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93화 (94/226)

18화

전시영은 맥심과 다이애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양손으로 S자를 그리며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쭉쭉 빵빵 걔잖아?"

맥심 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시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그 사람 맞긴 하네요. 한데, 미국 헌터가 여긴 웬일이죠? 눈치가 있으면, 당당하게 올 만한 곳이 아닐 텐데요?"

블라드 유진의 집은 전시영을 기습하려던 미국 헌터들에 의하여 폭파되었다.

양심이 있다면 무너진 건물 잔해 앞에 나타나서 검소하니 뭐니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루시아의 얘기를 들은 모양인지, 다이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올 만한 곳이 아니라는……. 아, 미국 협회에서 공격한 곳이 여기였나 보네요? 우리가 크게 한 방 먹을 만도 했구나."

새삼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면, 다이애나 로즈는 상황을 잘 모르고 입국한 것 같았다.

"다이애나 씨는 협회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내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에요."

여성 S급 헌터들의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조지훈은 조용해진 틈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한 마디를 얹었다.

그러자 전시영과 루시아의 찌릿한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조지훈이 다이애나를 두둔하는 것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국 헌터 협회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 로즈는 냉전의 향방을 결정지을 회담에 중재자 역할로 참석하게 되었으니까.

"우선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건설 비용을 미국 협회 측에서 낸다고 했다던데, 이래서 그런 계약 내용이 있었군요."

"아, 네. 하지만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할 거라, 계획이 좀 변경되었습니다. 저희가 건물을 내드리는 대신에 수리하고 꾸미는 모든 비용을 지급하는 쪽으로요."

"어떤 식이든 보상은 확실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유진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보상 따위에 큰 관심이 없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조지훈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회담?"

"아, 냉전 관련 정보를 전해 드리지 못했군요. 한국 헌터 협회 청사에서 회담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협회 관련자뿐만 아니라, 대사와 국무총리까지 참석하는 중대한 자리죠."

"규모만 커졌지, 지난번과 똑같겠군."

"정확하게 파악하셨습니다. 특별한 변수가 없으면, 원만하게 합의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지훈은 오랜만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창 냉전이 격렬해질 때는 얼굴에 항상 먹구름만 끼었는데, 그게 종식된다고 하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 쪽은?"

"아마 조만간 방문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입국하는 외교관을 통해서 보상을 보낸다더군요."

"리모델링 완공은 언제지?"

"이틀 후, 입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마쳐 놓겠습니다."

조지훈이 마치 내시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자, 블라드 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입 안의 혀처럼 구는 한국 협회가 점점 그의 마음에 들고 있었다.

유진은 그런 미궁 전략부장을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일 못 하는 노예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는데, 이제는 훌륭한 하인 정도로 바뀐 것 같았다.

"잘했다. 조지."

"……감사합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든 조지훈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재빠르게 달려오더니, 블라드 유진을 향해서 마치 절하듯 인사를 박았다.

"안녕하십니까? 블라드 유진 님!"

살짝 고개를 돌리자, 다이애나 로즈와 마찬가지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보였다.

깡마른 몸매에 동그란 금테 안경을 쓴 유약한 인상의 남자.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확실히 그와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

"어? 이 사람……."

"반갑습니다. 전시영 랭커님."

"그때 그 대사잖아?"

"예,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재한국 러시아 대사 안톤 니코노비치 이반이라고 합니다."

안톤 대사는 전시영을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인데,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못 하고 러시아로 떠나야만 했다.

러시아 협회의 헌터들이 블라드 유진에게 도륙당하면서, 한국에 머무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건이 되지 않아서 곧장 본토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말을 이제야 하게 되는군요."

"의무를 다한 것뿐인데요, 뭐."

"따로 사례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 보세요. 그럼."

전시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 잔해에서 건진 자기 짐을 차량으로 옮겨 실었다.

그러자 안톤은 블라드 유진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달칵!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내부 회의를 거치다 보니, 가장 가치 있는 걸 드리자는 결론이 나왔죠. 그래서 이걸 가져왔습니다."

안톤 대사가 서류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내밀자, 그는 무심한 손짓으로 받아들었다.

그런데 홀로그램에 아이템을 비추어 보던 유진의 눈에 문득 이채가 떠올랐다.

<아이템 정보>

명칭 : 동반자 강화석

등급 : SS

내구도 : 일회용

효과 : 동반자 승급

특징 : 동반자의 등급을 한 단계 올릴 수 있음. 최대 SS급까지 가능.

"호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그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진은 조지훈을 지나치더니, 곧장 레니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는 녹턴에게 다가갔다.

‘이 녀석 등급이…….’

헌터 등급은 추가적인 부호가 붙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템이나 스킬에는 플러스, 마이너스 부호가 붙어서 등급을 조금 더 세분화하여 보여 주었다.

동반자도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는데, 녹턴의 등급은 A+였다.

SS급 동반자 강화석으로 승급하기에는 조금 아까웠으나, 블라드 유진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유령 군마는 이동 수단에 불과할 뿐, 무력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묘한 색으로 반짝이는 조약돌을 녹턴의 몸에 대자, 순간적으로 오색찬란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번―쩍! 츠츠츠츠츠!

[동반자 ‘부케팔로스의 영령(녹턴)’이 승급했습니다.]

[동반자에게 새로운 능력이 생성되었습니다.]

<동반자 정보>

명칭 : 부케팔로스의 영령(녹턴)

등급 : S+

효과 : 비행, 화염 방사, 은신

스킬 : 잉걸불 발자국

말발굽이 닿은 지점에 불덩어리가 튀어나와 주변을 불태움. 이 화염에 닿으면 영혼이 찢어지는 고통에 잠식됨.

"푸르르! 푸르!"

녹턴은 기분 좋은 듯, 작게 투레질하며 블라드 유진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S+급이 되면서 녀석은 새로운 스킬만 얻은 게 아니었다.

외형적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시뻘건 불길이 발목에서도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잉걸불 발자국이라는 스킬이 생김으로써 이런 변화를 겪은 모양이었다.

녹턴은 발굽을 디딜 때마다 화염이 치솟자, 스스로 잉걸불 발자국 스킬의 위력을 조절했다.

"괜찮군."

그의 반응을 살피던 안톤 대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머리를 싸매서 도출한 해답이 나쁘지 않은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유령 군마를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준비해 봤습니다. 다행히 동반자가 SS급을 넘는다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로군요."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러시아는 합격. 보복은 없던 거로 하지."

"가, 감사합니다."

안톤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건넨 뒤, 서류 가방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조금 당황한 듯한 다이애나 로즈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유진은 그녀와 아주 잠깐 눈을 마주치더니,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한마디 경고를 던졌다.

"미국은 집을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레니와 함께 녹턴의 위에 올라탄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윽고 하늘 높이 올라간 유령 군마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자체적인 은신 능력을 활용하여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방금 승급했기 때문인지, S급 헌터의 감각에도 녹턴의 기척은 거의 잡히지 않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존재감 또한 이내 사라져 버렸다.

아마 너무 거리가 멀어져서 아예 감지할 수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블라드 유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다이애나 로즈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제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으십니까?"

문득 조지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했지만, 그녀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사라진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몽롱한 눈빛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날 이렇게 대한 건 당신이 처음이야."

차량에 짐을 가득가득 싣고 있던 전시영과 루시아는 그런 다이애나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쟤도 정상은 아닌 거 같아."

"동감합니다. 저 이상한 분위기에 옮기 전에 얼른 가죠."

"응. 튀튀."

턱! 부우웅!

황급히 차에 탄 두 여자는 완파된 옛 유진의 집을 황급히 떠났다.

이제 그곳에는 다이애나 로즈와 안톤 대사, 조지훈만이 남아서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 * *

블라드 유진이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보상을 뜯어내고 있을 때, DK는 한창 정체불명의 조직을 조사하고 있었다.

카르텔 설계자가 개입하자, 철구파의 위세는 사뭇 대단해졌다.

이제껏 제대로 기도 못 펴고 있던 삼류 비인가 헌터 조직이 대전 경계 지역 시장을 활보하고 다니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오늘 대승을 거두고, 몇몇 조직을 지리멸렬하게 했다.

덕분에 상당한 면적의 사업장을 확보하게 된 정철구는 입이 귀에 걸리게 될 지경이었다.

물론 대전 암시장에 돌아다니는 괴상한 놈들을 조사하는 게 우선이라, 얼른 으슥한 장소를 섭외했다.

"아무리 보안이 중요해도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조직 아닙니까?"

"크흠! 그건 그렇지요."

"근데 이게 뭐예요? 다들 가게 홍보하고 다니세요?"

"대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가 없었소이다. 광고라도 열심히 해야지요. 크험험!"

정철구는 연신 헛기침하며 짧게 깎은 빡빡머리를 어색하게 문질러 댔다.

경계 지역 시장을 쳐서 정체불명의 조직원들을 잡아 가둔 곳은 다름 아닌 인형 탈 창고였다.

철구파 조직원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게 DK를 더욱 놀라게 했다.

"자꾸 인형 탈만 보지 마시고, 얼른 정보나 좀 캐 봅시다."

험상궂은 인상의 정철구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재촉하자, DK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기절한 남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는 카르텔 설계자의 진정한 힘이 발휘될 시간이었다.

물론 황당한 배경 때문에 집중이 잘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좋습니다. 슬슬 시작하죠."

DK는 양 손바닥을 살살 비비며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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