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DK는 가평 경계 지역 시장 인근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자 시장의 중앙에서 홍염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쿠구구구구구!
"후우우! 제대로 걸렸군."
녀석은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카르텔 형성을 막기 위한 DK의 수법은 샤르마를 질리게 만드는 거였다.
조직 내에서 가장 약하고 효용 가치가 없는 인물을 정신 지배하여 그녀를 유인하고 자폭하게 만드는 악랄한 방식이었다.
물론 고작 이 정도로 샤르마를 처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카르텔을 만들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다.
앞으로 그녀가 조직 창립을 위해서 만나는 비인가 헌터마다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할 테니까.
"크크크! 아주 그냥 학을 뗄 때까지 반복해 주마."
아무래도 블라드 유진은 마족보다 더욱 악랄한 놈을 하수인으로 만든 것 같았다.
* * *
연이은 테러로 인해 샤르마는 DK의 의도대로 카르텔 생성을 포기하고 말았다.
제아무리 강한 존재라도 수완이 없으면, 카르텔을 형성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수완에는 당연히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십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샤르마에게는 그런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존재치 않았다.
만나는 비인가 헌터마다 족족 폭탄 테러를 일삼았으니까.
"이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IS 놈들보다 더하잖아?"
그녀는 분통을 터트리며 진 연합체의 권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쭉 남하한 페드로를 찾아 몇 개의 지역을 건넜다.
지구에서 동료 마족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기를 공명하여 마계 귀족 특유의 신호를 발산하면,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샤르마는 페드로를 향해서 만나자는 신호를 보낸 뒤, 계속 위치를 공유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두 마족은 충남 천안 설화산 인근에서 재회할 수 있었다.
"푸하핫! 대체 그 꼴은 뭐야? 취향이 바뀌기라도 한 거냐?"
"빌어먹을.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냐고. 한국인들 사이에서 활동하기에는 내 외모가 너무 튀어서 어쩔 수 없었어."
"하긴 여기 사람들이 좀 개성 없긴 하지."
샤르마의 청순청순룩을 보고 놀려 대던 페드로는 품속에서 담배 팩과 지포 라이터를 꺼냈다.
띵! 칙! 칙!
"그놈의 대마초는 아직도 피우는 건가? 오랫동안 지구에 있더니, 인간들과 동화되기라도 한 모양이네."
"지구에서 얻은 새로운 낙이라고. 너도 한 떨 즐겨 봐."
"냄새가 별로라서 싫어. 환각을 원한다면, 차라리 불법 약물을 들이켜고 말지."
페드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연신 대마초 연기를 빨아들였다.
경계 지역의 몬스터로부터 얻는 물질은 온갖 강력한 마약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대마는 상당한 면적의 재배 구역이 필요한 작물이었다.
당국의 눈을 피하는 게 워낙 어려워서, 현지 수급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저 녀석의 손에 대마초가 있다는 건, 공급처를 찾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조직 창설에 성공한 모양이로군."
"맞아. 이쪽은 개발이 덜 돼서 그런지, 그야말로 개판이더라고. 몇 놈 굴복시켜서 거느리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 너도 그렇지 않나?"
"……."
페드로의 질문에 샤르마는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제까지도 당했던 무식한 폭탄 테러에 치가 떨렸기 때문이었다.
고작 인간 놈들이 이토록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던지라, 그녀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페드로는 입에서 대마초가 떨어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천하의 시오르젠 백작이 그런 표정을 지을 줄이야! 형제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특종이로군."
"닥쳐. 네놈의 머리 가죽도 벗겨 버리기 전에."
"오호? 널 방해했던 놈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나 본데?"
"그건 아니야. 전부 잿더미가 되었지."
"그래? 더 흥미롭구먼. 계속 말해 봐."
샤르마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평 인근의 경계 지역 시장에서 겪은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페드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팩에서 새 대마초를 꺼내 물었다.
띵! 칙! 칙!
"빱! 스읍! 후우우! 자살 폭탄 테러라……. 그거 네 밑에 있는 녀석들이 전문 아니었나? 몸을 터트려서 뼛조각을 파편처럼 쓰는 애들 있잖아."
"그래. 내 휘하의 마족들이 쓰는 기술이지."
"공교롭게도 같은 수법에 당했군. 애초부터 널 노리고 작업을 친 게 틀림없어. 혹시 짐작 가는 놈은 있나?"
"……내 정체를 아는 자는 거의 없을 텐데. 같은 S급 비인가 헌터가 아니라면 말이야."
"잠깐만. S급 비인가 헌터? 이거 아무래도 그 녀석 짓거리 같은데?"
"그 녀석이라니? 뭔가 아는 거라도 있나?"
"한국으로 들어오자마자 어떤 놈을 만난 적이 있거든. 카르텔 설계자라고 말이야."
"그자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고?"
"그래."
카르텔 설계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샤르마의 표정은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같은 비인가 헌터로 활동했지만, 이제껏 두 마족은 DK의 꼬리조차 제대로 밟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신출귀몰한 놈과 싸우는 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다른 공작 전하의 수하라는 소문이 있던데, 아무리 같은 소속이 아니라지만 너무하는 거 아닌가? 굳이 우리끼리 밥그릇 싸움할 필요는 없잖아. 역할에 너무 심취한 모양이군."
"아니야."
"뭐?"
"그놈 그거 마족 아니라고. 맞붙어 봤을 때, 마기 반응이 전혀 없었어. 전투력은 S급 상위인 데다가, 스킬이 상대하기 좀 까다롭더라고. 하지만 그래 봐야 인간이지."
"그럼 이 모든 걸 한낱 인간 놈이 꾸민 짓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괜찮아. 적어도 아군은 아니니까, 마음대로 처치할 수 있잖아?"
"종적을 잡을 수도 없는 놈을 무슨 수로?"
"생각해 봐. 그놈은 한국에 카르텔을 만들었어. 그럼 주 무대가 이 좁은 땅덩이로 한정되지. 그만큼 그 자식이 도망치기가 어렵지 않겠나?"
"계획이 실현되면, 어차피 걸려들게 되어 있다는 건가?"
"그렇지. 카르텔이라는 것도 기반이 되는 인간 사회가 있어야 돌아가는 거거든."
"준비만 철저히 하면 되겠군. 아주 좋아."
샤르마는 페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안색이 밝아졌다.
드디어 그 유령 같은 놈에게 복수할 길이 보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페드로는 마지막으로 조언 한마디를 더 던져 주었다.
"복수하려면 임무의 완성이 전제되어야 해. 재료부터 찾으라고."
"알았어. 주의하지."
두 마족은 완벽하게 인간으로 위장한 채,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냉전으로 인한 국지 전투가 연신 벌어지고, 암흑가에서는 DK와 마족들의 기 싸움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그런 아귀다툼과는 아무 상관 없이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불쑥 찾아왔다.
집이 폭파된 이후부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아크웰 페리티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바티칸으로 떠난 거 아니었나?"
"아하하……. 그, 그럴 리가요. 계속 한국에 있었습니다만?"
"찾아오지 않기에, 교황청과 내 관계가 그대로 끊어진 줄 알았지."
"크흠! 그건 안될 말이죠. 우린 운명 공동체 아닙니까? 운명 공동체."
아크웰의 뻔뻔한 대답에 유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자, 비스듬히 세운 머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레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죽일까?
그의 심기가 불편해졌음을 감지하고, 새파란 살기를 드러낸 것이다.
"됐어. 그냥 개미 같은 녀석이야."
―아, 그랭? 불쌍하지. 개미.
살벌한 레니의 말을 들은 아크웰 페리티노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녀석은 레니의 진면모를 전혀 모르기에, 그저 어린애가 한 이상한 말로 치부해 버렸다.
그게 진짜 죽여 버릴 거라는 진지한 말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개, 개미라뇨. 하하!"
"됐고. 용건이나 말해."
"아, 넵! 맞아요. 호텔까지 찾아온 용건이 있었죠."
아크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을 물고 온 모양이었다.
이윽고 녀석은 곤란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전해 드릴 소식은 두 가지입니다. 공식적인 것과 비공식적인 게 있는데, 뭐부터 말씀드릴까요?"
"공식."
"음. 공식적인 건 교황 성하께서 보내신 내용입니다. 드라코 도무스 이후로 대규모 미궁을 전혀 공략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쭉 이어진 아크웰 페리티노의 전언에 블라드 유진의 눈빛은 착 가라앉았다.
사실 이제 대규모 미궁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광진의 성배 엘―칼릭스는 얻은 상태였고, 천상계로 통하는 차원문은 그의 의지 하에 개방이 결정될 것이다.
다만 유진은 미궁이 넘쳐나는 세태와 현대의 문명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기에, 차원문을 열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천상계의 존재들이 건너와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교황의 의도대로 얌전히 움직이는 척하는 중이라, 이유 없는 항명은 지양해야만 했다.
차르륵!
그는 문득 손목에 감긴 은색 사슬을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교황과 관련된 생각을 할 때면, 이 성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고뇌에 잠겼던 블라드 유진은 이내 아크웰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안테리오르 타워를 공략한 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건 그렇죠."
"아직 회복이 필요하니, 대규모 미궁 공략은 조금 천천히 진행하겠다고 전해."
"예? 아주아주 멀쩡해 보이시는데요?"
"그냥 그렇게 전달하는 것이 네 신상에 좋을 텐데."
"크흠흠! 예, 알겠습니다. 유진 님께서 그러시다면, 당연히 그런 거겠죠."
말을 마친 그는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크웰 페리티노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유진을 향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다음."
"아! 네, 비공식 소식이 있었죠. 그건 제가 소관이 아니라서, 다른 분이 전달할 겁니다."
녀석은 객실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가더니, 한동안 아무 소식이 없었다.
조금 늦어지는 느낌이 들자, 블라드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잔 내렸다.
고소한 향을 음미하던 그는 이윽고 현관 쪽에서 누군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의 중년 남자가 객실 입구에 서 있었다.
‘분명 언젠가 본 얼굴이다.’
자주 마주친 건 아니고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임이 틀림없었다.
유진의 기억력은 수천 년 전에 겪은 사건도 또렷하게 기억할 정도로 뛰어났으니까.
이렇게 가물가물한 느낌이 드는 건, 짤막하게 마주쳤던 사람과 재회했을 때가 가장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교황의 사자, 블라드 유진. 맞으시죠?"
중년 남자의 목소리를 듣자, 그의 뇌리에 어떤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 인간이군.’
B급 암살자 계열 딜러 전진우를 따라서 어딘가에 침투했을 때, 발견했던 두 명 중 하나였다.
까맣게 염색한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넘긴 중년 남자.
한국에 파견된 교황청 성기사단의 일원이 아크웰과 함께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의외의 방문이었지만, 유진은 당황하지 않고 상황을 얼추 가늠할 수 있었다.
아크웰이 거론했던 비공식 소식이라는 말, 그 안에 힌트가 존재했으니까.
게다가 이자는 그를 ‘교황의 사자’라고 지칭했다.
일반적으로 블라드 유진은 교황청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말이다.
"교황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찾아왔나?"
그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한마디를 툭 던지자, 상대의 눈에 순간적으로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