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타닥!
비인가 헌터로 위장한 세 마족이 침음을 삼키고 있을 때, 블라드 유진은 비공정에 내려선 상태였다.
[권능 폭발의 효과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제 다 죽은 건가.’
천공의 성 주변에는 이제 날아다니는 와이번이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아마 저 콥스 와이번 무리는 접근을 시도하는 공략대를 노리고 배치해 둔 것이 틀림없었다.
하늘을 날 수 없는 인간이 이곳까지 올라오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어찌어찌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마기의 구름 속에 도사리고 있던 와이번들에게 요격당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공략대에 닥칠 엄청난 위험을 일찌감치 정리한 셈이 되었다.
물론 그는 이런 결과를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크기는 엄청난데, 실속은 없군."
천공의 성을 둘러보던 유진은 흥미가 사라진 얼굴로 비공정 내부의 붉은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테리오르 타워와 마찬가지로 천공의 성 입구 또한 피처럼 붉은 차원문 형식이었다.
저곳을 통과하면 미궁보다 더 먼 미지의 차원으로 이동하게 되리라.
스이잉!
소수혈인을 뽑아 든 그는 천공의 성 이곳저곳을 가볍게 찔러 보았다.
콰칭! 쩌저정!
하지만 뭔가 강력한 에너지로 보호되고 있는 듯, 붉은 칼날은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어지간한 힘으론 비공정을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이군. 이 거대한 물체가 낙하하는 일은 없겠어.’
서울의 4분의 1 크기나 되는 천공의 성이 낙하한다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칠 것이다.
당연히 블라드 유진은 도시가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곳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기에 신경 쓰는 것일 뿐.
소수혈인을 거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 붉은 차원문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러자 흥미가 사라졌던 유진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떠올랐다.
생소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문이라."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섯 개의 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들어가십시오.]
붉은 차원문 너머에는 안테리오르 타워에서처럼 마계의 독특한 자연환경이 펼쳐지는 대신, 다섯 개의 문이 있었다.
블라드 유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다섯 개의 문 뒤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문의 뒤편만 보일 뿐, 아무것도 존재치 않았다.
의문의 방을 한 바퀴 크게 돌아본 그는 다시 문 앞에 와서 섰다.
"내게 선택을 강요하다니, 당돌한 놈들이구나."
유진은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대마초를 피우던 페드로를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그가 직접 본 마족은 그놈 하나뿐이었으니까.
철컥!
블라드 유진은 그중에서 가장 오른쪽 문고리에 손을 갖다 댔다.
이 문을 열자마자 선택이 끝나는 건지, 들어가기 전에는 다른 곳도 살펴보는 게 가능한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됐든 아무런 정보도 없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기도 했고.
덜컥!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시뻘건 차원문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역시나 어떤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인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스팟!
* * *
처적!
차원문을 통과하자마자 느껴진 것은 고운 흙이 단단하게 굳은 땅바닥이었다.
곧이어 서늘한 공기가 그를 맴돌자,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왔다.
정육면체 형태의 엄청나게 너른 공간에 블라드 유진은 혼자 서 있었다.
벽과 천장에는 알 수 없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희미한 백광이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완벽하게 닫힌 공간에서도 주변을 분간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물론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더라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되겠지만.
‘저건 뭐지?’
반들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던 유진은 중앙에 웅크리고 있는 우둘투둘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마치 대형 파충류의 피부처럼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듯한 형상.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그것이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반적인 파충류라 하기에는 덩치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오자마자 시련인가."
안테리오르 타워에서는 시련이 시작되기 전, 주변을 충분히 탐색할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이곳은 그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차원문을 넘어왔을 때부터 중앙의 녀석은 블라드 유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멀찍이 떨어져서 시간을 보내는 꼼수 따위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크르르르! 콰우우우!"
잔뜩 웅크린 채 그를 가만히 주시하던 파충류가 괴성을 지르며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대략 15m는 넘을 듯한 신장에 굵직한 사지와 꼬리, 악어를 닮은 듯한 커다란 머리통.
콥스 크리처와 마찬가지의 거무튀튀한 외피.
놀랍게도 몸을 일으킨 녀석은 매끈한 금속 재질의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오른손에는 엄청난 크기의 도끼를 든 상태였다.
‘이족 보행하는 악어라……. 꽤 재미있네.’
놈은 시뻘건 안광을 빛내며 유진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쿵! 쿠웅!
[악에 물든 고대 던전의 최종 보스 ‘악신황(鰐身皇) 크락시스’가 자극을 받아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악어의 육신을 지닌 황제라니, 이름 한번 거창하군."
그는 눈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을 가볍게 무시하며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후우웅! 부우우웅!
크락시스는 아가리에서 투명한 타액을 흘리며 허공에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댔다.
마치 모든 것을 분쇄해 버릴 듯한 의지가 저 두 번의 몸짓에 제대로 담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엄청난 기세를 근거리에서 목격하고도 블라드 유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더욱 강한 힘으로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크롸아아!"
쿠궁! 콰우우우우!
크락시스가 거리를 좁히며 본격적으로 도끼를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귓전을 때렸다.
놈이 휘두른 배틀 엑스 뒤편으로 새하얀 무언가가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일순간 물체가 초음속을 돌파하며 발생하는 충격파, 소닉 붐(Sonic Boom)이었다.
스이잉―!
그 짧은 찰나에도 유진은 상대의 공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소수혈인을 시전했다.
피의 권능을 상당량 주입한 모양인지, 6m가 넘는 길이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굉장한 크기였지만, 그는 핏빛 칼날을 깃털처럼 다루어 도끼날에 정확히 들이밀었다.
웬만하면 측면을 후려갈기고 싶었으나, 상대의 공격이 초음속으로 쇄도하는 탓에 미처 그럴 틈이 없었다.
쩌어어어엉!
새하얀 충격파에 휩싸인 도끼와 소수혈인이 충돌하자, 무시무시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꽉 막힌 장소라 음파가 반사되어 크게 울릴 법도 한데, 귓전을 때리는 소음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저 빛나는 벽면과 천장이 소리를 흡수하는 재질인 모양이었다.
"시끄럽지 않아서 좋군."
블라드 유진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불현듯 바닥을 바라보았다.
지면에 선명하게 찍힌 두 개의 발자국.
음속을 돌파한 크락시스의 도끼와 격돌하고, 그가 물러서며 강하게 내리찍은 결과였다.
놀랍게도 상대는 15m가 넘는 신장임에도 초월적인 민첩성에 힘까지 갖춘 괴물이었다.
레벨이 깡패인 헌터의 세계에서, 몬스터의 순수한 근력에 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중량에 의한 반작용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지면에 다리를 단단히 고정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힘 하나만 놓고 보면, 이제껏 상대했던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하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유진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왠지 이 이족 보행 하는 악어 녀석이 소소한 재미를 선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시련이 너무 쉬우면 재미없지."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는 홀로그램을 힐끔 쳐다보았다.
권능 폭발은 진작 효과가 끝나고 재사용 대기에 들어간 상태였다.
대략 2시간 동안은 사용하지 못하리라.
대군주의 역병을 쓸 만한 상황은 아니었고, 천계도살검이나 마신강림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려 재사용 대기 시간이 7일이나 되는 스킬을 이런 어중간한 녀석에게 쓸 수는 없었으니까.
‘이걸 제대로 시험해 볼 시간이로군.’
블라드 유진이 선택한 건 DK에게서 빼앗은 천군압쇄라는 스킬이었다.
고작 B급에 불과했지만, 여느 공격 기술을 가뿐히 뛰어넘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곧장 생성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분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천군압쇄로 20% 능력치의 분신이 생성됩니다. 최대 생성량 5/5]
[분신은 시전자의 평소 스타일에 맞춰서, 자체 판단하에 전투를 보조합니다.]
[의지를 불러일으키면, 각각의 분신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투우우웅! 스스스스슥!
천군압쇄를 시전하자마자 유진의 몸에서 빛나는 동심원이 터져 나왔다.
곧 그와 똑같이 생긴 다섯 명의 인형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6m짜리 소수혈인을 들고 반짝이는 은발을 흩날리는 그들의 모습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형태는 물론이고 존재감까지 완벽하게 복제했기에, 누가 진짜인지 구분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포위.’
스윽!
홀로그램에 뜬 문구대로 의지를 불러일으키자, 분신들은 암흑화를 시전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검은 안개로 변해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걸 보니,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여섯 명의 블라드 유진은 크락시스를 둘러싸고 온몸에 소수혈인을 쑤셔 박았다.
채앵! 터덩!
물론 몸을 뒤덮은 금속 갑옷과 단단하고 두꺼운 외피로 인해 칼날이 제대로 박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통증은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고통에 찬 괴성을 지르며 기다란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크와아악!"
콰과과과과과!
거대한 배틀 엑스만큼이나, 놈의 꼬리 공격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후방에서 달려들던 분신들은 방어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분분히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저 엄청난 물리력에 정면으로 대항했다가는 기껏 만든 분신이 파훼되고 말 테니까.
대신에 그는 머리 쪽으로 달려들어 크락시스의 아가리에 소수혈인을 내리그었다.
놈의 신경이 후방으로 향했을 때를 노리고 되레 앞쪽을 공략한 것이다.
"크윅?"
눈앞에 멀뚱히 서 있는 존재가 진짜일 줄 몰랐던 모양인지, 크락시스의 붉은 눈이 부릅떠졌다.
유진의 움직임이 너무도 빠르고 자연스러웠던 터라, 반응이 다소 늦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억지로 소수혈인을 튕겨 낼 수 있었다.
급한 김에 배틀 엑스의 자루를 그대로 들어 올려서 공격을 차단한 것이다.
나름 나쁘지 않은 임기응변이었으나, 고작 그 정도로 그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콰칭! 푸쉭!
"크웨엑!"
자루 끝에 부딪히고 방향을 튼 소수혈인은 크락시스의 입꼬리를 따라 얼굴 옆면을 그대로 그어 버렸다.
그러자 녀석의 피가 왈칵 쏟아지며 바닥을 점점이 물들였다.
혈액은 그저 바닥에 떨어지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활성화되지 않았다면, 콥스 크리처의 피와 체액은 그저 점성이 높은 액체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지만 크락시스와 콥스 크리처의 혈액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파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