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92화 (93/226)

17화

"미궁의 조각이요? 그게 뭐였죠?"

생소한 단어에 DK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한국 절반의 경계 지역 시장을 꽉 휘어잡고 있는 연합체 회장이라도 유통되는 모든 물건을 알지는 못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완전히 처음 듣는 단어라,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철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양산에 있던 그거 있잖소. 드라 뭐시긴가 하는 대규모 미궁. 그게 정화되면서 입구가 조각조각 부서져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어디 있더라? 대충……. 뭐 이렇게 생긴 거요."

아재 느낌 물씬 나는 몸짓으로 옷 이곳저곳을 뒤지던 정철구는 뒷주머니에서 시커먼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엉덩이 부근에서 마치 오물 같은 걸 끄집어내자, 순간적으로 DK는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불쾌한 상황이 벌어질 거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철구의 손에 놓인 시커먼 물체는 그냥 반들거리는 돌이었다.

마치 흑요석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단단한 것 같았다.

B급 비인가 헌터인 정철구가 강하게 힘을 줘도 부서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게 그 미궁의 조각인가 하는 겁니까?"

"그렇소이다. 일반적인 성체 미궁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드라……. 아무튼 대규모 미궁에서는 발생하는 모양이오."

"드라코 도무스요. 어떻게 한국 사람이 본토에 있던 대규모 미궁 이름도 모릅니까?"

"그야 우리 같은 비인가들은 몬스터와 싸울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허허! 아무튼, 이 물건이 시중에서 자취를 감췄소. 몇몇 품목이 함께 사라지긴 했는데, 이게 품귀 현상 초창기부터 가장 현저히 줄어든 상황이오."

"그래요? 미궁의 조각이 원래 어디에 쓰였는데요?"

"그게……. 사실 이건 별 쓸모가 없소. 가공이 불가하거든. 뭐 엄청나게 단단한 짱돌 정도로는 쓸 수 있으려나? 상대방의 머리통을 찍어 버리는 용도 말이오."

"그런 장난 같은 방식 말고, 진짜 효용 가치가 아예 없는 물건입니까?"

"아! 수석(壽石)으로 쓰려고 사 가는 사람이 간혹 있긴 했지요. 그 왜 있잖소. 돌 주워다가 집에 모셔 두고 하는 거."

"흠……."

정철구가 설명한 대로 미궁의 조각은 응축되어 단단하게 굳은 마기였다.

에너지 코어처럼 흡수하여 헌터의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련 레시피를 지닌 생산직 헌터도 없었다.

그저 드라코 도무스의 입구였다는 상징성 하나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인데, 대체 왜 그걸 사 모으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한 듯 눈을 가늘게 뜬 DK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휴미더(Humidor, 시가 전용 용기)를 열었다.

DK는 잘 숙성된 몇 개의 시가를 케이스에 옮겨 담고 나서야 정철구를 돌아보았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요. 안 그래도 그쪽에 힘을 좀 실어 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곧장 대전으로 올라가는 거요? 저기 바깥에 세워진 차로 말이오?"

"그래야겠죠."

"그럼 같이 좀 타고 갑시다."

"뭐 타고 오셨는데요?"

"조직에서 쓰는 차를 타고 왔지요. 근데 저런 고급 세단을 보고도 안 타 볼 수는 없지 않겠소?"

정철구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독일제 검은 세단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 옆에는 허름한 느낌의 오래된 승합차가 서 있었다.

신생 조직이라 아직 돈을 잘 벌지 못해서 저런 차를 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하긴 대전은 워낙 조직들이 중구난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곳이니, 암시장 사업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후! 그럽시다."

한숨을 길게 내쉰 DK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허허! 역시 회장님이시구먼. 넓은 마음으로 조직원들을 감싸신다더니, 명불허전이오!"

"대신!"

DK가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정철구가 입을 다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건물을 쩌렁쩌렁 울리는 음파에 기묘한 살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뭐 먹는 거? 안 돼요. 차 바닥에 흙 떨구는 거? 싫어요. 제 코냑에 눈독 들이는 거? 꺼져요. 살고 싶으면, 이 세 가지를 명심하십시오. 아시겠어요?"

"아, 크흠! 예, 알겠소이다."

황당한 얼굴로 DK를 쳐다보던 정철구는 양손을 펼쳐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왠지 속마음을 제대로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입이 심심한데, 웨하스만 어떻게 안 되겠소?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그럼 바로 뒈져요."

"넵."

지이익!

가방에서 네모난 과자를 슬그머니 꺼내려던 정철구는 황급히 지퍼를 잠가 버렸다.

안 그랬다간 DK가 눈빛만으로도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그들아. 알아서 잘 와라잉."

"예, 형님!"

두 사람이 차에 타고 사무실을 떠나자, 정철구 조직의 승합차가 덜그럭거리며 뒤따랐다.

* * *

DK와 정철구는 오후가 되어서야 대전에 도착했다.

배가 고프다고 노래를 불러 대는 정철구 때문에, 오다가 식당에 들른 탓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지만, 정체불명의 매입자를 추적하는 일은 제대로 진행 중이었다.

철구파 조직원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매입자를 은밀하게 조사하고 있었으니까.

DK는 대전에 가자마자 상황 보고부터 받았다.

험상궂은 얼굴에 듬직한 덩치, 사지에 가득한 문신.

정철구와 빼다 박은 듯한 조직원이 당구봉으로 어설프게 전지를 넘겨 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하나같이 폭력배처럼 생겼지만, 이 녀석이 그나마 조직의 브레인을 맡은 모양이었다.

"자, 설명 들어가겄습니다이. 요게 원래 매달 나오는 평균인디, 요게 이번 달 판매량입니다잉. 요게. 요게. 잘 보이시지요?"

탁! 탁!

당구봉이 전지의 이곳저곳을 찌르자, 어떤 품목이 씨가 말랐는지 나름대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DK는 시가 연기를 뿜어내며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표는 얼추 알아보겠는데, 사투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요게, 사투리 빼고 설명하세요."

"아! 넵. 그것이 말이지요. 특히나 이, 요, 그기……. 미궁의 조각뿐만 아니라, 마기가 농축된 물건은 죄다 팔려 나갔습니다. 문제는 여러 사람이 사 갔는데, 아무래도 한 조직인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더듬더듬하던 조직원은 AI가 읽어 주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발표를 마쳤다.

아무래도 사투리를 억지로 안 쓰려다 보니, 저런 이상한 말투가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조직의 정체는 알아냈습니까?"

"아, 그것은 아직입니다. 대신에 그놈들이 나타나는 패턴은 파악해 뒀습니다. 최근에는 개장 초와 폐장 시간에만 슬쩍 들어와서 쓸어 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몇 놈 잡아서 족치면, 정체를 알아낼 수 있겠군요."

"근데 한두 놈이 아닌 데다가, 대부분은 간만 보고 돌아갑니다. 무작위로 딱 한 놈만 물건을 사 가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조직 매대만 쏙 피했습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오늘은 폐장 시간을 노려 볼 수밖에 없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형, 아니……. 회장님."

발표자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영락없는 한국 조폭의 모습이었지만, 외국인인 DK의 눈에는 그저 웃기게만 보였다.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발표를 지켜보던 정철구는 뒤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여윽시! 우리 조직의 브레인이여. 잘했다. 똥섭아."

"감사합니다. 형님."

한 번 더 90도 인사를 한 발표자가 물러나자, DK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철구를 바라보았다.

"그놈들 잡으러 가 봅시다."

"근데 그러다 놓치면 어떡하오? 진짜는 한 놈뿐인데."

"괜찮습니다. 관련 있는 놈들은 가리지 말고 모조리 잡아들이세요. 놓치거나 들통나도 상관없어요."

"스읍!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장님 명령이니 그대로 따르겠소이다."

정철구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팔랑거렸다.

그러자 철구파 조직원들이 장비를 챙기며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헌터용 방어구에 흉흉한 무기를 거머쥔 수십 명의 거한이 우르르 몰려가자, 마치 무슨 전쟁이라도 난 듯한 느낌이었다.

"자, 드가자!"

아까 그 똥섭이라는 발표자가 선두에서 외치자, 조직원들이 달려가 시장 곳곳을 마구 들쑤시기 시작했다.

대전은 철구파 말고도 온갖 다양한 조직들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뜸 다른 세력이 기어들어 와서 매대 앞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데, 가만히 있을 조직이 있겠는가.

"이 새끼들 뭐야? 저리 안 꺼져?"

"어어? 이놈들 이거 철구파네? 마! 느그 대가리가 시키드나?"

콰직―! 퍽! 퍼퍽!

대전에서 힘깨나 쓰는 조직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철구파를 공격했다.

마치 이런 명분이 있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조직을 친 것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도시라, 주변에 있던 상인과 손님들은 알아서 슬금슬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물론 불구경만큼 재밌는 것이 싸움 구경이니, 적당히 거리를 두고 비인가 헌터들의 패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 전쟁의 결과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조직이 패권을 잡는지에 따라서, 경계 지역 시장의 모든 것이 바뀔 테니까.

"허헛! 좀 밀리는구먼. 역시 아직 부족한가 보오."

정철구의 말대로 철구파 조직원들은 의심스러운 놈 몇을 포획한 뒤부터 주야장천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전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크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는 뭐, 원래도 예상했던 거 아닙니까?"

"나도 슬슬 나서야겠소."

"됐습니다. 대전까지 올라온 김에 제가 힘을 좀 쓰죠."

"오호! 회장님의 능력이라……. 무지하게 궁금하구려."

"별로 볼 것도 없을 겁니다."

시가 연기를 길게 내뱉은 DK는 철구파 조직원들 사이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그런데 DK가 그저 전선에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전황은 급변했다.

시종일관 밀리던 철구파 조직원들의 손에 상대측 비인가 헌터들이 픽픽 쓰러지는 게 아닌가.

치열하게 치고받는 와중에 현혹 능력에 걸려, 상대측 조직원들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찰나의 순간에만 정신을 어지럽혔을 뿐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퍽! 퍼벅!

"커헉!"

"으어억!"

전투 중에 한눈을 판 대가로 치명적인 일격을 몇 대씩 얻어맞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DK는 철구파 조직원들을 보조하며 대전의 경계 지역 시장을 유유히 돌아다녔다.

* * *

한편, 블라드 유진은 조지훈과 함께 영지로 받을 부지를 구경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번에는 파주가 아니라, 서울 한복판이었다.

아무래도 협회가 보유한 땅이 외곽에는 없었고, 한강이 쭉 보이는 경치가 그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늘 본 곳으로 하시겠습니까?"

"나쁘지 않더군."

"개조는 끝났으니, 입주만 하면 됩니다. 건물 잔해와 물건을 분리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유진은 폭파된 파주 집으로 돌아와 잔해 옆에 쌓아 둔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의 물건이라고 해 봐야 관 모양의 침대와 자질구레한 것뿐이었다.

중요한 건 전부 복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블라드 유진과는 달리, 전시영과 루시아는 물건 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와! 내 무선 이어폰이 살았어. 반갑다. 이 자식! 크흑흑!"

"캐리어가 불타서 옷은 다 버려야겠네요. 어휴!"

두 사람이 물건 더미를 뒤지며 일희일비할 때, 그는 반으로 쪼개진 선베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건 꼭 필요해.’

그런데 조지훈에게 더 푹신하고 좋은 거로 사 놓으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생각보다 검소하게 사시네요?"

어디선가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와 귓가를 간질이는 게 아닌가.

블라드 유진은 이미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챈 상태였다.

하지만 뭔가 독특한 기운으로 전신을 감싼 것이 신기했기에 잠깐 시선이 갔을 뿐.

이내 폭파된 집의 잔해와 선베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여행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던 여인은 잠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과 처음 마주치고도 저렇게 건조한 반응을 보인 남자는 극소수였으니까.

"어엇? 저, 저 사람은?"

예상했던 대답은 놀랍게도 물건을 뒤지던 두 여자에게서 들려왔다.

전시영은 운동복 안쪽을 꾸물거리며 뒤지더니, 꾸깃꾸깃한 책자를 불쑥 꺼냈다.

그것은 스페인에서 보았던 맥심 잡지였다.

"아니, 그걸 아직도 들고……. 그것보다 그딴 식으로 갖고 다닌다는 게 더 놀랍네요."

루시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전시영을 바라보다가, 문득 유진의 뒤편에 서 있던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늘씬한 키에 육감적인 몸매,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

미국에서 활동하는 영국 출신의 S급 헌터, 다이애나 로즈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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