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진짜 엄청나게 강했다니까? 조나단 그놈까지 S급 셋이서 덤볐는데도 유유히 도망치더라고."
호텔로 돌아온 전시영은 블라드 유진과 레니의 앞에서 팔다리를 과장되게 흔들며 설명했다.
아무래도 아까 만났던 녹색 머리 여인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니는 휴대 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그의 관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이들이 인간으로 위장한 또 다른 마족을 만난 모양이군.’
페드로와의 대화를 통해 미국 임시 지부를 공격한 게 마족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시영의 말을 들으며 대충 주억거리는 동안, 휴대 전화를 보던 루시아가 TV를 켜 주었다.
"벌써 떴네요. 여길 좀 보셔야겠는데요."
띡―!
그러자 공교롭게도 뉴스 채널이 화면에 곧장 떠올랐다.
[긴급 속보입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이 재점화되었다는 소식입니다. 금일 오전 아홉 시께 양국의 임시 협회 지부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정체불명의 헌터들이 나타나 무차별 폭파와 살상을 일으킨 건데요. 이 사건으로 인해 냉전 양국은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벌이는 중입니다. 변형신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이윽고 미국과 러시아의 헌터들이 격돌하는 모습이 화면에 비추어졌다.
헌터 전력을 충원한 양국은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단연 돋보이는 활약을 하는 한 헌터가 있었다.
전시영은 전형적인 러시아 마초처럼 생긴 거구의 백인을 가리켰다.
"쟤 레프 아니냐?"
"그러고 보니, 냉전에서 처음 보네요. 뒤늦게 합류한 모양입니다."
레프 미하일로비치 알렉세이는 눈에서 형형한 안광을 쏟아 내며 미국 헌터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전투는 대부분이 희미하게 블러 처리되는 중이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장면을 공중파에 그대로 내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긴급 속보가 끝나고 다음 뉴스로 넘어가자, 루시아는 그제야 TV를 껐다.
"어쩌실 거예요?"
"……."
루시아가 질문을 던졌지만, 블라드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러시아가 한국에서 뭔 짓을 하든 전혀 관련 없는 존재였다.
애초에 국적조차 없는데, 국가 간의 알력 싸움에 뭣 하러 끼어들겠는가.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이익을 얻는 게 아니라면, 움직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국내에 들어온 비인가 헌터들의 동향은 예외였다.
‘분명 조직에 영향을 미칠 테지.’
비인가 헌터가 활동하기 좋은 땅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카르텔을 만들어 현금을 왕창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마족이라고 해서 여타의 비인가 헌터들과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돈벌이는 차치하고서, 일단 혼란을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일차적 목적은 달성하는 거였으니까.
똑똑―!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문득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진의 시선이 돌아가자, 문이 저절로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카드키가 없는데도 문을 열 수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마스터."
"왔나."
"예."
스위트룸으로 들어와 공손히 인사를 올린 사람은 DK였다.
원래라면 부산으로 돌아가서 조직을 단속해야 하지만, 중간에 마음이 바뀐 그는 다른 일을 맡겼다.
강선아가 찾아왔을 때 전화를 건 사람도 바로 이 녀석이었다.
유진의 의념을 통해서 번호를 전해 듣고, 곧장 전화를 건 것이었다.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전화로 해도 될 텐데 굳이 찾아왔군."
"아무래도 도청의 여지가 있어서, 중요한 내용은 직접 보고하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해 봐."
DK는 슬쩍 전시영과 루시아를 돌아보았다.
레니야 그의 동반자나 마찬가지인 존재니 상관없지만, 저 두 사람은 어딘가에 소속된 헌터 아닌가.
길드는 없어도 어쨌든 한국과 스페인 협회의 명령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은 슬쩍 손을 저었다.
"상관없으니 그냥 해."
"예."
그의 명령에 DK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알아 온 사실을 쭉 늘어놓았다.
"페드로는 빠른 속도로 남하하는 것만 확인한 상태입니다. 서울을 벗어난 이후로는 추적하지 못했습니다."
"남쪽이라……."
"아무래도 새로 확장하는 영토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다소 어수선한 곳이 카르텔을 만들기에 적합하니까요."
"그놈은 됐어."
"예, 녹색 머리 여자는 인도에서 활동하던 비인가 헌터 샤르마입니다. 최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머무르다가 입국했더군요. 역시나 미국과 러시아 어디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샤르마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8대 S급 비인가 헌터는 아니지만,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보유한 인물이었다.
하긴 S급 헌터 세 명이 달려들었는데 할 거 다 하고 유유히 빠져나갈 정도면, 실력은 이미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정보 수집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자, DK만이 샤르마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을 테지. 그 여자도 남하했나?"
"아닙니다. 강원도 인근에서 이곳저곳을 들쑤시는 중입니다."
"귀찮아지겠군."
페드로와 마찬가지로 샤르마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유진뿐이었다.
S급 헌터 세 명이 달라붙어도 이길 수 없는 존재를 진 연합체의 힘으로만 상대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샤르마는 그가 처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페드로는 세 번째 마족의 존재를 언급했다. 나머지 하나는 아예 모습 자체를 드러내지 않은 건가.’
블라드 유진은 안테리오르 타워에서 이미 백작급 마족 두 명과 싸워 우세를 점한 바 있었다.
레니의 도움으로 천즈한을 묶어 두었기에, 사실상 일대일로 게일드 백작을 쓰러뜨린 거였다.
만약 한국에 들어온 마족이 셋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페드로를 처리했을 것이다.
당연히 혈성쇄혼술로 하수인을 만들 수 있는지 곧장 알아봤을 테고.
‘한낱 구두 약속에 불과한 불가침 협정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지.’
애초부터 마계의 귀족들과 신뢰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이득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고뇌에 잠겨 있던 유진의 귓가에 DK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자를 이길 수는 없지만, 카르텔을 만들지 못하게 방해 공작을 펼칠 수는 있습니다."
"그래?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다니."
"예,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마스터께서 거론하셨던 세 번째 비인가 헌터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일단 염두에 두기만 하고 활동하라고."
"네."
"아, 그리고 이거 가져가."
"이건……."
"스페인 정부가 보내온 건데, 난 필요 없어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마스터."
DK는 공손한 자세로 갈색 액체가 든 병을 받아든 뒤, 조심스럽게 스위트룸을 나섰다.
짧게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이 마치 국왕을 대하는 신하와도 같았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DK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무슨 하인이라는 사람 능력이 왜 저렇게 좋아?"
"직접 공격을 당했던 미국 협회에서도 녹색 머리 여자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대체 하루 만에 그걸 어찌……."
두 사람은 아직 블라드 유진이 거대 카르텔의 흑막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상태였다.
당연히 DK를 그저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 주는 부하 정도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녀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옷 사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도 후줄근하군."
대신에 여전히 운동복을 걸치고 있는 전시영과 루시아의 옷차림을 지적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괜히 팔을 툭툭 털었다.
"싸우다 보니 더러워진 거지. 아, 금방 새로 살 거라고."
"그, 그럴 거예요."
둘은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유진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금 평화를 되찾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탁자를 더듬었다.
커피를 내려 둔 머그잔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손에 닿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옆을 돌아보니, 레니가 자기 얼굴만 한 머그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그러더니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번쩍 떴다.
―으엑. 맛없어. 써…….
아무래도 커피는 다시 내려야 할 것 같았다.
* * *
"한국은 되게 신기한 곳이군. 겉으로는 멀쩡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속은 아주 제대로 곪아 있단 말이지. 흐흐흐!"
샤르마는 가평 인근의 경계 지역 시장을 거니는 중이었다.
흑룡파의 조직원들이 관리하는 시장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나 노점을 세우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고, 주어진 구획 내에서만 깔끔하게 매대를 마련하도록 정해 두었다.
원래는 그냥 자릿세만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DK가 들어오면서부터 이렇게 바뀐 것이다.
겉은 상당히 번지르르해서 누가 보면 합법적인 것 같지만, 뒤에서는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산직 헌터가 만들어 낸 성능 좋은 불법 약물이나, 강력한 마약 등이 돌아다녔다.
당연히 개중에는 다른 헌터를 죽이고 빼앗은 장물도 심심찮게 보였다.
다양한 국가에서 비인가 헌터 생활을 해 온 샤르마는 그런 조직원들의 생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녀는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경계 지역 시장을 쓱 훑었다.
"의외로 괜찮은 물건이 좀 있네?"
매대를 둘러보던 샤르마는 성능은 좋은데 가격이 꽤 저렴한 아이템 몇 점을 눈여겨보았다.
시선을 확 끄는 물품이지만, 섣불리 사 가려는 헌터는 거의 없었다.
보통 저런 물건을 들고 다니다 보면, 상당히 곤란한 문제에 직면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이 근방에서 사용하고 말 거라면, 크게 상관없겠지만.
"이거 얼마지?"
"으허허! 원래 가격은 천인데, 예쁜 아가씨니까 20% 할인해 드리리다. 8백만 주시오."
샤르마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챙 넓은 모자에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약간 이국적으로 생긴 미인이 따로 없었다.
아이템 사이에 장물을 숨겨 놓고 팔던 상인은 구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흔쾌히 상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태닝이라도 한 듯 가무잡잡한 피부는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허허! 여기서 더 깎아 주는 건 곤란한데."
상인이 헤벌쭉 웃으며 헛소리를 지껄이자, 샤르마는 손아귀에 서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뚜둑! 뚜두두둑!
"으헉! 끄어억!"
그녀의 악력은 성인 남성의 뼈를 간단히 으스러뜨려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비명을 꽥꽥 지르는 상인의 멱살을 쥐고 잡아당긴 샤르마는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놈 대가리 어디 있어? 그 새끼 낯짝이나 좀 보자."
"크으으으! 너, 너 누구야!"
"입만 잘 놀리면, 손만 박살 나고 끝날 수도 있을 텐데? 이래도 제대로 말 안 한다고? 이래도?"
콰득! 콰드드득!
그녀가 팔목을 연속으로 붙잡을 때마다 깊은 손자국과 함께 뼈가 으스러졌다.
상인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멀쩡한 반대편 손을 놀려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저기……."
시장 한가운데에 숨겨진 가건물이었다.
"크크! 거대 카르텔이라더니, 의외로 의리 같은 건 별로 없나 보네?"
"으으으으!"
휙! 털썩!
샤르마는 상인을 대충 옆으로 던져버린 뒤, 카르텔의 사무실로 추정되는 가건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조직의 사무실이 이런 허름한 건물이라니 영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녀는 큰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경계 지역은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라, 시장의 위치도 수시로 바뀌니까.
이동하기 편한 가건물을 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출한 사무실에 웬 젊은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앳된 얼굴에 샤르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은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가벼운 인사를 보낼 뿐.
"왔나?"
"네가 보스?"
"지금은 그래."
"이상하군. 이 정도로 규모가 작을 리는 없을 텐데?"
"그야 당연하지. 국내로 들어온 쥐새끼를 처리해야 하니까."
"뭐? 쥐 새끼?"
샤르마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사무실 중앙에 시뻘건 무언가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러더니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대폭발이 일어나 가건물을 통째로 집어삼켜 버렸다.
쿠화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