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일단 절 잘 모르실 테니, 소개부터 하는 게 우선인 것 같습니다."
"해 봐."
"교황청 성기사단의 한국 파견대 대장, 폰시아노입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폰시아노는 블라드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그가 누군지 알고 있더라도, 예의상 간단하게나마 소개를 바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유진은 머그잔에 입을 대며 대충 이름을 알려 주었다.
"블라드 유진."
"듣던 대로 무뚝뚝한 분이시군요."
"용건은?"
"……뭐,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쪽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시겠지요."
폰시아노는 그가 교황 파벌의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긴 지금까지 블라드 유진이 이룬 업적을 교황이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했다.
이제껏 안드레아와의 연관성을 딱히 부정하지 않고 활동해 왔으니까.
"주위를 좀 물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슬쩍 주변을 둘러본 폰시아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안 듣는 척하면서 괜히 티슈를 뽑아 창문을 닦고 있었다.
"엣헴! 호텔에 무슨 먼지가 이렇게 많아."
"그러게요. 청소를 제대로 안 하나 본데요?"
게다가 레니는 마음대로 폰시아노의 가방을 뒤지더니, 실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보통 유진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뭐라도 하나씩 가져오는데, 이 성기사의 가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탕 없어? 쓸모없네.
이들이 함께 있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인지 폰시아노는 독대를 청했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원하는 걸 들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내가 한 말이 새어 나가도 아무 상관 없는데."
마치 너는 뭐가 그리 뒤가 구리기에 당당하게 말도 못 하냐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살짝 얼굴을 붉힌 폰시아노는 미간을 좁히며 빠르게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냥 말하지요. 저도 똑같은 입장이니까요."
"그래서 용건은? 벌써 두 번째로 묻고 있는데."
"왜 당신 같은 사람이 교황청 내부의 파벌 싸움에 이용당하는 거죠? 요한 님처럼 독자적인 길을 가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바티칸의 성검이라 불리는 S급 헌터 요한은 유럽 각국의 전력이 부족한 곳마다 참전해 주고 있었다.
교황청 소속이기는 하지만, 그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완벽하게 중립을 지켰다.
오로지 정의로운 일에만 힘을 사용하고,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어떠한가.
스페인의 미궁 군체를 정화해 주면서 다양한 혜택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교황과의 연결 고리는 놔둔 상태라, 그가 승승장구할 때마다 안드레아의 입지는 자꾸만 올라갔다.
안테리오르 타워가 정화된 이후부터는 미묘하게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점차 깨지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위기감을 느낀 성기사단에서 폰시아노를 은밀하게 보낸 것이다.
교황의 심부름꾼으로 유명한 아크웰 페리티노를 구워삶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고작 용건이 그런 건가? 교황이 아니라, 내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온 거였군."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해 오셨던 것처럼 성기사단을 외면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중립을 유지해 주십시오. 요한 님처럼 정의를 위해서 말입니다."
폰시아노의 말이 끝나자, 블라드 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런 요구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말끝마다 바티칸의 성검을 들먹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자를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성기사단의 세력이 더욱 빠르게 무너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부에서 적당히 치고받았으면 좋겠는데.’
그가 원하는 건 교황청 내의 알력 싸움이 장기화하는 것.
생각을 정리한 블라드 유진은 폰시아노를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너희도 날 정치적으로 활용해."
"예?"
"그럼 얼추 균형이 맞겠군. 다음번 공략은 성기사단과 함께한다고 공공연히 떠들어도 좋아. 못 믿겠으면 아무나 한 명 붙여 주든지. 좀 전에 나간 저놈처럼 말이야."
자리를 비워준 아크웰을 거론하자, 폰시아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가 지난번과 같은 활약을 해 준다면, 지금껏 교황이 해 왔던 선전을 뒤집는 게 가능했다.
유진이 오직 안드레아의 명령에만 따르는 게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 활동한다는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으니까.
"조, 좋습니다. 최대한 빨리 사람을 보내 드리지요."
폰시아노는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답했다.
하지만 그는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붓는 듯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 가지 더."
"예, 말씀하십시오."
"그만큼 충분한 보상이 있어야지 않겠나? 그래야 이용당하는 맛이 있지."
"……만족할 만한 보상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건 미리 좀 알려 줘야겠군. 최근 미국은 저택, 러시아는 최상급 아이템을 약속했다. 참고하도록."
"네, 중복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수준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이번에는 깊이 고개를 숙인 폰시아노는 흡족한 표정으로 객실을 나섰다.
그런데 문득 시선을 돌리자, 전시영과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니와 함께 과자를 까먹고 있던 두 사람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황청 성기사단에서 직접 찾아와 읍소하는 남자라니, 개멋있잖아? 교황청에 뭔 짓을 했길래 저러는 거야?"
"그러게요. 그 콧대 높은 성기사가 이렇게 굽신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상황을 단단히 오해한 듯했지만, 블라드 유진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말은 거의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멋있다는 부분이 말이다.
‘짜릿해. 늘 새로워.’
* * *
"이제 추적이 안 되는군."
"죄송합니다. 권역 바깥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더 이상 그 여자를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DK는 진 연합체 간부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세뇌한 조직원을 자폭시키는 방법으로 샤르마를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다음 계획은 실현할 수가 없었다.
충남 쪽으로 이동한 샤르마가 페드로와 함께 종적을 감추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직 그곳까지는 진 연합체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해서, 대놓고 뒤질 수는 없었다.
그곳은 진 연합체의 확장으로 쫓겨난 조직들이 아비규환을 이루는 지역이었으니까.
"괜찮아. 이미 그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DK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죄하는 간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미 상대가 S급 비인가 헌터로 위장한 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이번 일로 어수선해진 조직 내부를 정비하는 게 훨씬 더 급선무였다.
"사상자는 어떻게 되나."
"폭탄 테러로 인해 사망한 조직원은 총 아홉 명입니다. 열두 채의 가건물이 통째로 날아갔지만, 금전적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샤르마를 목표로 한 폭탄 테러는 DK가 꾸민 짓이었다.
하지만 진 연합체 내부에는 비인가 헌터가 새로운 카르텔을 만들기 위해 공격한 거로 알려진 상태였다.
DK는 내부의 소문까지도 제어할 정도로 섬세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합체 차원에서 죽은 조직원의 가족들에게 배상을 해줘야겠군."
"예? 배상을요?"
"왜? 이상한가?"
"그런 전례가 없어서 말입니다."
DK의 발언에 연합체 간부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비인가 헌터 조직에서 일원의 가족까지 챙긴단 말인가.
그것도 이번에 당한 조직원들은 전부 말단에 불과한 녀석들인데 말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어진 DK의 말에 간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인재를 끌어모으고 조직에 충성하는 이들을 양성하는데, 이만큼 좋은 재료도 없지. 장례부터 사후 처리까지 꼼꼼히 살피고, 보상금도 두둑이 책정해."
"어, 얼마나 주는 게 좋겠습니까?"
"여유 자금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 1년 치 급료는 줘야겠지."
"알겠습니다."
"가 봐."
"예."
DK는 카르텔의 충성심을 끌어 올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핵심 간부는 현혹 능력으로 완벽하게 세뇌해 놓고, 그 외의 조직원들은 복지로 붙잡아 두었다.
일반적으로 불법적인 일을 자행하는 비인가 헌터는 사망하거나 당국에 잡혀가는 걸 걱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조직의 수뇌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위험한 일에도 안심하고 뛰어들 수 있었다.
본인이 죽어도 카르텔에서 가족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을 테니까.
당연히 진 연합체에 협력하는 조직의 보스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매우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DK는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카르텔을 키워 낸 바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정도를 걷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있지."
철컥! 칙! 쿠르르!
새 시가를 꺼내 든 DK는 커터로 캡을 자르고, 토치 라이터를 켰다.
풋 부분을 골고루 태우고 나서 불을 끈 다음, 천천히 연기를 흡입했다.
"후우우……. 슬슬 서쪽을 공략해야 하는데, 생각 외로 저항이 거세군."
진 연합체가 덩치를 키우면서 상당수의 비인가 헌터 조직은 충남과 전북 인근으로 거점을 옮겼다.
한국의 땅덩이가 워낙 좁다 보니, 그쪽은 이미 포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확장 중의 충돌로 인해서 진 연합체에 악감정을 가진 조직이 대다수였기에, 회유도 난항을 겪는 중이었다.
하지만 DK는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 본 인간이었다.
"직접 나설 때가 된 건가. 가끔은 복지보다 공포가 훨씬 잘 먹힐 때가 있지."
쪼르륵!
그렇게 중얼거리며 찬장에서 코냑을 꺼내 잔에 따르자, 시가 연기를 뚫고 들어오는 향긋한 내음이 느껴졌다.
프랑스의 절반이 오염 지대가 되면서 포도주와 브랜디의 생산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 양질의 코냑을 얻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각종 첨가물(boisé)을 넣어 만든 가짜 코냑이 판을 치고 돌아다녔다.
"스페인 정부에서 선물로 줬다고 했나? 역시 대단하신 분이야. 하하!"
DK는 이렇게 귀한 코냑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주던 블라드 유진을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마스터로 섬기기를 백번 잘한 것 같았다.
제3세계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괜찮은 코냑을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왠지 주인이 자신의 취향을 신경 써 주는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물론 유진은 술보다 커피를 더 즐겨서 생각 없이 넘겨준 거였지만, 뭐 어쨌든 착각은 자유지 않은가.
똑똑!
시가와 코냑을 즐기던 와중에 누군가가 DK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덜컥!
"아, 드디어 뵙게 되는구먼. 잘 지내셨소?"
"정철구 사장님이로군요. 대전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여기까진 어쩐 일입니까?"
"아, 뭐. 공부도 할 겸 해서 연합 사업장도 들러 보고 하는 거지요."
"그렇습니까?"
거대한 덩치의 철구파 회장 정철구는 최근에 진 연합체에 가입한 조직의 두목이었다.
대전에 적을 둔 조직이라 영입했지만, 실적이 저조하여 안 그래도 슬슬 힘을 좀 실어 줄 참이었다.
아마 정철구도 대전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 답답해서 진 연합체 회장 DK를 찾아온 것이리라.
"좋은 걸 드시고 있었구먼."
"하하! 대부님께서 하사하신 술입니다. 아껴먹는 중이지요."
정철구의 시선이 코냑으로 향하자, DK는 슬그머니 병을 찬장에 넣어 버렸다.
한 방울도 나누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괜히 정철구가 입맛을 다시자, DK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안 됩니다."
"아니,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소만?"
"그래도 안 돼요."
"달라고 안 할 테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시다면야 조금 안심이 되는군요."
"크흠흠!"
코냑을 뚫어지게 쳐다본 게 민망했던 모양인지, 정철구는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DK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나직이 질문을 던졌다.
"아직 방문 목적을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만."
"아, 그래요. 목적이 있었지요. 요즘 대전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소."
"이상한 움직임이랄 게 있나요? 거긴 원래 좀 난잡한 동네 아닙니까?"
"이거 내가 예민한 건지 참……."
"사소한 거라도 말씀해 보세요.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괜찮습니다."
DK의 재촉에 정철구는 뒷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미궁의 조각을 깡그리 쓸어 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