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오! 한국 호텔의 스위트룸은 이렇게 생겼네."
전시영은 객실 이곳저곳을 꼼꼼히 돌아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레니가 뛰어놀 정원과 유진이 휴식을 취할 테라스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만족스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실과 방이 넓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게다가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고층 건물만의 매력도 있었다.
"뭘 그렇게 샅샅이 살펴요? 한국 호텔 처음 와 봤어요?"
루시아는 팔짱을 낀 채 창밖을 감상하다가 뒤를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전시영이 자꾸만 시끄럽게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집이 있는데, 뭐 하러 호텔에 묵어? 외국 갔을 때나 이용하는 거지."
"그렇긴 하네요. 근데 본인 집에 가시지 여기까진 왜 따라오셨죠?"
"크흠! 왜? 뭐? 조용히 안 해?"
방이 다섯 개나 있는 호텔 최상층의 스위트룸이라, 두 사람이 들어와 머무는 건 문제가 없었다.
블라드 유진도 딱히 그녀들이 주변을 알짱거리는 걸 거부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마도 레니와 자주 놀아 주다 보니, 접근을 허용하는 건지도 몰랐다.
"오늘은 좀 돌아다녀 봐야겠네. 옷이고 뭐고 전부 불타 버렸으니,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야지."
"그나마 장비는 건져서 다행이네요."
폭발로 인해 전시영과 루시아는 짐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아이템이야 공간 확장 주머니에 넣어 두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그 외의 물건은 몽땅 불에 타 버렸다.
두 사람은 호텔 밖으로 나가서 쇼핑하기로 했다.
"갔다 올게. 나 보고 싶어도 울지 말고."
"……."
덜컥! 띠디딕!
두 여자가 사라지자, 스위트룸은 그제야 적막에 휩싸였다.
유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기울였다.
"캡슐이 벌써 다 떨어졌군. 요청해야겠어."
그는 혈액 외에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나, 몇 종류의 음료는 마실 수 있었다.
특히 커피는 1천 년을 건너뛰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아하는 기호 식품이었다.
아쉬운 대로 블라드 유진은 믹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빌딩 숲이 연속된 도시를 누군가는 답답해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신선한 경관이었다.
개미처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위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름 소소한 재미였다.
그런데 문득 그런 유진의 눈을 사로잡는 장면이 있었다.
쿠우우웅! 드드드드!
어디선가 폭음이 들려오더니, 이윽고 둔중한 진동이 호텔을 타고 흘렀다.
하늘 높이 솟구치는 화염과 흩날리는 건물 잔해를 지켜보던 그는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뭔가 또 일이 벌어지는군."
대략 3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라, 식별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하지만 피의 권능을 끌어 올리자, 마치 망원경으로 당겨 오듯 시야가 극단적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의 그림자에서 자그마한 인형이 불쑥 튀어나왔다.
―머야? 또 불꽃놀이야?
그림자에서 고개를 삐죽 내민 것의 정체는 레니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허공으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유진의 집이 불탈 때도 저러더니, 뭔가 펑펑 터지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폭탄을 터트린 듯한데.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는……."
그런데 불현듯 그의 시야에 심상치 않은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저자는?’
폭발이 일어난 건너편 건물 옥상에 누가 봐도 수상한 인물이 검붉은 스위치를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유진은 그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윽고 그는 놈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옷차림이 일전에 들은 설명과 너무도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DK가 말했던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인가 보군. 이거 나름 괜찮은 수확인데?"
S급 비인가 헌터가 제 발로 찾아와 주다니, 길에서 성능 좋은 물건을 주운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뭔뎅?
"S급 비인가 헌터로군."
―가 보자. 가 보자.
"그래. 이건 못 참지."
레니의 요청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호텔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녹턴."
"이히히힝!"
두두두두두!
부글거리는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유령 군마가 낙하하던 블라드 유진의 육신을 받쳐 주었다.
이윽고 그는 녹턴을 타고 폭발 현장 가까이 날아가 보았다.
블라드 유진은 길 건너의 폭발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페드로가 서 있는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스윽! 타닥!
그가 녹턴에서 뛰어내리자, 커다란 낫을 빼 들고 몸을 날리려던 남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을 툭 던졌다.
"환각 효과일 리는 없을 텐데, 네놈은 누구지?"
유진은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에게 뱀파이어 로드니, 피의 군주니 해 봤자 믿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을 소개할 좀 더 적절한 단어를 찾아보았다.
불구경을 나왔다가 하수인으로 쓸 만한 인간을 주워 가기 위해 내려왔으니, 이 정도 소개가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인간 수집가."
"……나만큼이나 미친놈이었군."
페드로는 순간적으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서로 바라보고 있다 보니, 블라드 유진의 정체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긴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자 중 하나가 된 터라, 브라질의 비인가 헌터가 알아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워낙 눈에 띄는 외모가 아니었던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다시 한국으로 온 건가?"
"요즘엔 여기가 편해서 말이야."
"그랬군. 어쨌거나 난 좀 바쁜 일이 있어서."
페드로는 폭발에서 살아남은 러시아 헌터들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녀석의 목표는 저들의 말살인 듯했다.
하지만 유진은 페드로를 그냥 보내 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시뻘건 안광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상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체불명의 비인가 헌터’가 혈성쇄혼술에 저항합니다.]
[하수인 생성에 실패했습니다.]
"음?"
블라드 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는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SS급이 되었는데도 저항해?’
성장한 혈성쇄혼술은 한층 더 강력해졌다.
이제 S급 헌터는 전투 없이 제압 가능했고, 하수인도 무려 스무 명까지 만들 수 있었다.
DK처럼 강력한 정신 방어 관련 스킬을 보유한 경우라도, 완벽한 저항은 불가능했다.
한데,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이거 영 찝찝하군. 대체 뭘 한 거지?"
혈성쇄혼술의 강력한 정신 공격을 감지한 모양인지, 페드로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불쾌한 감각이 뇌리를 지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든 녀석은 스산한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이러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우리 사이?"
"초면이긴 하지만, 몇 다리 건너서 알긴 하잖아."
"놀랍군. 관계가 있다니."
"아, 내가 정확히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구먼. 이거 설명을 좀 해 줘야 하나? 아무것도 못 건지는 싸움은 질색이라서."
띵! 칙! 칙!
난간 너머로 몸을 날리려던 페드로는 완전히 유진을 향해 돌아선 다음, 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DK가 말했던 수제 대마초인 모양이었다.
여유롭게 저걸 피우는 걸 보니, 냅다 도망가거나 러시아 헌터들을 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쑥 향이 물씬 피어오르자, 페드로는 실실 웃으며 지포 라이터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뚜껑을 닫지 않은 탓에 라이터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저러면 심지가 새카맣게 타 버릴 테지만, 녀석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최근에 이렇게 생긴 걸 얻지 않았나? 덜떨어진 놈을 잡고 괜찮은 걸 가져갔다던데."
페드로의 말에 블라드 유진은 문득 품속에 넣어 둔 복주머니를 떠올렸다.
복주머니의 내부에는 다양한 아이템이 들어 있었다.
그중엔 저 지포 라이터의 불꽃과 닮은 형태의 큼지막한 칼도 한 자루 존재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담담한 목소리로 녀석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악염도를 말하는 건가."
"그 아이템 이름이 악염도였어? 난 대충 생긴 것만 알아서 말이야."
유진이 악염도를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끔 꺼내서 몇 번 휘둘러 본 게 전부였으니, 같이 사는 루시아와 전시영 정도만 그 모습을 목격했다.
그녀들이 어디 가서 악염도의 존재를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마계와 관련 있는 놈이로군. 마족인가?"
"머리가 좀 돌아가는 친구였구먼. 크크! 자, 이제 왜 싸울 필요가 없는지 잘 알았겠지?"
"확실히 별 소득 없는 싸움이긴 하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페드로는 시시덕거리는 표정으로 필터 끄트머리까지 태운 대마초를 옆으로 툭 뱉어 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이동하려 하는 러시아 헌터들을 향해서 몸을 날리려 했다.
스팟―! 척!
하지만 녀석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하듯 다가온 블라드 유진이 지척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드로는 퍼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으로 뻔히 보고 있었음에도 순간적으로 그의 움직임을 놓쳤으니까.
무시무시한 살기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녀석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지?"
"궁금했거든."
"뭐가?"
"마족에게도 통하는지가."
쉬이이익!
어느새 블라드 유진의 손에는 4m 길이의 핏빛 칼날이 들려 있었다.
SS급이 된 소수혈인은 대략 2m였지만, 다섯 줄기를 하나로 합쳐 검으로 만들면 지금처럼 길이가 대폭 늘어났다.
콰칭―!
페드로는 잽싸게 카니지 사이드를 놀려서 붉은 칼날을 막아 냈다.
자루를 통해서 느껴지는 충격이 육신에 부담을 줄 정도로 강렬했다.
"불가침 협정을 깨고,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건가?"
녀석은 실실 웃던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츠츠츠츠츠!
페드로는 카니지 사이드에 암청색 기운을 덧씌우더니, 소수혈인을 강하게 밀어냈다.
스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붉은 칼날이 튕겨 나오는 걸 본 유진은 눈에 이채를 띠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비슷하지만 게일드보다는 한 수 위다. 이거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군.’
단 한 수에 불과했지만, 그는 페드로의 수준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게일드 백작보다 좀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유진은 물러설 마음이 전혀 없었다.
봉인율이 45%까지 낮아진 그는 이제 SS급이 되었으니까.
상대가 아무리 마계 백작급의 마족이라 해도 능히 꺾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또 다른 문제지만.
‘적당히 힘 조절을 할 수 있는 상대였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마신강림으로 초장부터 압도하는 게 좋겠군.’
한데, 머릿속으로 페드로를 어떻게 요리할지 구상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문득 동쪽 저 먼 곳에서 굉음과 함께 시뻘건 무언가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게 아닌가.
쿠화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