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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98화 (99/226)

23화

"여, 역시 집이 넓으니까 청소할 거리도 많네요."

아크웰은 어색한 표정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유진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그의 집에는 시커먼 오크들의 사체가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폭발하기 전에 모조리 썰어 버려서 이 정도지, 안 그랬다면 저택이 몽땅 녹아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은 블라드 유진의 심기는 가히 불편해 보였다.

파주의 집이 폭발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아크웰은 그의 차가운 분노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시작인가."

천공의 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진은 뭔가를 발견하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늘에는 짙은 먹구름 같은 마기가 퍼져 태양광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정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비공정에서 뛰어내리는 물체를 포착하는 게 가능했다.

슈우우우우! 콰앙!

굉음과 함께 낙하한 존재는 오크보다 훨씬 더 육중한 몸체를 자랑하고 있었다.

녀석의 정체는 키가 대략 4m 정도 되는 뚱뚱한 트롤이었다.

당연히 이놈 또한 먼젓번의 검은 오크처럼 사체를 얼기설기 이어붙인 듯한 모습이었다.

"으으으! 더 큰놈이 나타났습니다! 우욱!"

아크웰 페리티노는 유진의 집 정원에 떨어진 시커먼 트롤을 가리키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놈이 낙하하는 순간부터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기 때문이었다.

그저 시체 썩는 냄새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독취를 맡은 듯한 느낌이었다.

쿵! 쿠구구구!

"가지가지 하는군."

좀비 트롤은 그와 아크웰을 포착하고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구륵! 구르륵!"

입과 코에서 간헐적으로 녹색 액체를 질질 흘리는 거로 보아, 근접하면 그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담담한 유진의 눈빛은 저 극 산성의 액체를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 불쾌한 괴물 놈이 집을 무너뜨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는 듯했다.

"꺼져라."

스이잉―! 슈팍! 콰지직!

양손에 나눠 쥔 무려 4m짜리의 소수혈인을 휘두르자, 시커먼 트롤의 몸체가 정확히 4등분으로 쪼개졌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시뻘건 칼날은 지면과 아름드리나무를 한꺼번에 베어 버렸다.

단단한 땅거죽이 예리하게 잘려 나가고, 대여섯 그루의 나무가 우수수 쓰러졌다.

쓰스스스! 쿠웅! 쿵!

"쯧!"

정원을 이루고 있던 나무가 훼손된 것을 본 블라드 유진은 작게 혀를 찼다.

걸리적거리는 모든 걸 쓸어버리다 보니, 자신의 소유물까지 파괴하고 만 것이다.

나무 정도야 몇 그루 없어도 되지만, 만약 그 대상이 저택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무래도 집 근처에서 싸울 때는 좀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어휴! 이게 다 무슨 일이래요. 혼자 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진짜 큰일 날뻔했습니다."

정원에 떨어진 검은 트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근처에 숨어 있던 아크웰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호들갑을 떨며 질린 표정으로 녹색 액체를 토해 내는 트롤 사체를 쳐다보았다.

"아깝군."

"예?"

"루시아는 어디로 갔나."

"제가 도착했을 때, 도로 쪽으로 나가시던데요. 그쪽에도 콥스 크리처가 떨어진 모양입니다."

"콥스 크리처?"

"네, 협회에서 확인한 이름이라더군요. 사체로 만든 인조 몬스터라면서요. 이놈은 그럼 콥스 트롤이 되는 거죠."

지금껏 한국 헌터 협회에 머물고 있던 아크웰은 블라드 유진의 집에 처음으로 와 본 참이었다.

공교롭게도 도착할 때쯤에 콥스 크리처들의 낙하가 시작되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오던 중에 고립되어 개고생을 겪어야만 했을 터였다.

협회에서 붙여 준 호위가 있다고 해도 콥스 크리처들을 상대하기란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회담장에 큰일이 났습니다. 비인가 헌터들이 기습해 왔어요."

"둘이던가."

"어? 어떻게 아세요?"

"뻔하지."

블라드 유진은 콥스 트롤을 쏟아 냄과 동시에, 검은 연기를 뿜는 천공의 성을 바라보았다.

페드로와 샤르마가 협회 대회의실을 습격하는 동안, 시체 애호가 퍼핏은 저 비공정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콥스 크리처의 형태와 퍼핏의 별명은 상당 부분 일치하는 이미지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놈의 작품인가 보군.’

그는 이번 사태가 한국에 들어온 세 번째 마족 녀석이 벌인 일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나저나 유진 님은 안 가시나요? 이번에 정상 회담이 열리는데, 교황청에서도 참석하기로 했거든요."

"내게 그럴 의무가 있나."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헌터계와 인연이 깊으시잖습니까?"

"됐다. 교황청에서는 뭐라던가."

"상황을 알리기는 했는데, 아직 답변이 없습니다. 홍콩의 경우를 보면, 아예 손을 놓고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기본적인 지원만 한다는 말인가."

"그거야 교황 성하의 고유 권한이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

"그렇군."

아크웰과 대화를 나누던 유진의 눈에 돌연 스산한 빛이 어른거렸다.

유형화된 살기가 저택 이곳저곳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아마 저 콥스 크리처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살기만으로 명줄이 끊어졌을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던 아크웰 페리티노는 어깨를 움츠린 채 그의 눈치를 보았다.

"사체 처리가 문제로군."

"아, 저거요? 난리가 끝나면, 수거 업체에 연락하겠습니다. 좀 썩긴 했어도 몬스터 사체니, 가져가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끝날 기미가 보이나?"

"음. 그건 아니네요."

쿠구구구구구!

블라드 유진의 말대로 천공의 성에서 낙하하는 괴물들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크였고, 두 번째는 트롤이었다.

세 번째 콥스 크리처는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놈이었다.

"……오거로군요."

지면을 향해서 낙하하는 검은 괴물의 정체는 오거였다.

마드리드에서 봤던 녀석처럼 팔이 여덟 개나 달리지는 않았지만, 콥스 오거 또한 충분히 기괴한 생김새였다.

이제껏 보았던 콥스 크리처들은 그래도 사체 원형의 모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콥스 오거는 신장만 20m에 달하는 만큼, 합성된 신체가 그리 정교하지 않았다.

온갖 종류의 사체를 마구 뒤섞어 놓은 듯한 피부를 보고 있자니,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신체도 있었다.

"다행히 이쪽은 아닌 듯합니다."

콥스 오거가 떨어진 곳은 강북이라, 유진의 집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놈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공의 성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콥스 오거 한 마리를 툭 던진 다음부터 비공정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몬스터의 종류마다 쏟아 낼 수 있는 수효에 한계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런 놈들을 무수히 만들어 낼 수는 없겠지.’

블라드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죽인 콥스 트롤을 돌아보았다.

사체에서 녹색 액체가 흘러나왔지만, 스킬이 발동되지 않은 탓에 강산성을 띠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런 게 정원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이거나 치우고 있어야겠군."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아, 사실 전 루시아 님을 데리러 온 거였습니다. 정상 회담에 스페인 대표로 참석하셔야 하거든요."

"그래. 가 봐."

스윽! 척! 뚜르르르!

축객령을 내린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아크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 휴대 전화는 언제 마련하신 겁니까?"

"……."

녀석이 질문을 던졌지만, 유진은 대충 손을 휘젓고는 저택을 향해 걸어가며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때가 되었다."

* * *

협회 대회의실이 급습당하면서 삼국 회담이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서울 하늘에는 천공의 성이 출현했다.

마치 성과 비공정의 어느 중간쯤 되어 보이는 형태의 부유물에서는 먹구름이 무한정 뿜어져 나왔다.

그로 인해 서울은 완벽한 암흑 도시가 되어 버렸다.

전깃불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로 어두컴컴했다.

그렇다고 전력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 근교에 지어진 에너지 코어 발전소가 자폭 공격을 가하는 콥스 크리처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놈들은 마치 작정하기라도 한 듯, 도시의 주요 생활 기반 시설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지금부터 천공의 성 관련 정상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한국 헌터 협회장 이상식은 정상 회담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각국의 정상과 헌터계 중진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미궁 전략부장 대신 직접 사회를 보게 된 것이다.

협회장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단상을 향해 있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S급 헌터이자 셀럽인 다이애나 로즈가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힐끔거리면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으나, 근처에 앉은 사람들은 이따금 말을 걸기도 했다.

"앞을 주목해 주십시오."

하지만 이상식 협회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제야 괜히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크흠!"

"허흠."

정상 회담장의 분위기는 냉전이 심각성을 더해 갈 때보다도 더욱 침울한 느낌이었다.

다이애나가 자리함으로써 밝아진 분위기는 현안을 인지하자 금방 침체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4천만이 거주하는 수도권 전체가 암흑으로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콥스 크리처와의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중요한 건 지원이겠지요. 얼마 전에 있었던 홍콩의 탑 사건으로 인해, 상당한 손실이 있었습니다. 헌터 지원은 얼마나 받을 수 있는 겁니까?"

한국의 대통령 장진석이 질문을 던지자, 이상식은 좌중을 둘러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대한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홍콩 사태 때만큼은 안 될 겁니다. 이번 작전에서 중국은 완전히 빠지기로 했거든요."

"잠깐만, 뭐라고요?"

이상식 협회장의 말에 회담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 와서 느낀 천공의 성 사태는 홍콩 못지않게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공략 대상이 지상에 있기라도 했지, 지금은 하늘에 둥둥 떠서 일방적인 폭격을 가하는 중이 아닌가.

"사안이 이토록 중한데, 어째서 지원을 못 하겠다는 겁니까? 중국 대사께서 답변을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장진석 대통령이 대답을 촉구하자, 주한 중국 전권 대사 리빈(李濱)이 마이크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중국 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력이 있다면, 당연히 헌터들을 파견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홍콩에 생긴 탑에서 우린 너무 많은 전력을 잃었습니다. 회복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기간이 좀 짧긴 합니다."

리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러시아의 안톤 대사가 슬쩍 끼어들었다.

대규모 미궁 리고르 아스페라를 공략하고 난 당시에도 러시아는 한동안 외부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

현재의 중국과 같은 이유였는데, 실제로는 영토 확장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과거가 있기에 중국의 행태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 대사의 의중을 파악한 장진석 대통령은 중지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나 미국 측에서 도와줄까 싶어서 돌아본 거였지만, 지원 사격은 없었다.

상황을 좀 더 지켜보려는 듯, 미국 대사 존 레이시(John Lacy)는 차분한 표정으로 조나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황청은 어떻습니까?"

하는 수 없이 장진석 대통령은 교황청 외교관으로 정상 회담에 참석한 아크웰 페리티노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던 녀석은 저도 모르게 사실 그대로를 전달해 버렸다.

"교황청에서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통상적인 지원은 해 주시겠지요?"

"어……. 저희도 지난번에 힐러 피해가 컸던지라, 정확한 답변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허!"

장진석이 순간적으로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내비치자, 아크웰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직 아무런 결정이 되지 않았어도 딱 잘라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이런 정상 회담 자리에서 교황청 외교관의 발언으로서는 적절치 않았다.

"아, 젠장……."

녀석은 아무도 모르게 주먹으로 허벅지를 퍽퍽 내리치며, 자책 가득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덜컹!

정상 회담장의 문이 열리더니,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들의 정체를 확인한 아크웰은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너무도 뜻밖의 인물이 경호 인력을 가볍게 밀어내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원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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