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99화 (100/226)

24화

"당신들은……. 교황청 성기사단이 아닙니까?"

그렇게 교류가 많지 않더라도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티칸 시국의 붉은 국장이 새겨진 갑옷을 당당하게 걸치고 돌아다닐 수 있는 인물은 교황청 성기사단뿐이었으니까.

저자들의 이름이나 직책까지는 알 수 없으나, 소속만은 확실했다.

"성함이……."

"한국 파견 기사대장 폰시아노입니다."

장진석 대통령이 질문하자, 선두에 선 자가 투구 덮개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 폰시아노 대장이셨군요.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상황이 좀 오묘해서 찾아뵙지 못했지요. 하지만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것 같군요."

"지원해 주신다면야 당연히 그러겠지요. 그런데 저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두 분의 의견이 너무 상반되셔서 말이죠."

장진석의 질문에 아크웰 페리티노는 순간적으로 뜨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방금까지 교황청의 지원은 장담할 수 없을 거라 했는데, 대뜸 성기사단이 와서 지원하겠다니.

외부에서 보기에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교황청 내부의 알력은 대외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폰시아노는 아크웰을 힐끔 바라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장진석의 질문에 답했다.

"동맹이 위기에 처했다면 돕는 게 옳다고 봅니다. 교황 성하께서 어떤 의중을 지니신지는 알 수 없으나, 성기사단은 독자적으로라도 지원하겠습니다."

"얼마나 말씀입니까?"

"한국에 파견된 기사대 전원을 투입할 겁니다. 총원 65명입니다."

"그렇게나 많은 인원이 와 있었단 말입니까?"

"중국과 일본에 파견된 기사단원 몇을 차출했습니다."

"아, 그런 거로군요. 성기사단의 결정에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장진석은 폰시아노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좌중의 분위기가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성기사단에서 저렇듯 통 큰 성의를 보였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상 회담에 참여한 모든 국가는 힐러 자원을 교황청의 파견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폰시아노의 결정에 동조하려면, 지원 규모를 적당한 수준으로 맞춰 줘야 할 것 같았다.

괜히 발을 뺐다가 미운털이 박힐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였다.

"에스파냐에서는 S급 하나에, A급 40명을 지원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교황청과 한국의 지원 덕분에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는데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 정도밖에 지원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충분합니다. 충분하고 말고요."

각국의 정상들이 황급히 상의에 들어간 사이, 루시아가 마이크의 위치를 조정하며 파견 규모를 밝혔다.

그녀가 선수를 치자 미국과 러시아 대사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S급이야 원래도 파견할 예정이었지만, A급 헌터들은 아무래도 많이 내줄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한국에서 벌인 냉전으로 인해 상당수의 전력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다 블라드 유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규모 미궁 박멸자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로 눈치만 보던 안톤과 존 레이시는 가장 마지막에 파견 규모를 밝혔다.

"러시아는 레프 경과 더불어 A급 50명을 파견하겠습니다."

"우린 A급 55명, 당연히 조나단 잭슨 씨도 함께입니다."

냉전 양국은 스페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지원을 약속했지만, 사실 이 정도는 기대 이하였다.

특히 러시아는 10년 전 한국의 상당한 도움을 받았음에도 파견 규모가 다소 작았다.

장진석 대통령은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금방 그런 기색을 지우고 이상식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상식은 천공의 성 공략대 규모를 빠르게 집계해서 알려 주었다.

"S급 일곱에 A급은 205명, 성기사와 힐러 65명입니다."

"오! S급 전력만 따진다면, 홍콩의 탑 공략 때와 똑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피해가 엄청나지 않았습니까? 공략대 규모가 비슷해도 되나 걱정입니다. 힐러 전력은 그때보다 훨씬 적고요."

안테리오르 타워 때는 300명의 공략대가 투입되었지만, 돌아온 인원은 고작 13명에 불과했다.

장진석의 말에 몇몇 인사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더 이상 지원받는 건 어렵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중국이 빠진 상태에서 그때와 비슷한 수준의 공략대를 갖추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인지, 장진석 대통령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공략대 규모는 이렇게 결정짓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큰 연관이 없던 프랑스에서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도 스페인과 비슷한 입장입니다. 간접적으로 한국의 도움을 받았기에, 해 드리는 보답이죠."

프랑스 대사가 웃으며 대답하자, 장진석은 그 옆에 앉아 있던 다이애나 로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국의 지원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저희는 그냥 S급 한 명만 보낼 뿐이라서 민망하네요. 공치사할 수준은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영국의 지원이 결정되자, 회담장의 분위기는 돌변했다.

"한국과 영국은 접점이 좀 없지 않나?"

"존 대사의 반응을 보니, 미국의 영향력으로 참전하는 건 아닌 모양이군."

"순전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하려는 것 같아."

"오! 역시 다이애나 로즈인가."

그녀와 같은 거물이 참전한다면, 어느 나라든 쌍수를 들고 환영할 터였다.

그런데 다이애나는 S급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고, 인플루언서로서의 인지도만 컸다.

하지만 그녀는 단순한 S급이 아니라, 일정 수준의 치유 능력에다가 대규모 버프 스킬까지 갖춘 최고급 인재.

공략대 전체를 강화할 수 있는 인물이라, 아마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장진석 대통령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다이애나 로즈에게 몇 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다른 인원 없이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물론이죠. 한국의 헌터분들이 잘 챙겨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요."

"그게……. 한국에 흥미로운 분이 있어서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전시영과 루시아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곧바로 알아챘다.

그녀가 입국하자마자 어딜 찾아갔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 불여우 같은 게?"

전시영이 살짝 노려보며 나직이 중얼거리자, 다이애나가 생긋 눈웃음을 지으며 윙크를 했다.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게 된 두 사람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불여우 맞네요."

이 순간만큼은 루시아도 전시영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회담은 쭉쭉 진행되어서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작전을 구상할 때로군요."

장진석 대통령이 손깍지를 끼며 말하자, 이상식은 얼른 빔프로젝터 화면에 한 장의 사진을 띄워 올렸다.

그러고는 레이저 포인터로 곳곳을 찍어 가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을 알려 주었다.

안테리오르 타워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세심한 작전 수립이 꼭 필요했다.

공략 대상이 땅바닥에 가만히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창공을 유영하고 있었으니까.

"헌터들을 항공기로 실어 나르는 거로 기본 골자를 짰습니다. 하지만 그리 쉽지 않은 작전이 될 겁니다. 여길 주목해 주십시오."

이상식이 화면을 넘기자, 천공의 성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이 주르륵 나타났다.

하나같이 스팀펑크 느낌이 물씬 풍기는 비공정과 그 주변의 검은 먹구름을 찍은 것이었다.

"천공의 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먹구름은 하루하루 넓게 번지는 중입니다. 문제는 항공기로 헌터들을 떨어뜨릴 때,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위쪽에도 이런 상황이니까요."

달칵!

다음 장은 서울 상공의 먹구름을 더 높은 곳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이상식의 말대로 위에서 보니 천공의 성은커녕,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았다.

그러자 무음 영상을 가만히 살펴보던 존 레이시 대사가 슬쩍 손을 들며 질문을 던졌다.

"구름 내부로 진입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시계가 좁다고 해도 가까이 있는 건 보일 테니까요. 비행기가 뭣하면 헬기를 써도 될 테고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죠?"

"이 먹구름은 마기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아……."

이상식의 대답에 존 레이시뿐만 아니라, 좌중의 모두가 낮은 탄식을 터트렸다.

저 구름이 짙은 마기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일반적으로 전자기기와 엔진을 마기가 가득한 곳으로 가지고 가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파손될 수밖에 없었다.

마기가 반도체와 연료의 성질을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결국에 도출할 수 있는 해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요지는 전자 기기와 연료를 쓰지 않으면서 천공의 성에 안착해야 하는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한데, 상식적으로 300명에 가까운 인원을 이동시킬 무동력 기체가 있습니까?"

"없죠."

"그럼 답은 하나뿐이군요."

존 레이시와 이상식의 대화가 끝나는 순간, 안톤 대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낙하산."

안톤 니코노비치 이반의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단기간에 헌터들을 베테랑 스카이다이버로 만드는 방법에 관해서 고민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어우! 지루해. 실무적인 건 알아서 하라 하고, 우린 빠지면 안 되나?"

"그쪽이야 대신 생각해줄 똑똑한 사람들이 많지만, 에스파냐 대표는 저 혼자거든요?"

전시영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하자, 루시아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스페인 대통령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그녀는 회담 내용을 본국에 알려야 할 사명이 있었다.

지루해 죽으려 하는 말괄량이와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전시영의 다음 말에 루시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홱 돌려야만 했다.

"그런데 유진은 어떡하는 거지? 아직 그 이야기는 없잖아?"

"유진 님이요?"

"그래. 아크웰 저 녀석도 가만히 있고, 아무도 거론하질 않네. 누구든 당장 뛰어가서 제발 참전 좀 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거 아니야?"

……툭!

그런데 전시영의 마지막 말은 정상 회담에 참석한 모두가 똑똑히 듣고야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상식이 사진을 넘기는 타이밍이라, 주변이 꽤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마침 장진석 대통령의 질문이 아크웰 페리티노에게로 날아들었다.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군요. 블라드 유진 님의 참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잠깐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이 건은 따로 교황 성하와 연락을 해 봐야……."

아크웰은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려 했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폰시아노 기사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 대답은 우리 성기사단에서 대신 하겠습니다. 대규모 미궁 박멸자 블라드 유진 님은 성기사단과 함께 참전할 것입니다."

쿠웅!

폰시아노의 폭탄선언에 회담장은 순간적으로 침묵에 휩싸이고 말았다.

* * *

한편, 한창 정상 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블라드 유진은 녹턴을 타고 한강 둔치에 나온 상태였다.

아직도 간헐적으로 콥스 크리처가 떨어지고 있었기에, 집은 레니에게 맡겨 두었다.

아마 S+급에 해당하는 레니라면, 혼자서 콥스 크리처 정도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덕분에 그는 눈앞의 불편한 상황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거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유진은 미미하게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새하얀 치아를 살짝 드러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불쾌한 그의 마음이 제대로 투영되어 나오는 듯했다.

쿠웅! 쏴아아! 쿠웅! 쏴아아!

그런 블라드 유진이 내려다보고 있는 건, 강북에 떨어졌던 신장 20m짜리의 콥스 오거였다.

악취와 함께 녹색 액체를 이리저리 흘리는 ‘놈들’은 한강을 건너서 청담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콥스 오거들의 진행 방향에는 그의 저택이 있었다.

이내 유진의 서늘한 시선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천공의 성으로 향했다.

아마 저곳 어딘가에는 시체 애호가 퍼핏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스산한 눈빛으로 비공정을 노려보던 유진은 한강을 건너는 중인 세 마리의 콥스 오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도발, 제대로 받아 주지."

[권능 폭발이 발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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