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어엇? 처, 천장이……!"
누군가의 외침이 귓전을 때리는 순간, 대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다.
호위 형식으로 따라붙었던 헌터들이 중요 인사들을 보호하며 곧장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와르르 무너진 천장의 철근 콘크리트 잔해가 대회의실 출입구를 막아 버렸다.
쿠콰콰콰콰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터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기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섰다.
"잠깐 물러서십시오. 뚫겠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한 육신과 스킬을 보유한 헌터에게 이 정도 장애물을 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뚫린 천장을 통해서 테러를 일으킨 자들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휘리릭―! 텁! 카가각! 카가각!
암녹색 구체가 지척에 떨어지자, 미국 헌터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저 불길한 소리를 내는 물체의 살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몸소 겪어 보았기 때문이었다.
"터진다! 피해!"
"지부장님부터 보호해!"
콰아아앙!
방패를 든 탱커들이 앞으로 나서며 스킬을 시전하자, 곧장 구체가 폭발하며 암녹색 파편을 우수수 쏟아 냈다.
터더더더덩!
미국 헌터들의 빠른 대응 덕분에 큰 피해는 막을 수 있었지만, 길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암녹색 구체가 연신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오호호호홋! 받아라! 이 미국의 버러지들아!"
시커먼 채찍을 휘두르며 나타난 여자는 정체불명의 S급 비인가 헌터 샤르마였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미국 헌터들만 노리고 암녹색 구체를 쏘아 냈다.
휘리리릭! 터더더덕!
"네, 네 발?"
"미친! 이건 못 막아! 튀어!"
쿠콰콰콰쾅!
탱커들이 방어를 포기하고 뒤로 몸을 날리자,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파편이 대회의실을 덮쳤다.
방금의 대폭발로 인해 헌터 협회 건물 전체가 크게 뒤흔들릴 정도였다.
이대로 저 괴물 같은 여자의 폭격에 두들겨 맞기만 한다면, 건물이 폭삭 주저앉을지도 몰랐다.
한시라도 빨리 타개책을 찾아야만 했다.
"너 잘 걸렸다! 초열지옥 역풍!"
삐이이―! 콰아아앙!
그런데 대회의실 구석에서 튀어나온 전시영이 샤르마를 향해서 노란색 구체를 날리는 게 아닌가.
공간을 꿰뚫고 천장 근처에서 나타난 역풍은 굉음과 동시에 시뻘건 화염을 토해 냈다.
마치 세열 수류탄처럼 파편으로 살상하는 샤르마의 암녹색 구체와 달리, 초열지옥 역풍은 휘발유와 함께 터진 폭탄과 비슷했다.
폭발과 강력한 화염으로 목표 지점을 완전히 박살 내고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휘리리릭! 척!
어딘가에 채찍을 휘감은 샤르마는 아무런 준비 동작도 없이 상당한 거리를 빠르게 이동했다.
"쯧! 저 귀찮은 여자가 또 있네."
전시영을 발견한 샤르마는 짧게 혀를 차며 교만한 미소를 지었다.
삼국의 헌터 회담장에는 엄청난 실력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나단 잭슨,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 다이애나 로즈, 안지홍, 마지막으로 전시영까지.
무려 다섯이나 되는 S급 헌터가 언제든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SS급에 해당하는 백작급의 마족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샤르마는 혼자가 아니었다.
"카니지 사이드 만월참(滿月斬)!"
쑤화아아앙!
천장의 큼지막한 구멍에서 거대한 원반이 불쑥 들어오더니, 대회의실 이곳저곳을 마구 누비며 돌아다녔다.
물론 암청색 기운의 목표는 러시아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특히 안톤 니코노비치 이반에게 가장 먼저 날아갔다.
콰가가가각! 쩌저정!
"커헉!"
"으음."
공격을 막아 보려 했던 탱커들은 암청색 원반을 튕겨 내면서 뒤로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힘을 상쇄하지 못하고, 그저 방향을 트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다시 한번 저 원반이 날아든다면, 지금 상태로는 도무지 막을 자신이 없었다.
"여어! 오랜만이군."
슈우우우! 타닥!
천장의 구멍을 통해 들어온 남자는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단상에 뚝 떨어져 내렸다.
그자는 앞니로 질겅거리던 담배 필터를 깨물고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후우우!"
이윽고 실리콘 냄새가 섞인 역한 쑥 향이 물씬 풍겼다.
필터를 대충 옆으로 뱉어 낸 그자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에이. 역시 대마는 쿠바산이라니까? 한국 놈들은 마약에 장인 정신이 없어요."
등장하자마자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의 정체는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였다.
이미 저 둘이 한패라는 정보는 조지훈이 다 밝혔기에 각국의 인사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전 귀로 들은 내용이 눈앞에 실제로 펼쳐졌다는 사실이 살짝 놀라웠을 뿐이었다.
"협력해야 할 때 같군."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러도록 하지."
레프와 조나단은 서로를 힐끔거리며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게 저 비인가 헌터들의 농간인 걸 알았지만, 깊어진 감정의 골이 한순간에 메워지는 건 아니었다.
두 국가 사이에는 이번 일 말고도 케케묵은 과거가 산재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릴 정도로 두 사람은 멍청하지 않았다.
조금 삐걱대긴 했지만, 안테리오르 타워에서도 협력하지 않았던가.
그때와 마찬가지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한시적 동맹이 결성되었을 뿐.
"저도 돕죠. 제가 힐러 역할을 하겠습니다."
다이애나 로즈까지 합세하자, S급 다섯으로 구성된 최강의 팀이 뚝딱 만들어졌다.
탱커 둘에 딜러 둘, 힐러 하나로 구성된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다섯 명의 S급 헌터들은 잠깐 진형을 형성하더니 이내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연신 공격을 퍼붓던 비인가 헌터들은 조금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큼지막한 덩치의 두 탱커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페르디티오의 칼날."
"혼파망(混破忘)의 권!"
스각! 촤좌좍! 투웅―!
밝은 녹색의 섬광과 시커멓고 거대한 주먹이 날아들자, 페드로와 샤르마는 좌우로 쫙 갈라졌다.
그러자 대회의실의 단상이 난도질당한 케이크처럼 완전히 짓이겨지고 말았다.
"오옷! 이번 놈들은 뭔가 좀 다른데?"
"탱커잖아. 달려들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지."
상대적으로 딜러는 탱커보다 근접전에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지구에서 본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는 없지만, 페드로와 샤르마는 마계 백작급의 마족이었다.
S급 다섯 명이 정교한 파상공세를 펼쳤으나, 그들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두 비인가 헌터는 모든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착실하게 반격해 나갔다.
2 대 5의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전투는 백중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 틈에 얼른 빠져나갑시다."
"그러시죠."
안톤 대사와 제이컵 지부장은 호위 헌터들이 뚫어 놓은 구멍으로 슬그머니 몸을 집어넣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전신을 짜릿하게 울리는 강렬한 파장이 느껴지자, 대회의실에 있던 모두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몰래 도망치려던 안톤과 제이컵도 마찬가지였다.
찌이이이잉!
"이, 이게 뭐죠?"
"그러게요. 헌터가 아닌 우리도 느낄 정도라면……."
두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대회의실을 돌아보았다.
S급 헌터들도 방금의 그 괴상한 파동을 느꼈는지, 잠시 전투를 멈춘 상태였다.
"느껴지시오? 엄청난 힘이 서울 전역을 뒤덮고 있소."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현상인데,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레프와 안지홍은 긴장한 얼굴로 동시에 말했다.
"마기."
"마기네요."
두 탱커가 강력한 마기의 파장을 느낀 것처럼 전시영과 조나단도 공격을 멈춘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방금의 그 현상으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저 힘이 순간적으로 스킬을 취소했어."
"그 정도로 강력하단 말인가. 이거 믿을 수가 없군."
"저놈들이 들이닥친 뒤에 갑자기……. 어?"
전시영은 페드로와 샤르마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비인가 헌터들이 대회의실을 급습한 이유가 뭔지,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회담으로 인해 S급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저들이 유도한 것이라면?
레프와 조나단이 참석하지 않은 먼젓번의 협상 날에 페드로와 샤르마는 각각 협회 지부를 공격했다.
그때의 일로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던 양국은 끝내 오늘의 회담에 이르게 되었다.
각국의 대사와 지부장 등의 중요 인물들이 모이는 자리니, 호위 명목으로 S급 헌터들도 오게 되었다.
당연히 회담을 주최한 한국 헌터계에서도 전시영과 안지홍을 파견했고.
"저 파장의 근원지에 S급 헌터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였다면?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모였을 때, 일부러 테러를 일으킨 건가!"
전시영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새 대마초를 꺼내 불을 붙이던 페드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띵! 칙! 칙!
"스으읍! 그렇게 안 생겨 놓고, 의외로 되게 똑똑하군. 사건을 유추하는 게 제법 프로파일러 같아 보였어. 흐흐흐!"
사악하게 웃으며 코와 입으로 대마초 연기를 내뿜던 그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구멍 뚫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S급 헌터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페드로를 따라 움직였다.
놀랍게도 햇빛이 쏟아져야 정상인 구멍 난 천장은 시커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대회의실의 구멍이 가로막힌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뜬 무언가가 태양광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저, 저게 무슨……."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의 등장에 S급 헌터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랫동안 헌터 생활을 해 왔지만, 저런 건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것이 뭐든 막아야 합니다. 엄청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요."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S급 헌터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샤르마가 입을 열었다.
"후후훗! 이미 늦었어."
촤르르륵! 터덕! 쉬이이익!
샤르마는 채찍을 천장의 콘크리트 사이로 튀어나온 철근에 감더니, 순식간에 대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당연히 채찍은 페드로도 함께 휘감은 채 눈 깜짝할 새에 자취를 감추었다.
"저놈들이 도망을?"
"어서 쫓아요!"
전시영을 비롯한 S급 헌터들은 재빨리 천장의 구멍을 통해서 추격을 개시하려 했다.
하지만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다섯 개의 암녹색 구체로 인해, 엄폐물 뒤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쿠화아아앙!
* * *
한편, 청담동 블라드 유진의 저택.
그는 풀장을 건설하는 인부들을 구경하며 적혈구 모양의 선베드에 누워 따스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였다면 결단코 누릴 수 없는 호사였지만, 로드인 유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오늘은 시끄러운 여자 중 하나가 없기에, 훨씬 더 쾌적한 것 같았다.
물론 풀장 건설 작업으로 인한 소음 공해는 어쩔 수 없지만.
"커피 더 드릴까요?"
전시영이 없다 보니, 루시아는 블라드 유진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음."
그가 무심하게 머그잔을 내밀자,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커피를 내리러 갔다.
그런데 문득 따스하게 내리쬐던 햇살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쿠구구구구구!
더불어 어딘가에서 강력한 파장이 터져 나와 저택을 덮쳤다.
"어엇?"
깜짝 놀란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자, 유진도 선베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젖혀 보니, 서울 상공에 성채처럼 생긴 구조물이 둥둥 떠 있었다.
저 거대한 물체가 지상으로 쏟아져야 할 햇빛을 완전히 가로막는 중이었다.
게다가 천공의 성은 거뭇거뭇한 것들을 무수히 쏟아 내기까지 했다.
마치 비처럼.
휘이이잉! 철퍽! 퍽!
하늘에서 집채만 한 크기의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자, 순간적으로 루시아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