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95화 (96/226)

20화

DK에 의해 퍼핏이라 불린 남자는 외눈 안경을 번득이며 고개를 모로 꺾었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이나 좀비 같은 느낌의 기괴한 움직임이었다.

섬뜩한 미소를 지은 그자는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에 금테 외눈 안경을 낀 호리호리한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단정히 빗어 넘긴 흑발과 붉은빛이 감도는 서늘한 눈동자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시체 애호가, 퍼핏 아닌가? 동남아에서 활동하는 S급 비인가 헌터라고 들었는데. 물론 추정일 뿐이지만."

"……."

상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되묻는 순간, 이미 DK는 퍼핏의 정체를 알아채고 있었으니까.

아마 무슨 대답을 하든 교란하기는커녕, 확신만 더해 줄 뿐이었다.

물론 방금처럼 입을 다물어도 마찬가지의 결과만 낳게 될 터였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알았지?"

시체 애호가 퍼핏은 최근에 등장한 비인가 헌터였다.

비산의 암살자처럼 상당한 명성이 있었지만,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

이를테면 미국 헌터 지부를 급습한 녹색 머리의 여인처럼 베일에 싸인 놈이었다.

퍼핏이 질문을 던지자, DK는 지팡이 검을 휘리릭 돌리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봤거든. 네 뒤에 있는 그거."

"흠……. 역시 이놈이 문제였나."

꾸르륵! 콰득!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분신이 후방을 점했을 때, 불쑥 튀어나와 반격했던 정체불명의 살덩이였다.

저 괴상한 존재의 실루엣만 보고도 DK는 시체 애호가 퍼핏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솔직히 한국 땅에서 이걸 알아볼 인간은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실로 놀랍군. 역시 카르텔 설계자인가."

딱! 스르륵! 스륵!

녀석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기자, 현혹 능력에 걸려 쓰러졌던 두 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꿈틀거리며 신체를 변형하더니, 퍼핏의 육신을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그럼 다음에 보자고. DK."

쿠구구구구!

꿈틀거리는 살덩이에 올라탄 퍼핏은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DK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덩치의 무언가에서 수백 개의 다리가 튀어나와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간 것이다.

그 기괴한 모습을 목격한 DK와 정철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거 너무 괴물 같은 놈을 건드린 거 아니오?"

"아무래도 마스터께 보고해야겠습니다."

"회장님에게 마스터라면……. 대부님?"

"네."

"나도 같이 가는 거요?"

블라드 유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정철구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DK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두목님은 집어삼킨 사업장이나 잘 지키시죠? 아직 대전에는 수많은 세력이 있지 않나요?"

"아! 이제 슬슬 바빠질 참이었지. 그럼 다음에 대부님을 뵐 때, 데려가 주시오."

"아니, 그쪽이 마스터를 봬서 뭐 하려고요?"

"거, 원래 큰형님한테 인사도 꼬박꼬박 드리고 하는 거지요. 어흠!"

정철구가 거들먹거리는 걸음으로 지나가자, DK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데, 그 괴상한 조폭 코스프레는 언제까지 하는 건가요?"

"아니, 이게 왜 코스프레요? 조직이면 다 이런 거지."

"……대체 당신은 어느 시대를 사는 겁니까?"

아무래도 정철구를 향한 DK의 어이없는 눈빛은 한동안 계속될 것만 같았다.

* * *

"시체 애호가?"

"예, 그렇습니다. 벌인 사건은 많으나 시체를 남기지 않아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인물입니다. 실제로는 훨씬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죠."

DK는 곧장 서울로 이동하여 보고를 올렸다.

이제 전화로도 연락할 수 있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도청에 대비하여 직접 온 것이다.

유진은 DK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너까지 S급 비인가 헌터만 벌써 넷인가. 이거 공교롭군."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놈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연결?"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깊은 상념에 빠졌다.

녀석의 말에서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페드로가 언급했던 세 번째 마족인가.’

그렇게 생각한 유진은 DK를 바라보며 나머지 질문을 던졌다.

"뭘 가져갔다고?"

"드라코 도무스의 조각입니다. 응축된 마기의 결정체지요."

"조직에는 영향이 없나?"

"그냥 물러나는 걸 보니, 당장 훼방을 놓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뭔가 다른 목표가 있는 느낌입니다."

"일단 예의주시하고, 웬만하면 먼저 건드리지 마."

DK의 설명에도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본인과 조직에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야 마족 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순간적으로 그런 주인의 심리를 읽은 듯, DK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이거 제가 너무 호들갑을 떤 건 아닌가 싶네요. 하하!"

"웬만한 건 전화로 해도 돼."

"보고하러 오는 김에 겸사겸사 얼굴도 뵙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편하면 알아서 하고."

"알겠습니다, 마스터. 한데, 집이 되게 좋군요."

DK는 블라드 유진의 새집을 돌아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600평의 큼지막한 저택에, 그보다 서른 배나 넓은 개인 정원이 딸린 집이라니.

게다가 이곳은 거대한 도시의 한가운데 아니었던가.

고즈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극도로 호화스러운 장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저쪽에는 야외 풀장도 만들 거야. 물론 미국 놈들이 짓는 거지."

언제나 무미건조하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살짝 화색을 띠었다.

게다가 평소보다 말도 많이 하는 걸 보니, 새로 얻은 집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DK는 미소를 지으며 일부러 저택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칭찬을 이어 갔다.

하지만 유진의 밝은 표정은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다.

아침부터 숲속을 뛰어다니는 두 명의 선머슴 때문이었다.

"당장 그거 내놓지 못해요?"

"어허! 대체 누굴 보여 주려고 이런 걸 주문했을까? 이름이 뭐였더라? 가터……."

"조용히 안 해요?"

"오호? 이런 취향이었어?"

"닥쳐요! 이 빨간 머리 양아치야!"

우다다다다!

새벽 배송으로 온 루시아의 택배 상자를 전시영이 먼저 꺼내 본 모양이었다.

뜯어진 상자 속으로 얼핏 새카만 줄이 보이자, DK는 괜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아침부터 참 보기 좋은 광경입니다."

"시끄러워 죽겠군. 조용히 좀 시켜 보는 게 어떤가."

"제 능력이 그냥 통할 만한 상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혈성쇄혼술이 동급 대상을 그냥 제압할 수 없는 것처럼, 벨티아의 현혹 또한 같은 페널티가 있었다.

단박에 제압하기에는 전시영과 루시아라는 존재가 너무 강했다.

DK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피곤한 여자들이야."

"그렇게 여기는 것치고는 상당히 오랫동안 함께하시는군요. 실제로는 꽤 재밌게 구경하시는 거 아닙니까?"

"……착각이다."

아웅다웅하며 추격전을 벌이는 두 S급 헌터를 바라보며 유진은 머그잔을 기울였다.

* * *

며칠 뒤, 삼국의 헌터 협회 회담이 열리는 자리.

1년 전 아크웰이 드라코 도무스 토벌 계획을 설명했던 한국 협회의 대회의실이 바로 그 중대한 장소였다.

국가수반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헌터 협회장과 대사 등의 고위 공직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물론 한국 헌터 협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전시영과 안지홍도 회담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창 블라드 유진의 저택에서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내던 전시영은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나랑 참 안 어울리는 자리네. 아저씨만 와도 되는 거 아니야?"

"조금만 참아. 저기 다이애나 로즈 님도 오셨는데, 추태 부리지 말고."

"뭐어? 로즈 니이임? 아저씨 나이의 절반도 안 되거든요?"

"뭐 어때? 예쁘면 다 누나야."

"하! 나한테도 누나라고 해 보시지?"

"헐……. 양심 어디?"

"양심 없는 애한테 뒈져 보실래요?"

"크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사담을 나누는 동안, 회담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때가 되자 조지훈은 비장한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보더니, 단상에 올라서며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미궁 전략부장 조지훈입니다. 지금부터 냉전 종식을 위한 헌터 협회 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조지훈은 특히 ‘종식’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가며 회담의 개최를 알렸다.

이번에는 기필코 협정 조인에 성공하리라는 의지가 목소리에 가득 담겨 있었다.

조지훈은 각국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며 차분하게 회담을 이끌었다.

이윽고 각국의 대표들이 총론에서 합의를 시작했다.

여기서 의견이 갈려서 결렬되지 않는다면, 따로 실무 회담을 해서 합의를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임시 협회 지부를 습격한 자의 정체를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오."

"러시아도 마찬가지외다. 그 녹색 머리 헌터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요? 해외정보국(SVR) 소속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소만."

"우린 모르는 일이오."

"마찬가지로 이쪽도 습격한 사실이 없소."

러시아의 안톤 대사와 미국의 헌터 협회 한국지부장 제이컵 그레이는 시작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설전은 부드럽게 끼어든 조지훈에 의하여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아, 한국 협회에서도 할 말이 있겠지."

"어디 해 보시구려."

안톤과 제이컵은 서로를 힐끔거리더니, 조지훈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이런 식의 주장만 가득한 회담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쏠리자, 조지훈은 헛기침으로 목을 풀며 마이크를 잡았다.

"러시아 임시 지부를 공격했던 자는 S급 비인가 헌터, 페드로로 확인되었습니다."

"이것 보시오. 우린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

제이컵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결백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안톤 대사는 유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비인가 헌터를 그쪽이 고용했을 가능성도 있는 거 아니오?"

"뭐라고요? 아니, 그럼 우리 측을 공격한 그 녹색 머리 여자는 누구요?"

제이컵의 질문에 조지훈은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샤르마라는 비인가 헌터인데, 페드로와 한패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게 다 미국 짓이었던 거지요?"

"죄송하지만, 안톤 대사님 그게 아닙니다. 여길 좀 봐 주십시오."

조지훈은 빔프로젝터 화면을 가리키며 담담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자들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어떤 세력의 비호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비인가 헌터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거든요."

미궁 전략부장이 준비해 온 증거는 모두 전시영을 매개로 블라드 유진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러시아 지부를 공격했던 인물이 페드로라는 사실은 그만이 알고 있던 정보였으니까.

이번 회담은 유진 덕분에 매끄럽게 진행되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흠."

안톤 대사와 제이컵 지부장은 각자 작게 침음을 내뱉었다.

조지훈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인가 헌터 놈들에게 양국이 농락당했다는 결과가 도출되니까.

"그저 혼란을 야기하는 게 목적이었던 건가."

안톤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제이컵도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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