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잔디 같은 초록색 머리에 쫙 달라붙는 탱크톱, 핫팬츠 위로 찬 유틸리티 벨트가 인상적인 여인.
연기를 뚫고 솟구친 그녀는 근처의 건물 옥상에 내려섰다.
여자는 곧장 허리춤에서 꺼낸 채찍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후웅! 후웅! 후웅!
채찍의 끝에는 큼지막한 암녹색 기운이 돋아나 그 여자의 주변을 위성처럼 에워싸며 돌았다.
"자, 또 간다!"
후우웅! 쐐애애액!
채찍에서 분리된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지자, 미국 헌터들은 마치 놀란 메뚜기 떼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방금 저 암녹색 기운의 위력을 몸소 느껴 보았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콰아아아앙!
아니나 다를까, 암녹색 기운이 지면에 닿자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재빨리 몸을 날린 덕분에 직격은 면했지만, 미국 헌터들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폭발과 함께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한 암녹색 빠르게 쏘아졌기 때문이었다.
파편에 얻어맞은 헌터들은 마치 클레이모어에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방어구 덕분에 치명상은 면할 수 있었으나, 당장 전투에 투입할 수는 없었다.
동료의 태반이 부상자가 되어 쓰러지자, 조나단 잭슨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안광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저 미친 여자는 뭐야? 부상자 수습하고, 여유 있는 인력은 곧장 반격해!"
"예!"
조나단은 살아남은 미국 헌터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큼지막한 차크람을 네 개나 뽑아 들었다.
챠라랑!
무기를 양손에 두 개씩 나눠 쥔 조나단 잭슨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뚝뚝 꺾었다.
"이제 네년이 어디 소속인지는 중요치 않다. 시체조차 찾지 못하도록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크라이시스 서클."
쉬리리릭!
은은한 청색 빛이 감돌던 차크람은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상대에게 날아들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휘어지며 피할 공간을 봉쇄했기에, 회피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전시영도 저 크라이시스 서클을 피하지 못하고, 방어 스킬로 때우지 않았던가.
"훗! 재미있는 장난감이로군."
하지만 녹색 머리의 여자는 코웃음을 치더니, 채찍을 여유롭게 휘돌렸다.
그러자 휘어진 채찍의 끝이 차크람의 중심을 교묘히 관통하는 게 아닌가.
휘리릭! 스슥―!
손잡이인 안쪽 면에 힘을 주며 슬쩍 잡아당기자, 쇄도하던 네 개의 원반이 가볍게 정렬되었다.
"고작 이딴 걸 무기랍시고 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오호호호홋!"
소리 높여 웃으며 차크람을 제어한 그녀는 채찍을 강하게 흩뿌렸다.
쉬리리릭!
놀랍게도 맹렬하게 회전하던 네 개의 원반은 주인을 향해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절묘한 각도로 휘어지지는 않았지만, 속도 하나만큼은 조나단이 던졌을 때보다 훨씬 빠른 것 같았다.
처저저적!
하지만 조나단 잭슨은 쏜살같이 날아드는 차크람을 가볍게 잡아챘다.
마치 네 개의 원반이 손아귀로 알아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차크람에는 회수 기능이 있어서 주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호오? 단순한 방법으로는 안 된단 말이로군. 그럼 이건 어때?"
조나단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녹색 머리의 여자는 이내 채찍의 끝에 암녹색 기운을 생성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미국 헌터들을 무수히 쓰러뜨렸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후우웅! 쐐애애액!
그녀가 채찍을 강하게 떨치자, 암녹색 기운이 빠른 속도로 쏘아졌다.
조나단 잭슨은 투사체의 방향을 보고 잽싸게 엄폐물 뒤에 몸을 숨겼다.
츠팟―!
그런데 놀랍게도 빠르게 날아가던 암녹색 기운이 급격하게 방향을 트는 게 아닌가.
거의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꺾인 투사체는 조나단의 바로 앞에 툭 떨어져 내렸다.
암녹색 기운은 완벽한 구체였지만, 마치 점착 폭탄처럼 지면에 착 달라붙었다.
텁! 카가각! 카가각!
그러고는 왠지 불길한 느낌의 괴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Mother f……."
순간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조나단 잭슨은 보유한 차크람을 몽땅 꺼내서 마치 방패처럼 겹쳐 들었다.
챠르르륵! 쿠화아아앙!
강력한 폭발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오며, 조나단의 육신을 쭉 밀어냈다.
암녹색 기운은 그저 거구의 흑인을 날려 버리기만 한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파편도 함께 쏟아 냈다.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간 조각들은 주변의 모든 물체를 그야말로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클레이모어 수십 개를 한꺼번에 터트린 듯한 위력이었다.
슈우우우! 터엉!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간 조나단 잭슨은 무너진 건물 잔해에 처박히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커으으으!"
즉사할 정도의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몸 곳곳에 파편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겹친 차크람과 방어구가 육신을 보호했으나, 무수히 많은 쇄설물을 모두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나단은 신음을 흘리며 옆으로 몸을 굴려 건물 잔해에서 빠져나왔다.
쿠우우웅!
그러자 공교롭게도 먼젓번의 폭발에 흉물이 되었던 건물의 상층부가 떨어져 내렸다.
하마터면 무방비 상태로 수십 톤의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릴 뻔한 조나단 잭슨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스킬이길래 이런 위력이……."
조나단은 상대의 강력함에 치를 떨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루엣밖에 포착하지 못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로 보아하니 여성인 것만은 확실했다.
접근한 인물이 녹색 머리의 여자라고 생각한 조나단 잭슨은 황급히 차크람을 휘둘렀다.
후우웅!
차크람의 바깥쪽에 달린 칼날을 이용하면 근접전에서도 훌륭한 위력을 발휘했다.
웬만한 수준의 방어력이라도 일격에 찢어 버릴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상체만 뒤로 젖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해 냈다.
"어이, 진짜 이럴 거야?"
"으음……. 전이었군."
"내가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알았어. 알았다고. 전시영, 됐나?"
"이렇게 까칠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텐데? 저 괴상한 하이 텐션의 여자가 널 찾고 있다고."
"젠장!"
푸쉭!
조나단은 팔목에 박힌 암녹색 파편을 뽑아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솔직히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강했다.
이미 알려진 8대 S급 비인가 헌터 중에 저런 사람은 존재치 않았으니, 뒤가 구린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엄청난 지원을 받고 큰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면, 자신을 이토록 몰아붙일 수는 없을 테니까.
"러시아가 비밀리에 키운 비인가 헌터가 분명해."
"아무리 봐도 러시아 사람 같지는 않은데? 줄곧 영어를 쓰고 있잖아."
"억양이 딱 러시아 마피아였다고."
"에이. 편견이 너무 심한데?"
"귀찮게 말 걸지 말고 꺼져."
옆에서 전시영이 자꾸 깐족거리며 말을 걸자, 조나단 잭슨은 벌컥 화를 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데, 마침 여기 훌륭하고 아리따운 S급 헌터가 둘이나 있지. 어때?"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이냐?"
"정중하게 도와 달라고 한마디만 해. 그럼 힘을 보태 주지."
"……."
"K―예절로다가 고개도 딱 숙이고. 대충 어떤 건지 알지?"
전시영의 요청에 조나단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녀석이 보기에는 저 녹색 머리의 괴물보다 눈앞의 이 여자가 더 미친 것 같았다.
머리도 새빨개서 왠지 더 그런 느낌이었다.
"하……."
"자,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에도 당신네 헌터들 깡그리 죽어 나간다고! 저 소리 안 들려?"
조나단 잭슨이 황당한 듯 한숨만 내쉬고 있자, 전시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쿠화아아앙!
마침 공교롭게도 녹색 머리 여자가 날린 암녹색 구체가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그래. 알았다고. 부탁한다. Shit!"
"뒤에 욕은 빼고."
"……도와줘."
"흐흐!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전시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루시아가 깃발 창을 한 바퀴 휘돌리며 투구 덮개를 내렸다.
철컹!
"반격의 시간이로군요."
* * *
전시영과 루시아가 정체불명의 비인가 헌터와 전투를 치르려 하고 있을 때, 블라드 유진은 호텔로 돌아온 상태였다.
종전 협상이 결렬되고 헌터 협회가 혼란에 휩싸였음에도 조지훈은 그의 요청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직접 오지는 못했어도 협회 직원을 대신 보낸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미궁 전략부 대리 강선아입니다."
호텔 객실로 들어온 사람은 유진을 향해 깍듯한 인사부터 건넸다.
그가 한국 헌터계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깔끔한 정장에 무테안경을 쓴 강선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블라드 유진은 인사 대신 질문부터 던졌다.
"조지는 어디 가고 왜 네가 왔지?"
"예? 조지가 무슨……. 아, 내부 사정상 조지훈 부장 대신 제가 왔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내부 사정?"
"저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는 터라."
스윽!
그는 대충 얼버무리는 강선아의 앞으로 다가가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을 맞췄다.
정말이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사람이 코앞으로 얼굴을 가져오자,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하지만 유진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츠츠츠츠츠!
붉은빛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자, 강선아는 알아서 소매를 걷었다.
그녀가 내민 팔을 투명하게 변한 손으로 부여잡자, 새빨간 혈액이 그의 체내로 빨려 들어왔다.
이윽고 블라드 유진은 혈성쇄혼술과 흡혈 스킬을 모두 해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
전신을 관통하는 오묘한 느낌에 강선아는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냉전 종식 협상이 결렬되었군. 협상 중에 러시아 임시 지부가 공격받았나?"
"어어? 그, 그걸 어떻게……?"
방금 협회 내부에서 터진 일을 그가 훤히 알고 있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아직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일인데, 호텔에만 머물던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유진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강선아에게는 권한도 없는 데다가, 한국 헌터 협회에 그럴 능력 자체가 존재치 않았으니까.
"얼빠진 얼굴로 쳐다만 보지 말고, 가져온 거나 내놔."
"아, 네."
그녀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았다.
달칵!
뚜껑을 열고 가방을 돌린 강선아는 공손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소파에 앉은 그는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검은색의 각진 물체는 조지훈에게 요청했던 휴대 전화였다.
블라드 유진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 전화를 켰다.
그러고는 잠깐 눈을 감고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제 막 처음 켜진 새 휴대 전화가 울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띠디디딕!
"어어?"
아직 주인에게 번호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전화가 걸려 오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머그잔을 들고 일어난 그는 창가로 걸어가더니, 누군가와 통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강선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일의 중간부터 마지막 단계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음?"
그런데 문득 그녀는 누군가가 서류 가방을 이리저리 헤집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귀여운 아이가 가방을 뒤집어서 탈탈 털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장면이었지만, 강선아는 웃는 낯으로 말을 걸어 보았다.
"안녕? 넌 누구니?"
그러자 작은 체구의 소녀가 새카만 눈을 반짝이며 암청색 물체를 들이밀었다.
문득 날카로운 무언가가 목을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난 레니야. 왜 내건 안 줘?
강선아는 양손을 펼쳐 든 채,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눈물을 흘렸다.
정체불명의 살기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부장님, 왜 절 이런 무시무시한 곳으로 보내셨나요. 아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