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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블러드-84화 (85/226)

9화

살아남은 미국과 러시아 헌터들은 임시로 숙소와 협회 지부를 구축했다.

양국이 사용할 건물은 한국 헌터 협회에서 제공해 주었다.

두 건물은 그들이 웬만하면 부딪치지 않고, 움직이더라도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상당한 거리를 두게 했다.

동서로 서울의 끝과 끝에 배치하여 충돌을 최소화한 것이다.

그런 다음, 조지훈은 협상장을 열었다.

중심에 블라드 유진이 끼게 되어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냉전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양국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자, 미궁 전략부장은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끼리 싸워 봐야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인류의 적은 명확하지 않나요?"

"애초부터 러시아 측에서 우릴 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원인 제공한 쪽에서 사죄하기 전에는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흥! 선후를 따지자면, 끝도 없지. 10년 전 리고르 아스페라의 일을 아직도 끌고 오는 것부터가 문제 아닌가? 게다가 보상은 5년에 걸쳐서 분할 지급하지 않았나."

"뭐 분할 지급? 그거 달랑 3년간만 내고 힘들다면서 중단해 놓고 뭐?"

하지만 조지훈의 예상과는 달리, 양국의 입장 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그저 블라드 유진이라는 초월적인 인물과 엮임으로써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헌터계의 냉전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본인들의 영토가 아닌 한국 땅에서 말이다.

가히 보기 좋지 않은 광경이었으나, 어떻게든 한 대씩 주고받으려는 마초들을 말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일단 제 얘기를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조지훈은 양국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커 카드를 꺼내 들기 위해서 시선을 모았다.

그러자 대표들은 일단 설전을 멈추었다.

이 자리를 만든 건 한국 헌터 협회였으니, 이야기는 들어주겠다는 태도였다.

물론 미궁 전략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경전이 이어질 테지만.

작게 한숨을 쉰 조지훈은 탁자에 편철된 서류 뭉치를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나직이 말했다.

"기억하실 겁니다. 홍콩에서 있었던 두 달 전의 대참사를요."

"그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 2층에서 먼저 기습을 가한 건 저놈들이었다고."

"무슨 소리야? 물이 부족하다면서 위협적으로 접근해 온건 네놈들이 먼저 아니었나?"

안테리오르 타워 이야기를 꺼내자, 양국은 다시 불타오르려 했다.

하지만 이어진 전략부장의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안심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양국에 이렇게 치고받을 여유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군요. 그 사실을 알았다면, 드라코 도무스 공략 때도 지원 좀 해 달라고 미리 말했을 텐데요."

한국은 이제껏 대규모 미궁 공략 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여유가 거의 없음에도 국제 사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자국의 문제를 해결할 때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다.

당시 블라드 유진의 공략 추진이 너무 빠르기도 했지만, 아마 시간이 있었더라도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미국이나 러시아가 보기에 작디작은 한국을 돕는 것은 큰 이익이 없었으니까.

"크흠!"

"음……."

그 사실을 꼬집자, 양국의 대표는 작게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대표는 괜스레 먼 산을 바라보며 연신 헛기침만 해 댔다.

저들도 사람인 이상, 양심에 찔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냉전을 끝내겠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감정의 골은 엄청나게 깊어졌고, 패권 경쟁에서 충돌을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조지훈은 냉전 종식의 방점을 찍기 위해서 준비해 온 폭탄을 투하했다.

"한국에서의 충돌? 전략적 요충지라서 그렇다고요? 뭐, 다 이해합니다. 국익을 위해서 뭔들 못 하겠습니까? 하지만 그 전에 이걸 좀 보고 행동하셨으면 합니다."

척!

조지훈이 편철된 서류를 넘기자, 수십 장의 사진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배경은 하나같이 어두컴컴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뭡니까?"

사진에 찍힌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 양국의 대표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전략부장은 낮은 목소리로 엄중하게 말을 이었다.

"중국이 접촉 중인 제3세계의 주요 비인가 헌터입니다. 전원 상당한 규모의 카르텔을 갖추고 있는 조직의 보스죠. 보십시오. 짧은 시간에 우리가 파악한 것만 열다섯 명이 넘습니다."

"……."

"이런데도 서로 치고받기만 하고 있을 겁니까? 중국이 큰 타격을 입었다고 안심한 채로요?"

조지훈의 신랄한 비판에 양국의 헌터 대표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침묵했다.

S급 한 명에 A급 최상위 헌터를 무수히 잃은 중국은 이제 거의 그로기 상태나 다름없었다.

절반 이상의 고급 전력을 잃었으니,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 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중국은 제3세계 카르텔의 비인가 헌터들을 끌어모음으로써 전력 공백을 메꾸려 했다.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발상이었지만, 성공만 한다면 회복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미국이나 러시아보다 더욱 강한 헌터 전력을 갖출 수도 있었다.

당연히 도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만약 안테리오르 타워가 없었다면,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습니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거지요."

현대 사회에서 헌터 전력이란, 국가의 군사력 척도나 마찬가지였다.

마기가 닿기만 하면 먹통이 되는 현대 무기보다 헌터를 키우는 게 훨씬 싸게 먹히고 효과도 좋았으니까.

미국과 러시아의 냉전처럼 미래의 전쟁은 헌터들의 싸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컸다.

이런 현실에서 중국의 확장을 내버려 두고, 치고받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거리였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으로 보이는군요.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싸울 시기가 아님을 인정합니다."

결국에 양국은 조지훈의 말에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싸움을 말리는 데는 제3의 새로운 강자를 등장시키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미궁 전략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냉전 종식을 약속하는 협정서를 꺼내 들었다.

빈칸에 양국 대표의 서명만 들어가면 되는 서류였다.

"영어와 러시아어로 작성된 문서입니다. 간단하게 어떠한 조건도 없이 냉전을 종식한다는 내용만 들어 있습니다. 당장 결정하는 게 어렵다면, 사본을 가지고 가서 나중에 다시 모이는 것도 괜찮습니다."

양국의 대표는 당연히 헌터계의 외교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협정서에 서명하면, 그 즉시 효력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아직 분위기는 냉랭했지만, 미국과 러시아의 대표는 냉전 종식의 필요성을 깨달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뻗댈 수는 없으니, 탐탁지 않아도 언젠가는 서명을 해야만 했다.

물론 본토에 연락하여 충분히 내부 회의를 거치고 난 다음에 말이다.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덜컥! 타다닥!

그런데 문득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의 헌터였다.

그자는 대표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며 은밀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뭐라고? 내 이럴 줄 알았지. 우릴 이곳으로 유인해 놓고 뒤통수를 쳐? 이 협상은 무효다!"

콰앙!

러시아의 대표는 탁자를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지훈이 작성했던 냉전 종식 협정서는 허무하게 허공을 날아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한국 헌터 협회에서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돌아가면 당신들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러시아의 대표 올레그 이바노비치 코토프스키는 불같이 화를 내며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조지훈과 미국 대표 제러미 프리츠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는지 전혀 모르십니까? 아무래도 미국과 관련된 일 같은데요."

"나는 전달받은 게 없습니다."

"후! 알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무슨 일이 있든 대비하시죠."

"그럽시다."

상황을 알 리 없었던 미국 대표 또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문득 문고리를 붙잡았던 제러미가 뒤를 돌아보며 작게 읊조렸다.

"중국 이슈는 흥미롭게 봤습니다. 포장을 참 잘했던데요. 아직 그렇게까지 위험한 단계는 아니지만, 저치에게는 무난하게 먹히더군요."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본토에서도 나름 견제를 하는 중이고요."

"그런데 왜 아무 말도 하시지 않은 거죠?"

"현재까지 상황만 봤을 때, 더 큰 타격을 입은 건 저쪽입니다. 여기서 멈추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랬군요."

"나중에 봅시다. 그럼."

어깨를 으쓱인 제러미 프리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서서 임시 협회 지부로 돌아가 버렸다.

왠지 미국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만 같았던 조지훈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F로 시작하는 단어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 * *

한편, 헌터 협회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임시 러시아 협회 지부가 세워진 강서구 김포국제공항 인근.

풀어헤친 흰 셔츠에 대충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색 넥타이, 짙은 롱코트를 걸친 남자가 5층 건물의 옥상에 불쑥 나타났다.

띵! 칙! 칙!

지포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인 남자는 부산에서 DK와 일전을 벌였던 비산의 암살자 페드로.

이자는 고작 하루 만에 러시아 임시 협회 지부를 찾아냈다.

미국의 공격으로 인해 이제 막 위치를 옮긴 건물을 말이다.

가히 놀라운 정보력이 아닐 수 없었다.

"스읍! 후우! 역시 도시는 언제나 옳아. 인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한꺼번에 죽이기 좋거든."

페드로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품속에서 자그마한 스위치를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건너편의 건물을 바라보며 붉은 버튼을 망설임 없이 눌렀다.

그러자 강렬한 폭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화염이 길 건너에서 솟구쳐 오르는 게 아닌가.

콰광! 콰과과광!

러시아 임시 협회 지부에 붙여 둔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였다.

공교롭게도 페드로가 사용한 폭탄은 미국 헌터 협회 지부에 투척된 것과 같은 제품이었다.

이윽고 폭발에서 살아남은 러시아 헌터들이 도롯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국을 향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 폭탄 테러가 미국 헌터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당장 미국 협회 지부로 쳐들어가기라도 할 법한 기세였다.

"후후! 슬슬 시작해 볼까?"

츠츠츠츠츠!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페드로는 허공에서 거대한 낫을 꺼냈다.

도롯가에 모인 러시아 헌터들을 도륙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하지만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던 녀석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뭔가 섬뜩한 기운이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페드로의 눈에 누군가가 포착되었다.

산들바람에 물결치듯 휘날리는 은빛 머리칼과 흑요석처럼 번득이는 안광, 주변을 둘러싼 기이한 위엄까지.

왠지 사람이 아닌 듯한 분위기의 남성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놀랍도록 인기척이 없어서 순간적으로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착각할 뻔했다.

"환각 효과일 리는 없을 텐데, 네놈은 누구지?"

페드로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질문에 상대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간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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