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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94화 (95/226)

19화

DK는 잡아 온 정체불명의 헌터들에게 현혹 능력을 걸어서 온갖 정보를 빼냈다.

예상대로 물건 구매 대행이나 하는 잔챙이들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DK는 대상이 잊은 기억까지 깡그리 긁어서 그럴듯한 정보를 창출해 냈다.

"아무리 점조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정보 및 성과 공유는 이루어지기 마련이지요."

"오오! 그럼 이놈들을 관리하는 중간 보스를 잡아내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겠구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수성파를 치는 겁니다."

"오늘 바로요?"

"당연하죠. 다른 조직들에는 철구파가 출사표를 던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추적을 감지했을 겁니다."

지금껏 정체를 완전히 숨긴 채 그 많은 물품을 사들인 조직이라면, 이미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사로잡은 하위 조직원들의 기억을 지워서 돌려보내더라도 마찬가지일 터.

무조건 속전속결로 들이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DK의 주문에 정철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 탈을 정리하던 조직원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중구 잡으러 가자."

그러자 똥섭이라는 조직원이 정철구를 향해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형님, 중구파 보스는 나금명인디요."

"이름으로 지은 거 아니었어?"

"예, 중구에서 활동하던 조직이라 그렇게 지었다는……."

"크흠! 마! 거, 인형 탈 더러워지게 자꾸 만지작거리지 말고 얼른 나가!"

"예!"

괜히 민망해진 정철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조직원들이 후다닥 인형 탈 창고를 나섰다.

DK는 아까보다 더욱 붉어진 정철구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요즘에 누가 별명도 아니고 본명으로 조직 이름 짓습니까? 우리 연합체에서도 딱 철구파만 그럽디다. 다른 보스들이 유치하다고 좀 바꾸라던데요."

"커흠흠흠흠! 아따 날씨 조옷타."

정철구는 괜히 앞뒤로 손뼉을 치며 딴청을 피웠다.

그 아재미 가득한 모습을 지켜보던 DK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나직이 영어로 중얼거렸다.

"진짜 독특한 캐릭터네."

그러자 창고 문 앞에 서 있던 정철구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무식해도 외국 욕은 다 알아듣소. 회장님이라 해도 못 참아요."

"하아……. 욕 아니었습니다만."

"딱 느낌이 욕이었는데, 그럼 뭐라고 했는데요?"

"말해 주면, 뭐 압니까?"

"아! 그건 또 그렇구먼."

허허 웃으며 창고 문을 열고 나간 정철구를 바라보며, DK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아무래도 연합체에 조직을 잘못 가입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철구파의 남수성파 기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애초에 DK가 합류한 싸움이라, 질 확률 따위는 0.1%도 존재치 않았다.

승부처가 도래할 때마다 현혹 능력이 빛을 발하자, 철구파 조직원들은 상대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놈 이거 왜 이렇게 약하지?"

"그러게. 꼭 중요할 때마다 헛짓거리하네."

"이게 다 회장님 덕분이잖아. 줄곧 암수를 쓰면서 지원해 주고 계셨다고."

"아, 그런 거야?"

철구파 조직원들이 의문을 표하든 말든 DK는 남수성파 보스에게 현혹 능력을 걸고 있었다.

이윽고 나금명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외눈 안경……. 그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안 그러면 다 죽어."

"이름은?"

"몰라. 나도 그 외에는 아는 게 없어."

상당한 규모의 비인가 헌터 조직을 제압했건만 건진 정보는 ‘외눈 안경’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었다.

"잠깐, 외눈 안경?"

아무래도 이 일을 꾸민 녀석이 외눈 안경을 쓰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DK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외눈 안경을 쓰고 다니는 인물은 몇 없으니, 이쪽 업계 사람이라면 의외로 금방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DK의 상념은 정철구에 의해서 깨지고 말았다.

"또 점조직이오?"

"뭔가 지시를 받긴 하지만, 이놈들도 잔챙이군요."

"허! 남수성파가 잔챙이면, 우린 뭐가 되는 거요?"

"음……. 잠룡이라고 해 두죠. 앞으로 철구파가 대전을 장악할 거 아닙니까?"

"으허허! 그건 그렇지요. 아, 이거 웃을 때가 아니지. 어찌 되었건 또 막히게 생겼는데, 이제 어쩌실 셈이오?"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 뭔가 혜안이라도 있소?"

정철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DK는 남수성파 조직원들을 돌아보며 답했다.

"이놈들을 거쳐서 납품되는 거 아닙니까? 아직 어제오늘 들어온 물건이 올라가지 않았으니, 약속 장소에 나가면 될 일이지요."

"오! 이놈들로 위장하자는 거로구먼."

"아뇨. 평소랑 인원 구성을 똑같이 할 겁니다. 그래야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요."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을 것 같소만."

"협조할 겁니다."

정철구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남수성파 조직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DK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마침 오늘 밤이 납품일이니, 바로 가 보시죠."

"쩝! 그럽시다."

DK는 조직원들에게 현혹 능력을 걸어서 꼭두각시로 만든 뒤, 남수성파 사무실을 나섰다.

다섯 명의 남수성파 조직원들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들고 어두운 밤거리를 조심스럽게 거닐었다.

DK와 정철구는 그런 녀석들을 은밀하게 추적했다.

혹시나 들킬 것을 우려하여 조직원들은 떼어 놓고 온 상황이었다.

한참을 시장 외곽에서 서성이던 남수성파 조직원들은 어느 순간 경계 지역 쪽으로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러더니 오염 지대로 접어들기 직전에 딱 멈춰서더니, 누군가와 접촉하는 게 아닌가.

두 사람은 접선 중인 조직원들의 근처에 불쑥 나타났다.

"어이! 동작 그만. 물건 건들지 마. 손모가지 날아간다."

정철구가 가시 박힌 쇠몽둥이를 빼 들며 난데없이 개입했지만, 접선자 측은 담담했다.

마치 이 상황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별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이었다.

"뭐야? 이놈들 왜 안 놀라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정철구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돌아보자, 숨어 있던 DK도 모습을 드러냈다.

딱!

인식 제한 능력을 풀자마자 손가락을 튕기며 어렴풋이 보이는 세 명의 상대에게 ‘벨티아의 현혹’을 건 것이다.

털썩! 털썩!

"음?"

하지만 뒤에 시립해 있던 두 명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뿐, 맨 앞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 있게 현혹 능력을 걸었던 DK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시가 연기를 빨아들였다.

"후우우! 네놈은 뭐지?"

"누가 내 뒤를 이토록 정확하게 쫓나 했더니, 카르텔 설계자였군."

놀랍게도 상대는 DK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어둠에 가려져 실루엣만 보이는 상황이라, 목소리와 체형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단박에 날 알아볼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을 텐데."

DK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같은 업계 사람이라고 해도 녀석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DK가 누군지 어디에서 활동하는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어둠 속에 서 있던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우리 업계에서는 나름 유명하니까?"

척! 척!

상대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비열한 웃음을 머금었다.

가로등 불빛에 다리가 딱 드러나는 순간, 그자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왼손을 올려 얼굴을 만졌다.

그러자 눈 주변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외눈 안경?"

DK는 빛나는 물건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동그란 광채는 남수성파 보스가 말했던 외눈 안경이 틀림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DK는 지팡이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바로 그 순간, 상대의 뒤에서 누군가가 레이피어처럼 가는 검을 휘두르며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외눈 안경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검지를 까딱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뭔가가 불쑥 나타나더니, DK의 것과 똑같이 생긴 검을 튕겨 냈다.

콰직―! 파스스스!

기습을 가한 존재는 꿈틀거리는 물체와 충돌한 직후, 가루로 변해 흩어져 버렸다.

바스러지기 전에 잠깐 보인 것은 DK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녀석은 천군압쇄를 시전하여 상대의 뒤를 노린 것이었다.

"아쉽군."

어둠 속을 유심히 살펴보니, 기괴한 실루엣이 언뜻 보였다.

외눈 안경을 호위하는 조력자가 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듯했다.

"재미있는 능력이네. 나와 좋은 대결을 펼칠 수 있겠어."

"그게 무슨 뜻이지?"

"그거야 차차 알아 가면 되는 거고. 오늘은 이 괴상한 초대를 끝내야겠군."

"그렇게는 안 되지."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난 필요한 만큼의 물품을 모두 구했으니까."

"이번에 가져온 것들은 필요 없다는 소리인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 오늘은 그냥 당신 얼굴이나 보러 온 거야."

"……."

상대의 여유로운 대응에 DK와 정철구는 서로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기습에 당한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포식자가 피식자의 발악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문득 들었다.

"후후후! 반응이 좀 미적지근하긴 해도 이 정도면 만족스럽군. 카르텔 설계자가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니, 난 좀 많이 봤는데?"

정철구는 도깨비방망이 같이 생긴 몽둥이를 휘휘 돌리며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나름 반박이랍시고 한 거였는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듯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보자, DK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왜 그럽니까?"

"아무래도 당황이 아니라 황당인 것 같군.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카르텔 설계자."

외눈 안경의 사내는 정철구를 비웃으며 DK를 향해서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어둠에 녹아들 듯, 발끝부터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스스스스스!

마치 바람처럼 그대로 자취를 감추는 능력에 DK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잠깐!"

"음?"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자 사라져 가던 상대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몸의 반만 없어진 채로 고개를 갸웃한 것이다.

DK는 그런 그자를 향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내빼면 재미없지. 안 그래? 시체 애호가. 퍼핏(Puppet)."

그러자 어둠 속에서 외눈 안경만 빛내고 있던 남자가 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호?"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

* * *

"이쪽으로 오시지요."

"꽤 크군."

"건물 면적만 600평이고, 주변 부지는 대략 1만8천 평입니다. 청담동에서 단독 면적으로는 가장 넓은 곳이지요. 이보다 한적한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블라드 유진은 조지훈과 함께 말끔한 새 건물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 장소는 난민들이 숨어 살던 작은 공원이었으나, 높은 울타리를 치고 개인 별장으로 만든 곳이었다.

헌터 협회는 비공식적으로 가장 강한 권력을 지닌 기관이다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토지 전용도 가능했다.

원래는 협회장의 별장이 될 예정이었지만, 유진이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한 번도 이용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 온갖 일이 터지면서, 매일같이 야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와중, 별장은 그에게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블라드 유진의 마음에 든 부지와 건물을 끝까지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주변 눈치가 너무 보였고, 현재 한국 헌터계에서 슈퍼 갑은 바로 그였으니까.

―꺄하하핫! 불발이다! 아니, 발불인가?

"푸르릉! 이히힝!"

다그닥! 다그닥!

집 주변을 둘러보던 와중,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든 조지훈의 눈에 시뻘건 화염 발자국을 남기며 돌아다니는 녹턴과 레니가 보였다.

놀랍게도 그 둘은 저택 지붕을 밟으면서 불을 내는 중이었다.

"저, 저거 괜찮은 겁니까?"

미궁 전략부장은 황당한 표정으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팔짱을 끼고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손가락을 살짝 휘저으며 답했다.

"바꿔. 불에 잘 안 타는 재질로."

업무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에, 조지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흡혈 스킬에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오!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조지훈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평소에 찾지도 않던 신을 부르짖고 말았다.

아무래도 리모델링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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