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얄 블러드-88화 (89/226)

13화

"꺄하하핫!"

쿠화아앙! 콰과광!

녹색 머리의 여인은 쾌활하게 웃으며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암녹색 구체가 미국 헌터들이 숨어 있던 엄폐물 뒤로 날아들었다.

처음에는 방패와 방어구로 파편을 막아 낼 수 있었지만, 아이템의 내구도는 영원하지 않았다.

수백 번의 강력한 충격이 이어지면, 제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도 부서지기 마련이었다.

콰아앙! 콰칭―!

"이, 이런 젠장!"

탱커 포지션으로 보이는 헌터 한 명이 완전히 쪼개진 방패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벌써 두 번째인 데다가, 더 이상 공간 확장 주머니에 방패는 없었다.

방금 깨 먹은 것만 수백만 달러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점에 그깟 아이템이야 얼마든지 부서져도 상관없었다.

"오호호홋! 어디 숨어 있나?"

쉭―! 타닥!

마치 마녀 같은 웃음소리의 녹색 머리 여자는 건물 사이를 건너뛰며 숨은 미국 헌터들을 찾아다녔다.

방금 방패가 부서졌던 탱커는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뒤에 숨어서 숨죽이고 있었다.

저 미친 여자가 지나가고 나면, 반대편으로 뛰어서 동료들과 합류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자의 노림수는 시작부터 원천 차단되고 말았다.

척!

"크히히!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 모를 줄 알았니?"

어느새 녹색 머리 여자는 콘크리트 더미 위에 쭈그리고 앉아서 탱커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어딜 도망쳐?"

휘리리릭! 텁!

탱커가 이를 악물고 달려 보았지만, 그녀의 채찍은 뱀처럼 다가와 발목을 콱 깨물어 버렸다.

"으헉!"

쿵!

바닥에 쓰러진 그자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순식간에 뒤로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철퍼덕!

"윽!"

콘크리트 더미로 다시 끌려와 처박힌 탱커는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미 다리는 풀려 있었지만, 한층 더 무시무시한 광경이 그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후웅! 후웅!

어느새 빙글빙글 돌아가는 채찍의 끄트머리에 암녹색 구체가 맺혀 있었던 것이었다.

"으아아아!"

탱커는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입을 어물거렸다.

"후후후! 이번에는 이걸 네놈 뱃속에서 터트려 줄게."

휘리릭!

그녀가 채찍을 강하게 튕기자, 허공으로 솟구친 암녹색 구체가 탱커의 얼굴을 향해서 떨어져 내렸다.

한데, 절체절명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텔룸 콩쿠수스(tēlum concúsus)."

쐐애애액! 쩌어엉!

어디선가 날아온 거대한 빛의 화살이 낙하하던 구체를 정확하게 찌르는 것이 아닌가.

강력한 힘이 가해지자, 놀랍게도 암녹색 구체는 산산조각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호오?"

자신의 공격이 한순간에 파훼되었지만, 녹색 머리의 여인은 흥미롭다는 듯이 빛의 화살을 직시했다.

그러다 재차 찬란한 백광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자, 정면으로 채찍을 강하게 떨쳤다.

쑤화아앙! 콰칭―!

채찍에 깃든 시커먼 기운이 빛의 화살에 닿자, 귀청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충격파가 번져 나갔다.

채찍을 후려갈겼던 녹색 머리의 여인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상당한 위력이군. 어떤 놈이지?"

그녀는 공포에 질린 탱커는 무시한 채, 어디론가 시선을 돌렸다.

척! 척!

마치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시가지의 도로 한가운데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나타났다.

전신을 빈틈없이 감싼 은빛 갑옷에 3미터가 넘는 깃발 창을 든 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간헐적으로 뇌전이 흘러나오는 흰 천이 빛의 화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녹색 머리의 여인은 입꼬리를 한껏 말아 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에스파뇰 잔 다르크를 한국에서 보게 되다니, 이거 놀라운데?"

아무래도 루시아 헤레라 레예스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S급 헌터다 보니, 알아보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특히 은색으로 빛나는 저 뇌신의 흉장을 걸쳤을 때는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녹색 머리의 여인을 처음 만나는 모양이었다.

"넌 누구지?"

"이거 정체를 바로 밝히면 재미없는데……."

"그럼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적은 그저 분쇄할 뿐."

철컥!

루시아는 장난기 가득한 상대의 말을 무시한 채, 깃발 창을 높이 치켜세웠다.

그러곤 지면을 향해서 창대를 냅다 후려치는 게 아닌가.

"풀고르 글로부스(fulgor globus)!"

쉬익―! 후우웅! 쿠콰콰콰콰!

창날이 지면을 강타하자, 뒤따라 휘날리던 백색 깃발에서 강렬한 뇌전이 튀어나왔다.

방전하는 구체에서 발생한 번개가 마치 나무줄기처럼 기괴하게 꺾이며 앞으로 쭉 쏘아졌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라, 피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훗! 듣던 대로 앙칼지군."

휘리릭! 쉬쉭―!

하지만 녹색 머리의 여인은 채찍을 길게 뻗어 삐죽 튀어나온 철근을 붙잡더니, 말도 안 되는 몸놀림을 보여 주었다.

가만히 선 채로 마치 순간 이동하듯 저 멀리 미끄러져 나간 것이다.

이윽고 그 여자는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르릉!

그러는 동안 풀고르 글로부스의 방전 구체는 맹렬하게 번개를 뿜어내다가 목표를 잃고 사라져 버렸다.

루시아는 상대가 웬만한 S급 헌터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조나단 잭슨도 녹색 머리 여자의 공격에 맥을 못 추고 당하지 않았던가.

회심의 일격이 두 번이나 실패했지만, 루시아의 태도는 담담했다.

"잘 피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모두 예상 범위 내의 움직임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투구 덮개를 뚫고 흘러나오는 순간, 상대가 밟고 있던 건물 옥상에 문득 노란색 구체가 생성되었다.

삐이이―! 삐이이―!

"음?"

채찍을 이용하여 회피 동작을 펼쳤던 녹색 머리의 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노란 구체를 쳐다보았다.

열 개나 되는 구체가 불길한 고주파 음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피할 틈은 없어 보였다.

이제 막 도착한 곳에 저것들이 이미 당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크 메이트다. 이상한 여자. 초열지옥 십지폭쇄."

그런 여인의 눈에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는 전시영의 모습이 반대편 건물에 보였다.

어깨까지 기른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손목을 꺾자, 주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쿠콰콰콰콰쾅!

노란색 구체가 연쇄적으로 터져 나가며 화염을 무수히 뿜어낸 것이다.

굉음과 함께 건물 옥상이 박살 나는 걸 확인한 전시영은 흰 연기가 올라오는 손끝에 입김을 불었다.

"후!"

그러고는 지상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루시아를 향해서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이 언니한테 반하지는 말라고."

한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휘리리릭! 철퍽!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리더니, 전시영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의 정체는 약간 끈적끈적한 느낌의 암녹색 구체였다.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한 표정으로 구체를 바라보던 전시영은 뭔가를 깨달은 듯 잽싸게 뒤로 몸을 날렸다.

"에라이!"

쿠화아아앙! 촤르르륵!

굉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수의 파편이 주변 모든 물체에 구멍을 숭숭 내기 시작했다.

지척에 서 있었던 전시영의 육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은은한 황금빛에 휩싸인 그녀의 몸은 파편에 꿰뚫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라연금강의 두광!"

투타타타타타!

방어 스킬을 시전한 덕분에 목숨은 건졌지만, 전시영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휘리릭! 턱! 쉬이익!

채찍을 걸고 건물 위로 펄쩍 뛰어오른 녹색 머리의 여인이 재차 암녹색 구체를 날려 댔기 때문이었다.

"오호호호! 프래그 블라스트(Frag Blast)!"

휘리리릭! 철퍽!

잽싸게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며 엄폐물 뒤로 숨었지만, 암녹색 구체는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며 기어코 전시영을 따라왔다.

그야말로 사기적인 스킬이 아닐 수 없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전시영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손끝의 노란색 구체를 어디론가 공간 이동시킬 뿐이었다.

"초열지옥 역풍."

콰아아아앙!

지척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으나, 전시영의 육신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다.

역풍이 폭발하면서 암녹색 구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파편을 모조리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폭발 그 자체도 상당 부분 상쇄하여 전시영은 방어구조차 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도 녹색 머리 여인의 공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아, 저 인간은 지치지도 않나."

재차 채찍을 휘두르려는 모습에 전시영은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아무래도 멀리 있는 편이 더 공격을 피하기에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귓가를 간질이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챠라랑! 쉬이이익!

"음? 이 소리는?"

녹색 머리 여인은 공격을 멈추고 곧장 반대편 건물에 채찍을 걸었다.

그녀의 신형이 어디론가 빨려들 듯 사라지자, 곧이어 푸른 원반이 날아들었다.

쉬쉬쉬쉭!

"그래. 원래 네놈이 목표였지. 신나게 싸우다 보니 까먹어 버렸네."

이번에는 미리 보고 대응하지 못했기에, 지난번처럼 차크람의 중심을 꿰는 수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녹색 머리의 여인은 채찍을 이용한 이동기로 간단하게 회피해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나단 잭슨의 공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텔룸 콩쿠수스."

쐐애애액! 삐이이―! 삐이이―!

지상에서 루시아가 쏘아 보낸 빛의 화살이 날아들고, 곧이어 불길한 소리를 내뿜는 노란 구체까지 주변에 생성되었다.

S급 헌터 세 명이 펼치는 파상공세,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쿠콰콰콰! 콰아앙! 콰광!

굉음과 함께 건물 옥상이 완전히 분쇄되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공격이 먹혀들었다.

"오호호호호! 잘 놀다 갑니다!"

하지만 듣기 싫은 마녀 웃음과 함께 녹색 머리의 여인이 연기를 뚫고 튀어나와 저 멀리 날아가는 게 아닌가.

쉬이익―! 휘리릭! 쉬이익―!

그녀는 채찍을 건물 이곳저곳에 걸면서 엄청난 속도로 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예쁜 언니들!"

폐허가 된 길거리에 남은 세 명의 S급 헌터는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녹색 머리의 여인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뭐가 저렇게 빨라?"

"아무래도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네요. 일단 돌아가죠."

"그래. 협회에 보고하고 저 여자의 정체부터 알아봐야겠어. 어이! 아저씨!"

전시영은 가만히 서서 여자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고 있던 조나단 잭슨에게 말을 걸었다.

"강인한 모습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뒈질 뻔했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지?"

"난 또 저런 타입 좋아하는 줄 알았잖아."

"시끄러워.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다. 사례는 반드시 하지."

조나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 지부는 정체불명의 헌터에게 박살 났지, 그런 과정에서 전시영과 루시아의 도움까지 받았다.

대놓고 적대하던 사람에게 목숨을 구원받는 기분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아가 문득 무시무시한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런데 우리가 부순 건물은 어떡하죠?"

"아?"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길거리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폭발로 인해 건물이 몇 채나 연속으로 쓰러지고 불타올랐다.

루시아는 전시영을 바라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제 스킬은 건물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만."

"와! 이게 다 내 잘못이라 이거지?"

"아무래도 펑펑 터지는 거니까, 지분이 좀 크지 않겠어요?"

전시영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하지만 이윽고 뭔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나단 잭슨에게 가서 말했다.

"야, 책임져."

"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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