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난데없는 현상에 블라드 유진과 페드로는 동시에 도시의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을 붉게 물들인 화염과 시커먼 연기는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시사했다.
게다가 그와 대치하고 있던 페드로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것도 네놈들 짓인가."
"크크크크! 아무래도 양측의 전력이 비슷해야 치고받을 때 치열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어?"
유진은 이미 조지훈으로부터 냉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보를 받고 있었다.
한국 헌터 협회는 미국과 러시아의 헌터들을 최대한 떨어뜨려 충돌을 억제하고자 했다.
그 말인즉, 도시 반대편에서 발생한 폭발은 미국 협회 지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혼자가 아니었군.’
페드로는 인간으로 위장한 고위급 마족이었다.
게일드를 덜떨어진 놈이라 지칭하는 거로 봤을 때, 녀석의 지위는 그보다 아래가 아닐 터였다.
"더 해볼 생각인가? 별로 추천하지는 않는다만."
띵! 칙! 칙!
블라드 유진의 공격이 멈추자, 페드로는 대마초를 꺼내서 여유롭게 불을 붙였다.
그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천즈한을 통해서 들었을 텐데도, 전혀 긴장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도시 반대편에 있을 동료 외에도 뭔가 다른 수가 있는 기색이었다.
―내려갈까?
녹턴을 타고 하늘 위에 떠 있던 레니에게서 문득 의념이 전해져 왔다.
그와 마찬가지로 안테리오르 타워 최상층의 전투를 떠올렸기에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모양이었다.
"아니, 됐어."
레니의 질문에 대답한 거였지만, 동시에 페드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좋은 선택이야. 피차 어렵게 갈 필요 없지. 우리가 준비한 건 저게 다가 아니거든."
"마족이 셋이라는 의미인가."
"알아서 생각하라고. 후우우!"
페드로는 코와 입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순식간에 옥상 난간을 타 넘었다.
휘익! 쿠콰콰콰!
놈이 뛰어내린 직후, 곧바로 굉음과 함께 암청색 기운이 터져 나왔다.
유진과의 합의가 끝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러시아 헌터들을 공격한 것이다.
슬쩍 옥상 난간으로 다가가 보니, 길거리에는 대참사가 펼쳐져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페드로는 반월참을 무수히 쏘아 내 러시아 헌터들의 수효를 절반 가까이나 줄여 놓았다.
"역시 아까운 놈이야."
놈을 하수인으로 거둬들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묘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저런 수준의 실력자가 실무 직책에 머무르다니, 대체 마계에는 얼마나 강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언젠가는 그런 놈들과 맞붙을지도 모르는 일.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세상이 도래할 것만 같았다.
"내려와."
슈우우우우!
녹턴의 등에 올라탄 그는 유유히 하늘을 날아 호텔로 되돌아갔다.
‘조직 단속이 좀 필요하겠어.’
맑은 하늘을 질주하던 도중, 블라드 유진은 DK에게 간단한 의념을 보냈다.
* * *
한편, 전시영과 루시아는 쇼핑몰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달랑 파자마만 입고 있었던 루시아는 전시영이 집에서 가져온 옷을 잠시 빌려 입었다.
"와……. 진짜 안 어울려. 어떻게 이런 옷만 있는 거죠?"
"크흠! 내 패션이 뭐 어때서?"
"라이딩 슈트나 밀리터리룩밖에 없잖아요. 게다가 거의 태반이 운동복이네요."
"아, 그게 편하다고."
"그래요. 뭐, 어차피 새로 살 거니까."
빨간 운동복에 슬리퍼를 신은 루시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필이면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걸 가져와서 전시영은 가는 내내 핀잔을 들어야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송파구로 이동하여 적당한 쇼핑몰을 발견했다.
국토가 극단적으로 좁아지고 경제가 박살 났지만, 상류층을 위한 장소는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 지금처럼 최고급 소재가 넘쳐나는 세상에는 명품이 더욱 큰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저 고가 정책으로 인하여 가격만 높은 게 아니라, 소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비쌌으니까.
특히 희귀 몬스터의 부산물로 제작된 물건은 아예 모조품을 만들 시도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쇼핑몰의 명품관에 가 보니, 상당수의 사람이 매장에 몰려 있었다.
명품관의 특성상 입장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예약해 두고 다른 곳을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엄청나게 복잡하네요.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되는 건가?"
"인구 밀도가 높으니까 그만큼 부자들도 한곳에 몰려 살 수밖에. 휴일이라고 다들 쇼핑 나온 모양이네."
"아,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최근에는 교외로 나가서 사는 사람도 많다던데, 그래 봐야 당장 그게 얼마나 되겠어?"
"하긴 원래 살던 곳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테죠."
입장 대기자 명단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쓴 두 사람은 다른 매장을 돌아보고 있었다.
운동복에 슬리퍼를 신고 선글라스를 쓴 여자들이 돌아다니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루시아의 긴 금발과 둘의 큰 키가 관심을 잡아끄는 데 한몫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뭇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쇼핑몰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둔중한 진동이 건물을 뒤흔드는 게 아닌가.
쿠구구구구!
"음? 왜 이러죠? 지진이라도 난 건가."
"한국은 지진이 드문 편인데. 특히 서울에는 더 그렇고. 게다가 꽤 가까운 곳에서 진동이 시작된 것 같아."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건데요?"
"너도 폭발 스킬만 내내 써 봐. 아주 그냥 도사가 된다고."
쇼핑몰에는 창문이 전혀 나 있지 않았기에, 바깥의 상황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얼른 건물 밖으로 나가서 지진의 근원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빽빽한 건물로 가득한 빌딩 숲에서 원인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 연기다!"
"불 난 거 아니야?"
그런데 지진인가 싶어서 대피한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로 가 보자."
전시영과 루시아는 쇼핑몰 뒤편으로 돌아가서야 충격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높다란 건물 사이로 시커먼 연기와 함께 간헐적으로 화염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무언가를 느꼈다.
콰광! 쿠구구구구!
"스킬이군."
"헌터끼리 싸우는 모양인데요?"
"서울에서 미친 듯이 치고받을 놈들이라면……. 냉전뿐이겠지."
"아마도요. 어쩌실 거예요?"
"가야지. 난 그냥 구경만 할 수 없는 입장이라."
"저도 돕죠."
"그래 주면 고맙고."
만날 티격태격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무슨 일이 발생하면 두 사람은 대가 없이 서로를 도왔다.
작년부터 블라드 유진을 따라다니며 생긴 버릇이었다.
항상 함께 싸우다 보니 전우애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전시영과 루시아는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곳으로 황급히 달려가 보았다.
그러자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난번 러시아 헌터들의 습격 때처럼 그저 폭탄만 사용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저렇듯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활활 타오르지는 않을 테니까.
"며칠 새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 저기 저 사람들 미국 헌터들 아닌가요?"
"그러네. 아! 여기가 그럼 미국 임시 지부였나 보구나? 근데 왜 갑자기 또 싸우는 거지?"
협회로부터 정보를 받아 보고 있던 전시영은 상황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블라드 유진의 개입으로 인해 멈췄던 냉전이 어째서 재개되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오늘은 냉전 종식 협상을 하는 날이 아니었던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고."
미간을 찌푸린 전시영은 불타는 임시 협회 지부 건물 근처에서 미국 헌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그들 중 왠지 익숙해 보이는 거구의 흑인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져 보았다.
"여, 무슨 일이야?"
"음? 전이었군.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지?"
"제발 날 성으로만 부르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이름의 음식이 있다고."
"이봐. 그렇게 치자면, 나초도 원래 사람 이름이었어. 내 마음대로 부를 거니까, 간섭하지 마시지?"
"유래가 다르잖아. 유래가!"
조나단 잭슨에게 말을 걸었던 전시영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이 괴상한 흑인과는 항상 대화가 잘되지 않았다.
이자가 매번 헛소리와 궤변만 늘어놓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전시영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화를 삭인 뒤 말을 이었다.
"휴! 어쨌거나 폭발은 뭐야? 냉전 종식 협상 중 아니었어?"
"물론 그랬지. 우리도 전쟁이 끝날 줄 알고 있었는데, 대뜸 기습을 가해 오더군."
"흉수는?"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이런 짓을 할 놈들은 정해져 있지 않겠어?"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미국 헌터들은 방금의 폭발이 러시아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종전 협정을 체결하기 전이니, 이는 당연한 추론이었다.
제삼자인 전시영이 생각하기에도 러시아 말고는 이런 일을 할 세력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거야? 설마 똑같이 러시아 임시 지부를 치겠다는 건 아니겠지?"
"본토와 연락 중이다. 보통은 선조치 후보고 하는데, 사안이 워낙 중해서 말이야. 명령이 내려오면, 그대로 실행할 예정이다."
"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얼른 휴대 전화를 들었다.
미궁 전략부장에게 냉전이 재점화될 기미가 보인다고 알려 줄 작정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걸어 보았지만, 조지훈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시영은 어쩔 수 없이 메신저 어플로 협회의 지인들에게 현재 상황을 전파했다.
그녀는 안지홍에게까지 같은 메시지를 보낸 다음에야 휴대 전화를 집어넣었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얼쩡거리다가 냉전에 개입하는 작전은 더 이상 먹히지 않을 거다."
"알고 있었네?"
"당연하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이는데 모를 리가 있나. 만약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모조리 분쇄한다. 그러니 웬만하면 빠져 있으라고."
"그래. 그래. 어련하시겠어?"
이미 미국과 러시아의 막무가내식 냉전은 겪어 본 바 있었다.
남의 땅에서 제멋대로 전쟁을 벌이는 놈들이니, 뭔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 알려 주지. 이미 충원은 진행 중이다."
조나단 잭슨은 전시영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눈앞의 병력만 보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꼴이네."
어이없는 표정으로 조나단을 쳐다보던 전시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루시아와 함께 다시 쇼핑몰로 돌아가려 했다.
쿠화아아앙!
한데, 문득 두 사람의 뒤에서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터져 나오는 게 아닌가.
"뇌신의 흉장. 전투 모드 전개."
츠츠츠츠츠!
반사적으로 뇌신의 흉장을 발동한 루시아는 번쩍이는 백색 깃발을 휘둘러 날아드는 파편을 상쇄시켰다.
터더덩! 터덩!
그러는 동안, 전시영은 미국 헌터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폈다.
그러자 시커먼 연기를 꿰뚫으며 허공으로 솟구친 인형이 시야에 포착되었다.
"오호호호호! 끝난 줄 알았지?"
날카로운 고성의 광소(狂笑)가 그자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전시영과 루시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중얼거렸다.
"와! 텐션 지리네."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