은 콥스 크리처가 아닌 건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흘리는 타액 또한 투명할 뿐, 콥스 크리처의 특징이 도드라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홀로그램에서 보았던 이름에도 그런 단어는 없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홀로그램을 열어 본 그는 ‘악에 물든 고대 던전’이라는 글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놈들이 날 어디로 보낸 건지는 모르나,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

무심하게 홀로그램을 닫은 유진은 크락시스를 응시했다.

잠깐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전황은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섯 명의 분신들이 녀석을 둘러싸고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방어력이 워낙 높아서 유효타는 먹이지 못했으나, 크락시스를 묶어 두는 건 충분했다.

놈은 멀찍이 물러난 그가 진짜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주변을 향해서 배틀 엑스를 마구 휘둘러 댔다.

그러다 한 분신이 도끼날에 적중되고 말았다.

꼬리를 피한 직후에 들어온 공격이라, 외통수에 제대로 걸려 버린 것이다.

후우웅! 퍽! 파싯―!

블라드 유진의 분신은 도끼에 짓이겨져 그대로 분진이 되어 휘날렸다.

"흠."

그저 에너지의 결정체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당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작게 침음을 흘린 그는 소수혈인을 고쳐잡고 재차 전투에 가담했다.

그런데 문득 크락시스의 눈앞을 어지럽히던 분신들이 한순간에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게 아닌가.

5분의 지속 시간이 끝나서 천군압쇄가 해제된 것이다.

쓰스스스슥!

"크윅?"

빠르게 치고 빠지는 분신들을 향해 분노를 터트리던 녀석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목표가 한순간에 사라지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호오?’

스윽!

기회를 포착한 유진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크락시스의 뒷덜미를 향해서 쇄도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접근한 그는 소수혈인을 집어넣음과 동시에 거대한 도를 꺼내 들었다.

"악염도(惡炎刀) 맹폭(猛爆)."

기이이잉―! 슈팍!

불꽃 모양의 칼날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전방으로 시뻘건 기운을 쏘아 보냈다.

허공에 대각선으로 한 가닥의 불줄기가 그어지자, 순간적으로 광풍이 불어닥쳤다.

콰아아아아!

극도로 가열된 공기가 잿가루 같은 먼지와 함께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런데 맹폭에 제대로 당한 크락시스의 머리가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천천히 돌아가는 게 아닌가.

부리부리한 붉은 눈을 부릅뜬 놈과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의 표정 변화는 전혀 없었다.

그저 거추장스러운 악염도를 잽싸게 집어넣으며, 소수혈인을 길게 뽑아낼 뿐이었다.

쑤화아아앙!

몸을 회전하며 6m 길이의 핏빛 칼날을 횡으로 긋자, 크락시스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악염도 맹폭으로도 완전히 잘리지 않았던 목이 드디어 끊어진 것이다.

슈우우! 터어엉!

덤프트럭만 한 놈의 대가리가 바닥에 처박히자, 지면을 강하게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윽고 유진의 눈앞에는 공략 결과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악에 물든 고대 던전의 최종 보스 ‘악신황(鰐身皇) 크락시스’ 처치!]

[권좌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좀 허무하군. 보상이 고작 이런 거라니."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반짝이는 보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은 몬스터를 사냥하면 낮은 확률로 나오는 에너지 코어라는 물질이었다.

아이템 제작이나 발전소, 헌터들의 레벨 상승 등에 널리 쓰이는 물건이라서 판매 가치는 충분했다.

이 정도 크기라면, 못해도 S급은 되리라.

하지만 블라드 유진에게는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시련 보상이라 생각하면, 그나마 이런 거라도 준 게 다행인가.’

안테리오르 타워는 4층을 제외한 시련에서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그나마 에너지 코어라도 나온 게 나름 나쁘지 않은 결과일 수 있었다.

‘권좌의 새로운 주인? 그게 무슨 소리지?’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는 악신황을 상징하는 듯한 악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드드드드드!

하지만 그건 이제 열 줄기의 손톱자국과 머리칼을 흩날리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유진의 모습과 흡사한 문양이 권좌에 그려진 것이다.

"이걸 얻으면 뭐가 좋은 거지? 쓸데없는 짓이로군."

단단한 석제 의자에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봐야 실속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느긋하게 크락시스의 사체와 주변을 둘러보며 다음 시련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홀로그램은커녕, 차원문이 나타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 안 끝나는 거지? 사체에서 뭔가를 찾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이미 에너지 코어를 얻었는데, 뭘 더 가져갈 게 있으랴.

크락시스의 몸뚱이는 천천히 식어 가는 중이었고, 거대한 도끼는 끄트머리부터 부스러지고 있었다.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사체에서 건질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드드드드드드!

굉음과 함께 정육면체의 방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의 눈앞에는 그토록 기다렸던 홀로그램이 불쑥 떠올랐다.

[최종 보스의 거처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지정된 시간까지 당신의 권좌를 지키십시오.]

[운명의 방으로 가는 문은 1시간 뒤에 열립니다.]

"이놈을 상대하는 게 시련이 아니었다는 거로군."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크락시스가 웅크리고 있던 방의 중앙으로 이동해 보았다.

그곳에는 온갖 보석과 금박으로 장식된 큼지막한 의자가 있었다.

녀석은 마치 알을 품듯이 권좌라는 걸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음? 조금 전에는 분명 돌로 된 단순한 모양이었는데?’

잠깐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악신황의 권좌는 화려하게 변해 있었다.

홀로그램이 뜬 사이에 뭔가 특별한 변화가 발생한 듯했다.

블라드 유진이 황금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무렵, 다시 한번 굉음과 진동이 찾아왔다.

드드드드드드!

이번에는 그저 방이 흔들리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의 뒤편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권좌가 바라보는 정면의 벽이 좌우로 열린 것이다.

유진이 뒤를 돌아보자, 40명 남짓한 일단의 무리가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놈들은…….’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마치 루시아처럼 은빛 갑옷을 빈틈없이 착용한 자들을 쭉 훑어보았다.

신장과 덩치는 미묘하게 달랐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동일한 문장을 갑옷에 새겨 넣은 상태였다.

두 개의 길쭉한 십자가를 사선으로 나란히 놓은 듯한 형태.

갑옷에 저런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놈들은 교황청 성기사단뿐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이 확인했던 성기사들은 금색과 은색 열쇠가 교차 된 붉은 바탕의 바티칸 국장을 그려 넣었다.

저런 간단한 표식은 결단코 아니었다.

척! 척! 척!

그들은 보스 방으로 들어와 진형을 맞춰 서더니, 널브러진 크락시스를 향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마침 저쪽에서는 녀석의 머리통이 떨어져 나간 게 보이지 않아서 저런 행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크락시스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만큼 가까이 다가왔는데, 최종 보스가 아무런 반응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까.

"□□ □□□□."

선두의 성기사가 명령하며 크락시스에게 다가가더니, 우윳빛으로 빛나는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철컥!

검신이 상당히 깊게 들어갔음에도 묵묵부답이자, 그자는 투구 덮개를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 □□□. □□□ □ □□□?"

"□□□ □□□ □□□□□."

아직 유진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한 그들은 보스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내가 전혀 모르는 말이다.’

블라드 유진이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은 흡혈을 통해 기억을 추출하는 거였다.

지구의 웬만한 언어는 거의 다 알고 있었는데, 저 불쾌한 느낌의 기사들이 하는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크락시스를 살피던 기사 하나가 권좌에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말았다.

"□□□ □□□!"

외침이 들려오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권좌 앞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의사소통은 전혀 되지 않았다.

일단 흡혈부터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현듯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들려오는 게 아닌가.

"네놈은 누구냐?"

"음? 이건……."

상당히 생소한 언어였지만, 유진은 리더로 보이는 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한 그는 이내 이 언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마족어로군.’

지구에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말이라,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다.

"저 괴물은 네놈이 쓰러뜨린 것인가."

"그렇다."

"허……. 공용어는 알아듣지 못하면서 마족어는 유창하게 하다니, 틀림없는 마족이로군. 어쩐지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상대는 블라드 유진의 한마디를 듣자마자 자기 멋대로 넘겨짚어 버렸다.

물론 마기를 다룰 줄 알고 종족이 뱀파이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마족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마족은 아니다."

"그럼 뭐지? 우리는 카이넬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 온 신의 사자, 정체를 제대로 밝히는 게 좋을 것이다."

유진은 상대의 푸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구상에 카이넬이라는 신을 모시는 종교 따위는 전혀 없었으니까.

‘일단 이놈들이 뭔지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 않을 테지.’

그저 정보가 많을 거로 생각되는 녀석의 피를 마셔서 기억을 추출해 내면 되는 일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깡그리 때려눕히면 그걸로 끝.

그는 카이넬의 사자라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카이넬이 뭐지?"

"오리발이라도 내밀고 싶은 건가? 카이넬 님의 이름을 모르는 거처럼 위장하려는 모양이로군."

"그래. 그게 신인 건 알겠고. 그러는 넌 누구냐?"

"크로노렌 신성 제국의 성기사단장 파르델 베인 이샤르다."

"블라드 유진."

"소개는 그게 끝인가?"

"뭐가 더 필요한가."

"……마계 귀족은 아닌 모양이로군."

파르델이라는 자의 입에서 마계 귀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블라드 유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마계를 알고 있다? 이거 흥미롭군.’

아무래도 이 녀석을 통해서 상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내친김에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 보기로 했다.

철컹!

그런데 파르델은 곧장 투구 덮개를 내리더니, 진형을 갖춘 성기사들을 돌아보며 명령을 내렸다.

"□□□□. □□ □□ □□ □□□, □□ □□□ □ □□ □. □□!"

척! 척!

녀석이 뭐라고 지껄이자, 이내 성기사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래. 귀찮게 문답할 바에야 흡혈이 훨씬 편하지. 좋은 선택이다. 인간들아."

스이잉!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수혈인을 뽑아 올리며 앞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득 홀로그램이 켜지더니 경고 문구를 출력하는 게 아닌가.

[권좌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

[단상에서 내려서는 순간부터 시련 시간이 초당 두 배로 증가합니다.]

‘갑자기 족쇄라니. 쯧.’

권좌가 박혀 있는 단상은 고작 지름이 20m 남짓한 원이었다.

이러면 꼼짝없이 상대의 포위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서 아무리 움직여 봐야 40명이면, 충분히 둘러싸고도 남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가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서 있자 성기사들은 순식간에 포위망을 형성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럴 때 딱 좋은 기술이 있지."

어느새 그의 등 뒤에서는 시커먼 형체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츠츠츠츠츠! 촤라라라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